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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하나님 나라 2157

LNCK 2009. 10. 30. 14:06

 ◈복음과 하나님 나라                계1:8~9                  인터넷설교 녹취, 연도 알 수 없음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알파와 오메가’로 설명하는데, ‘시작과 끝이 되신다’는 뜻이다.

이렇게 ‘역사의 시작과 끝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줄여서 말하면

<하나님 나라>이다.


아래 설교문은, 바울이 전한 복음, 사도요한이 전한 복음은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 + <하나님 나라> 임을 지적하면서

오늘날의 복음이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에만 치우치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성ㅎ경 목사님 설교녹취



◑사도요한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 : 환란과 참음이 요구되는 나라


여러분, 당신은 오늘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계신가?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을 신경 안 쓰고 살아간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요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나님 나라’를 보고 있지 않다면.. 혹시 거듭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만약 현재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한다면.. 그래서 거듭나지 못한다면..

나중에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갈 수도 있다. ↙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신기하게 사도요한은 하나님의 나라를 알고 있었다.


계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요한계시록을 쓸 때, 사도요한은 아주 노년이었다.

그는 자기 신앙 일생을 되돌아보며,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했다.

    나는 장차 과연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예수의 영광과 부유와 축복에 동참하는 자라’고 고백할까?

    만약 이렇게 ‘예수의 영광과 부유와 축복에 동참하는 자라’고 고백한다면 어떻게 될까?


신기하게 사도요한은 하나님의 나라를 알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들은, 사도요한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알고 신앙생활 하는가?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개교회주의’이다.

그런데 그것도 이기적인 개교회주의가 될 때는.. 하나님의 나라(통치)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


사도요한은 개교회주의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염두에 두고 신앙생활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란.. <온 세상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통치> .. 이쯤 설명하고 일단 넘어가자.


그런데 사도요한은,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말한다. 계1:9

그가 설명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환란>과 <참음>과 동의어였다.

온 세상에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기 위해서

그는 일평생 <환란 tribulation>과 <참음 patient endurance>으로 일관했던 것이다.


    저와 여러분의 삶에도.. 일평생 이런 삶이 계속되기를.. 축원 드린다.

    이게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삶’이라는 것이다.


▲제가 우려하는 것은,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핍박이 없다는 것이다.


영화 <에일리언2>에 보면                  *에일리언 alien : 영어로 외계인

거기 여자주인공이 나와서 외계인들과 싸우는데,

영화의 어느 시점엔가, 외계인들이, 이 여자주인공을 공격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의아하게 여긴 여주인공은, 초음파검사처럼, 자기를 찍어본다.

그랬더니 자기 몸속에 외계인(에일리언)이 들어와 있었다!

자기가 사실은 외계인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다.

‘만약에 사탄이 오늘날 나를 공격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내 영혼에 사탄이 들어와 진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같은 편이니까.. 사탄이 애써 공격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여러분, 사도요한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다보니까, <환란, 참음>이 동반되었다.

다시 말해서, 사탄의 공격(환란)이 끊임없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내 신앙생활에.. 환란이 만약 없다면..

‘내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서 ‘사탄의 나라가 나를 공격할 필요가 없게’ 된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살 때, ‘풍랑’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다.

만약 ‘풍랑’이 없다면.. 내가 하나님 나라를 향해 항해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사명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환란과 풍랑을 당하게 되면

‘내가 사명의 길/하나님 나라의 길을 올바로 가고 있구나!’ 안심하시기 바란다.


그리고 노년에 사도요한처럼 고백할 것이다.

계1:9, 나 요한은..  예수의 환난나라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예수님이 전파하신 하나님 나라


▲예수님이 3년 공생애동안 공을 들여서 전파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였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그것에 별로 관심을 들여서 전파하지 않는다.

대신에 ‘개교회(나라)’가 아주 강하다.


이렇게 계속 나가다가는, 전투combat에서 이기지만, 전쟁war에서 질 수도 있다.

(물론 종국적으로 예수님이 승리하시겠지만, 그 승리가 우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민족을 통해서도 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패할 경우)


만약에 예수님이 공생애 3년 동안

제자들에게 <개교회 세우기>에 대해 집중적으로 가르치려 하셨다면

5병2어의 기적을 베푸신 그날에..

아마 그 갈릴리 광야에서, 등록카드 작성토록해서,

2만 명 등록교인 단번에 만들고, ‘갈릴리 전원교회’를 단박에 만드셨을 것이다.


만약에 예수님이 가나 혼인잔치에 가셨을 때

예수님의 관심이 <교회 개척>에 있었더라면

그 날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그 가나 동네 사람들이 깜짝 놀랐을 때

등록카드 쓰게 하셔서, 그 날 수 백 명 교인들을 ‘가나 교회’에 등록시켰을 것이다.

‘가나 교회’가 쉽게 세워졌을 것이다.


예수님이 3년 동안 가르치시고, 몸소 보이신 것은

교회 개척church planting이 아니었다. 

대신에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시고,

각 사람이 이 세상에 ‘소금과 빛’으로 제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것도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을 전파하라는 것이었다. 행1:3등



◑사도행전에서 전파된 하나님 나라


그래서 빌립 집사도 사마리아 성에 피신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했다. 행8:12

바울도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다니면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했고, 행14:22

에베소에 이르러서도 회당에 들어가 하나님 나라를 강론했다. 행19:8


※반면에 아볼로는, 구약성경을 통해서 ‘예수는 그리스도라’ 전파했다. 행18:28, 25

하나님 나라를 전파했다고 성경에 나오지는 않는다.


아볼로는, ‘개인의 구세주’를 전파한 반면,

바울과 빌립은, ‘그 구세주가 역사와 종말까지 주관하시고 다시리시는 주되심’을

전파한 것이다.


▲사도행전의 시작(행1:3)도 하나님의 나라, 끝(28:28)도 하나님의 나라이다.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행23:23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행28:31, 


그러니까 사도행전의 바울의 복음은,

-예수는 구세주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구세주를 예배하러 모이자 .. 이런 차원을 훌쩍 뛰어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했는데,


그 내용인즉,

다니엘서에 다니엘이 말한 바를 인용해서 설명하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천하만민을 다스리시고, 원하는 자에게 나라를 주시고..’이다.


즉, 주님이 온 세상 역사를 다 다스리시고,

나라를 세우시고 하시고, 폐하기도 하시고,

무엇보다 세상의 심판과 종말을 정해 놓으시고

모든 세상 사람들/나라들은.. 그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정치적/물질적 나라가 아니라, (그것과 관계가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의와 화평과 희락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롬14:17


그런데 행18:28, 25절에서 아볼로는, 오직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만 전파했다.

또한 오늘날 우리도 아볼로처럼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만 전파하고 있다.


▲순서가 분명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니까,

예수님이나 사도바울의 전도 내용을 보면,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전파하기에 앞서 ‘하나님 나라’를 먼저 전파했다.

순서가 분명했다는 것이다.


행28:23, 28:31절을 보면, 순서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보다 앞에 나온다.↑


오늘 우리가 전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구슬이 서 말이라도 (내 목걸이로) 꿰어야 보배’ 식으로

또는 ‘숲 속에 10마리 새보다, 내 새장에 갇힌 1마리 새가 더 낫다’는 식으로

하나님 나라에는 거의 관심 없고

오직 개교회주의/개교회 전도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은 (그것도 해야죠)

깊이 기도해보고, 깊이 생각해 볼 문제다.


특히 요즘 (전체 교구가 하나인 천주교와 달리) 개신교는 교단이 여러 개니까

같은 신도시 내에서 본의 아니게 (경제용어로) ‘경쟁업체’ 비슷하게 되고 있다.

교회나 목회자끼리 서로 경쟁해야 하는 분위기로, 본의 아니게, 바뀌고 있다.

이게 다 ‘하나님 나라’ 개념으로 볼 때..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인 것이다.


만약에 그렇게 일부 교회가 ‘승자독식의법칙’으로 ‘부흥했다(?)’고 치더라도,

하나님의 나라적 측면에서 보면 패배인 것이다.

인근의 다른 교회들 다 죽어버리면... 말이다.


(그런데 요즘 어떤 교회들은

인근 작은 교회들과 같이, 짐을 서로 나누어지고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내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고, 큰 그림을 보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에서도, 로마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전파한 것이다.

그런데 바울 당시에 아직 정경이 완성되지도 않았고,

그는 오직 구약권별성경만 이용할 수 있었는데,

어떻게 바울이 ‘하나님 나라’개념을 정립할 수 있었는지.. 참 궁금하다.


물론 성령께서 신령한 가르침을 주셨겠지만,

어쨌든 구약에 ‘하나님 나라’는 다니엘서에 1번 나오고, 그 외에는 안 나온다.


그런데 구약에 보면, 하나님을 떠난 악한 사람들이

맨 먼저 하는 일이 항상 ‘자기들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것도 더 크게!

사탄은 자기 나라를 만든다는 것이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세상은 ‘사탄의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싸움이다.


▲그래서 사실 사도행전이나 요한계시록은.. <개교회 성장/부흥>에 별로 관심이 없다.

‘개교회주의’ .. 이런 것에는 아예 개념조차도 없었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극심한 핍박으로 인한 생존에 급급한 시기에

다른 것(개교회 이기주의)을 생각할 여유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사도행전과 요한계시록의 사도들과 초대성도들

그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에만 있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다스리심(통치)으로 충만하고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온전히 빛으로 세상에 비춰지는 것’이었다.


교회 성장.. 이런 것에는 관심을 둘 만한 정신적 여유조차 없었다.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미래를 바라보는 사도 요한


우리는, 신앙생활 하는 중에, 미래를 안 바라보기 쉽지만,

사도요한은, 장차 다가올 미래를 분명히 바라보았다.

<하나님 나라 개념>이 자기에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계1:8a,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처음과 끝이라)


주님이 내 삶을 인도하실 때 보면,

처음에는 그 인도하심이 ‘확실히’ 보인다. (예를 들면 교회 개척할 때)


그런데 그 중간에.. 평상시에는.. 주님의 인도하심이 잘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다가 맨 마지막에.. 그 인도하심이 다시 ‘확실히’ 보인다. 그런 경향이 있다.

지나고 보니까.. 모든 게 주님의 인도하심이었던 것이다.


그 이유가 뭘까?

왜 중간에는, 주님의 인도하심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을까?

물론 내가 영적으로 둔감해져서, 그 인도하심을 잘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겠지만,


그러나 그런 이유보다도

주님은 <내가 믿음으로 살기 원하시는> 것 같다.

그냥 주님을 믿고/신뢰하고 따라오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중간에.. 조금 흐릿한 길이라도.. 믿음으로 전진한다.


그런데 갈 길을 다 가서 뒤돌아보니까, 그게 주님의 인도하심 이었던 것이다.


여러분, 오늘 내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려면

‘이해와 검증’으로 너무 따지며 살려고 하지 마시라.

그냥 ‘믿음으로’ 전진하시기 바란다.

(만약 내가 다른 길로 가고 있다면.. 주님께서 분명히 막아 주실 것이다.)


개인적 차원에서 ‘시작과 나중’을 설명했지만

역사도 마찬가지다. 시작(창세기)도 분명하고.. 마지막(계시록)도 분명히 있다.

다만 역사의 중간에.. 하나님이 개입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전진해야 한다.


▲계1:8b,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위의 ‘나는 알파와 오메가다’라는 말씀과 유사하다. 또 한번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알파(전에도 있었고) 오메가라(장차 올 자다)

물론 지금도 계신다. (이제도 있고..)


그러니까 주님이 한 순간도 사도요한(나)을 손놓고 계신 적이 없으셨다.

한 순간도 역사를 방치하고 계신 적이 없으셨다.


빌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여러분, 혹시 사명의 길을 가시다가.. 지쳐서 쓰러져 계시는가?

사도요한이 아마, 밧모 섬에서, 그렇게 탈진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내가 ‘승승장구하고 잘 풀려야..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계시고,

일이 막히고 밧모 섬에 갇히는 것은.. 하나님이 손놓고 계신다.’고

그렇게 자의적으로 생각할 때, 낙심에 떨어지는 것이다.


사도요한이 용기를 잃었든지/안 잃었든지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본문을 통해 주님이 말씀해 주신다.

<나는 시작하기도 하고, 끝도 내가 낼 것이다.

나는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장차 올 것이다.

나는 한 순간도 너를/하나님 나라를 손에서 놓고 방치한 적이 없다!>


개인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인류역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전에도 역사를 다스리고 계셨고,

지금도 역사를 다스리고 계시며

장차 오셔서 역사를 심판하실 것이다.

 

▲계1:8b,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이 말씀을 약간 각도를 달리해서 생각해 보면,

여러분, 기독교 신앙이 극단이나 사이비에 빠지지 않으려면,

<과거>도 알고, <현재>도 알고, <미래>도 모두 다 알아야 한다.


①보통 종말론주의자들이 극단에 빠져서 우를 범하는 것은

<미래>에만 관심 있고, <미래>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미래’를 정확하게 보려면..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같이 봐야 한다.

또 미래만 쳐다보다가, 발 앞에 돌부리(현재)를 못 봐서 걸려 넘어질 수도 있다.


②그렇지 않고 <현재>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신자도 있다.

세상에서 살다가.. 갑자기 은혜를 받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올바른 길로 가려면, 과거와 미래를 천천히 배워가야 한다.


③또한 <과거>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도 있는데,

일례를 들면 신학자나 정통주의자들이다.

칼빈이나 웨슬리를 들고 나오고, 청교도신앙을 종종 거론한다.

그러나 과거에만 묶여 있으면.. 극단이나 왜곡으로 빠지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가장 쉽게 범하는 잘못은

<미래>는 알 필요 없다는, 또는 <미래는 도저히 알 수도 없다>는 생각이다.

미래를 다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주신 계시록 등을 통해서.. 천천히 돌다리를 두드려 나가야 한다.

(계시록은 ‘미래를 알아라’고 주신 책이지, ‘미래를 몰라라’고 주신 책이 아니다.)


이런 예를 한 번 들어보자

여러분, 서울과 평양에서는 남북친선축구경기가 열리고

남북문화공연단이 서로 방문공연이 이뤄진다. 그러나 이것만 봐서는 안 된다.


30키로 북방 휴전선에 가면, 남북이 서로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다.

서로 일촉즉발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그러나 이것만 봐서도 안 된다.


올바른 ‘대북관’을 갖기 위해서는.. 여러 면을 같이 봐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도 보고.. 현재도 보고.. 미래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625세대는 ‘과거’만 보고, 신세대는 ‘현재’만 보는 경향이 농후하다)


.................................... 더 읽으실 분 .........................................


▲복음서를 읽다보면, 이런 질문이 생긴다.

왜 주님이, 각 사람마다 다르게 전도하셨을까?

차라리 전도훈련교재처럼, 첫째, 둘째, 셋째..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말씀하셨으면

오늘 우리가 배우기도 쉬울 터인데,

4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만나는 사람마다, 똑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한 번도 없다.


-니고데모에게는..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아마 니고데모는 성경을 많이 아는 랍비(선생)니까,   요3:10

예수님은 그에게 좀 지식적으로 접근하셨던 것 같다. 


-삭게오에게는.. 삭게오야 내려와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예수님은, 삭게오와는, 좀 더 깊은 대화가 필요함을 느끼셨다.


-어떤 병자에게는..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다른 병자에게는.. 일어나 걸어라!

갑에게는 ‘질병 치료’를 먼저 주시고, 을에게는 ‘죄 용서’를 먼저 주셨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제 각기 다른 접근으로 전도하셨다.


▲그런데 오늘날의 복음전도는.. 만나는 누구에게나 천편일률적인 동일한 말을 한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창조적 비판으로 들어주시기 바란다)

그래서 모든 교회의 전도지가 .. 거의 비슷하다. 사영리 형식으로 되어 있다.


성경에 예수님은 ‘맞춤복’ 식으로 전도하셨는데 (양복점 예를 빌리면)

오늘날 우리들은 ‘기성복’ 식으로 전도하고 있다. (천편일률적이라는 뜻)


물론 고수는, 사영리 전도지를 사용하면서,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받아서 전도하고,

초보자는, 그냥 사영리 전도지 중심으로 전도할 것이다.                                         *분류번호 7500

                                                                                                                         하나님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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