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 질문하신 예수님 눅2:46~52 -출처보기-
▲도입 : 정민이라는 사람이 지은『미쳐야 미친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조선 지식인의 내면 읽기에 관한 책입니다.
앞의 ‘미친다’고 하는 말은 모든 정열과 정성을 들인다는 뜻이고,
뒤의 ‘미친다’고 하는 말은 성과가 있어야 목표에 도달한다는 뜻입니다.
정성과 사랑을 모두 들이는 열정적인 ‘미침’이 없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음을 뜻합니다.
이 책에서는 다산 정약용과 그의 제자 황상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 나타납니다.
정약용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 그것은 무엇보다 맛난 만남이다.
스승과 제자의 만남은 더욱 더 그러하다.” 라면서
그가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
15살 난 제자였던 황상과 만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 정약용은 황상에게 공부할 것을 권유합니다.
그랬더니 황상이 이렇게 고백을 하는데
“제게는 세 가지 병통(모자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머리가 나쁘고, 둘째는 앞뒤가 꽉 막혔고, 셋째는 분별력도 모자랍니다.”
이렇게 자기 모습을 이야기하면서 잔뜩 주눅이 든 소년 황상에게
정약용은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자네는 할 수 있다네.
문제는 자기가 민첩하고 총명하다고 생각하는 데에서 오히려 생겨난다네.
첫째, 외우는 데 민첩한 사람은 그 뜻을 음미할 줄 모르고 금방 잊고 말지.
둘째, 글 짓는 것이 재빠르면 그 글이 경박하고 들뜨게 되는 것이 문제라네.
셋째, 깨달음이 재빠른 사람은 곱씹지 않으므로 깊이가 없다네.
그러나 둔한데도 깊이 파고드는 사람은 구멍이 넓게 되고,
막혔다가 뚫리면 그 흐름이 성대해진다네.
답답한데도 꾸준히 연마하는 사람은 그 빛이 반짝반짝 빛나게 된다네.
이 모든 일에 첫째도 부지런함이요, 둘째도 부지런함이요, 셋째도 부지런함이 있을 뿐이라네.
자네 마음을 꽉 잡고 달아나지 않도록 꼭 붙들어 매야지. 그렇게 할 수 있겠나?”
그러면서 황상을 제자로 받아들여
훗날 훌륭한 제자로 성장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녀가 스스로 잘 크는 면도 있습니다.
▲부모가 잘 알지 못해도, 자기 길을 잘 가고 있었던 예수님
유년기의 예수님은 좋은 학생입니다. 그리고 좋은 자녀입니다.
배우기를 즐거워하는 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조금 유별나기도 합니다.
부모님이 알지 못하는 행동도 아주 과감하게 합니다.
부모님과 함께 유월절 행사를 끝내고, 모든 가족들이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가는데,
예수님만 홀로 성전에 남아서 율법 선생님들인 랍비들과 둘러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과 웃기도 하고,
말씀을 나누는 즐거움을 가졌다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예수님의 부모님들은 한참 나사렛을 향해 내려갔습니다.
아들 예수가 보이지 않았지만 ‘여러 사람들이 같이 가니까,
가족끼리 같이 가니까 어디엔가 따라오고 있겠지.’ 했는데,
하룻길을 내려갔어도 예수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예루살렘으로 다시 올라갔습니다.
이러기를 사흘 후, 예루살렘 성전에서 랍비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아들 예수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부모가 놀라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눅2:48
놀라는 부모에게 대답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신비롭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눅2:4절
▲우리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에게도 이런 사건이 있었지만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부모가 알지 못하는 세계 속에서, 그들의 삶을 키워 나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히려 부모는 자녀의 주변만 돌아다니고 있고,
자녀들은 자기의 삶에 하나하나 목표와 목적을 가지고
성장해 나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숙의 과정!
우리는 그 순간을 겪고 있는 자녀들을 다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근심도 합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찾았는지 모른다. 네가 어떻게 될지 걱정스럽다.”
그렇게 말하지만,
우리의 자녀들은, 오히려 성숙된 자기 고민의 길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듣고 질문하신 예수님 (본론)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눅2:46
특별히 오늘 나온 예수님은 아주 좋은 학생입니다. 배우는 학생입니다.
자발적인 학생입니다. 점점 성장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의 지혜도 자라났고, 그의 키도 자라났다고 말씀합니다.
성장하고 있는 그 모습을 이야기해 줍니다.
이렇게 성장하고 있는 예수님은 자기의 장(場) 안에서 뛰놀고 싶으셨습니다.
마치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성전에 들어가서
율법에 대해 말씀을 나누는 랍비들과 함께 있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랍비들의 말을 듣고 질문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질문하는 법을 가르쳐 준 유대인 어머니
1944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라비(Isidor Rabi)라는 과학자가
뉴욕의 유태인 가정에서 자라났던 어릴 시절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보통 자녀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뭐라고 질문하십니까?
대부분 이렇게 질문합니다. “얘! 오늘은 학교에서 뭘 배웠니?”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이렇게 자녀에게 질문하는데,
라비의 어머니는 늘 아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얘! 오늘은 어떤 좋은 질문을 선생님에게 했니? 그것 좀 이야기해 보지 않겠니?”
그는 노벨상을 받은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정답보다는 질문하는 것을 더 귀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바로 좋은 질문을 하는 것이 나를 과학자로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질문하는 것! 이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어린 자녀들이, 어린 학생들이 질문하고 있는 것은
지금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배우겠다고 하는 뜻입니다.
뭔가 더 큰 것을 향하여 나아가겠다고 하는 용기인 것입니다.
▲질문하게 만드는 교사가 ... 훌륭한 교사입니다. ↔정답을 가르쳐 주는 교사
우리들은 질문을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냥 뻔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는 정답만 주고 빨리 외우라고 그렇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부모들이, 우리 선생님들이 들을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답을 이미 알고 있는데 왜 그것을 가지고 고민하느냐고,
어서 외우기나 하라고 아이들에게 다시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자녀들/학생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자신의 삶과 자신의 경험으로 질문하면서
그 과정을 알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교육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대상에 대해서 질문하고, 사람에 대해서 질문하는 그것을 존귀하게 여기면서
그 질문을 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교사 자신이 먼저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네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이 네게 어떤 존재가 될 것 같니?”
그의 삶의 모든 질문 속에서
신앙을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시켜
인생을 사는 올바른 의미, 인생의 목적, 인생의 역할을 가르쳐 줄 때에
예수님이 자신에게 왜 필요한지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신앙 교육에 문제점이 무엇인가 하면,
아이들은 질문할 생각도 하지 않는데
예수님을 정답이라고 너무 빨리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질문하게 하고, 답을 알아 가는 그 과정 속에서
우리 주님이 얼마나 소중한 분인지,
우리 주님이 왜 고통을 당해야 했는지,
우리 주님이 왜 그렇게 사람들을 사랑하셨는지를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질문이란 권위를 파괴하는 것이라고만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권위를 세워 나가는 과정이기도 한 것입니다.
▲요사이 “교회 교육에 있어서 제일 어려운 점이 무엇이냐?” 하고 물어보면
많은 선생님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이들이 도무지 반응이 없어요.
배우는 일에 집중력이 떨어져서 금방 재미없어 하면서 다른 짓을 하고,
배운 것에 대해 물어 보아도 전혀 기억하지도 않고 대답하지도 않는답니다.”
그럴 때 선생님들의 마음은 아주 안타깝고 낙망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이런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아주 깊이 마음 상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요사이 아이들에게서 듣고 질문하는 능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마치 자폐증에 걸려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폐증이 무엇일까요? 자기 집착입니다. 자기도취입니다.
이 자기 집착에 들어가면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질문에 반응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자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만날 때까지 이것은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듣기도 하고 질문도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표현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눅2:46
예수님이 선생님들과 듣고 묻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고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이 들었다는 것은 관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감동도 받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질문하는 것에는 더욱 깊은 관심을 갖고 참여하고 있다는
그런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의 자녀를 키우면서,
우리들의 어린 학생들을 키우면서 우리가 겪는 어려운 점은 무엇일까요?
듣지도 않으려고 하고, 질문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이것은 우리 기성세대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오랫동안 어린 자녀들이나 학생들이 질문하는 것을
금기 사항으로 막아 버렸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초등학교 선생님들도 예외가 아니고,
중, 고등학교 선생님들도 예외가 아니고,
자유롭게 학문을 이야기하고 토론하는 대학 교수님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학생들의 질문을
많은 선생님들이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질문을 하게 되면 선생님들은 대부분 당혹해 합니다.
가능하면 그 질문을 무력화하기 위해서
때로는 그런 형편없는 질문을 하느냐고 구박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 것도 모르면서 질문이라고 해? 질문을 하려면 좀 제대로 된 질문을 해!”
라고 윽박지르기도 합니다.
여러분, 민주화되지 못한 독재 체제의 문화 속에서,
우리가 겪어 왔던 이 획일화 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질문을 봉쇄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세대간의 갈등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습니까?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까?
우리 아이들의 질문에 대해서 진진하게 마음을 열고 대답해 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질문하는 것을 멈추게 하고, 생각도 하지 않게 하고,
정답부터 가르쳐 주는 암기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사회에서만 그렇습니까?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질문을 포기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대해서 질문하면 신앙이 없는 사람일까요?
하나님에 대해서 질문하면 신앙을 다 버린 사람일까요?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이란,
내 속에 나타나고 있는 영적인 질문과
더 깊은 고뇌 속에서 더욱 단단해지고 성숙되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질문하는 예수님의 모습에 함께 참여하고 있던 선생님들은 놀라게 됩니다.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2:47
여러분, 우리의 자녀들은 질문하는 자녀들입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의 자녀들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질문에 응답하며 그 질문 때문에 놀라워하는 부모님들과 선생님들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살아 있는 소중한 가정이고, 살아 있는 소중한 학교이고,
살아 있는 소중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앙드레 지드의 글 중, 나비가 번데기에서 막 태어나는 광경을 기록한 글이 있습니다.
그는 그 광경을 보면서 변신과 부활을 느끼고,
경의와 놀람과 기쁨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를 보면서, 교수에게 감격스럽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교수가 그 말을 듣더니, 아주 마뜩찮게 대답합니다.
“뭐라고? 번데기가 나비의 애벌레임을 여태까지 몰랐나?
자네 눈에 띄는 모든 나비는 이 번데기에서 나오는 거야!
그건 아주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야!”
이렇게 대답하는 교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지드는 환멸을 느낍니다.
‘그래. 물론 나도 생물학을 잘 알고 있지.
어쩌면 그 교수보다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연스럽다고 해서 그것이 놀라운 것임을 왜 알아볼 수 없단 말인가?
저 불쌍한 사람!’
그날부터 지드는 그 교수를 싫어하게 되었고, 그의 수업이 따분하게 되었다고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질문을 경청해서 들어주는 인품이 중요합니다.
신앙교육을 잘 하려면,
교사와 부모님의 인품이 중요한 것입니다. 부모님의 신앙이 중요한 것입니다.
부모님의 열린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내 어머니, 내 아버지, 내 선생님을 존경할 때
그들이 믿는 하나님을.. 따라서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녀들은,
부모가 사랑하고 섬기는 그 하나님을 함께 더불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부모에게 환멸을 느끼는 그 순간이
부모가 사랑하는 하나님께 환멸을 느끼기 시작하는 순간인 것입니다.
이것은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을 좋아하면, 선생님이 좋아하는 예수님을 좋아하게 됩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싫어지게 되면, ‘선생님이 좋아하는 예수님은 나하고는 상관없다.’
하고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오늘은 특별히 교사 주일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자녀들이 질문하게 해야 합니다.
질문하고 기도하면서 삶의 의미와 목표를 갖게 해야 합니다.
질문하게 해야 합니다. 질문하고 기도하면서
이 세상에서 사업가가 되게 해야 합니다.
질문하게 해야 합니다. 질문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살려 예술가가 되게 해야 합니다.
질문하게 해야 합니다. 질문하고 기도하면서
공부하여 그의 목표에 이르게 해야 합니다.
선생님이, 과학자가, 자기의 직업에서 전문가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질문하고 기도하면서 섬기게 되면
이 땅 위에서 남을 위해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이들이 언제 질문하는지 아십니까?
그들은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다가설 때까지는 질문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처한 삶의 자리까지 함께 낮아지기 전에는
그들은 결코 마음의 문을 열지 않습니다. 그들은 질문하지 않습니다.
질문하지 않으므로.. 들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 (학생이 질문하게 만드는) 일을.. 우리는 다시금 시작해야 합니다.
정답을 가르쳐 주려고 하지 마십시오.
특별히 신앙교육은 정답을 암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질문은 고민/고뇌를 의미합니다.
정말 정답이 무엇인지 모를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자기와 함께 고민해 주었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학생은 마치 정답을 얻은 듯이 행복해할 것입니다. ▣ 제자 양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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