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이 오는 방식 P1 출33:7-11 -로이드 존스/출처-
▲부흥의 조짐
여러분이 어떠한 교회역사책을 읽는다 하더라도
교회가 엄청난 죄나 실패에서
곧 바로 갑자기 굉장한 부흥으로 들어가는 일은 결코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부흥의 조짐(중간 단계)이 있기 마련입니다.
저는 여기서 주로 부흥의 조짐에 대해서 말씀드릴 것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다시 소생시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뜻이라면,
그러한 조짐/중간 단계가 올 때,
우리가 그것을 바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 tent of meeting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출33:7
*아마 장막을 세우기 직전 시점인 것 같습니다. 출33장 시점이 아직 장막 완성 전
여기에 심오한 교훈이 있습니다.
회막을 세운 것이 바로, 부흥의 조짐/중간단계 이었습니다.
▲성막 이전에 회막이 있었습니다.
이 장막은 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제정해 주신 양식을 따라 만든 장막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신 식양대로 지은
장막에 대해서 많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성전의 전조였습니다.
그런데 그 식양대로 지은 장막은.. 뒤에 나옵니다.(출36:8)
여기에 나오는 것은 일종의 천막으로,
모세가 이미 만들어 놓고 회중 가운데, 이스라엘 진영 중에 세워 놓은 것입니다.
이 회막은 모세와 다른 사람들이 기도하는 곳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백성들이 함께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나아가는 곳이었습니다.
회막 - 저는 여기서 잠시 머물러 생각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 의미 있고 놀라운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부흥은.. 마음의 부담을 느낀 한 사람으로부터 일어납니다.
▲부흥은.. 한 사람/한 그룹의 마음의 부담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모세는 진 중앙에서 이 장막을 걷어내어, 진 밖의 멀리 떨어진 곳에 쳤습니다.
기독교회의 오랜 이야기 속에 나타난 성령의 부흥 역사를 읽어 볼 때,
위대한 부흥이 일어날 때, 제일 먼저 나타나는 일은
한 사람이나 어느 부류의 사람들이 갑자기 이러한 점을 느끼고,
자기 짐이 너무 무거워 그것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해야겠다고 느끼기 시작하는 것
-거기에서부터 부흥이 시작되었습니다.
위대한 역사를 읽어 보십시오. 개신교의 종교 개혁의 역사를 읽어 보십시오,
그 얼마나 놀라운 운동입니까? 그것이 어디서 왔습니까? 그 기원이 무엇입니까?
그 종교 개혁의 전조들이 무엇이었습니까?
- 성령의 역사에 의한 ‘마음의 부담’입니다.
‘이래서는 안 된다. 뭔가를 해야 한다.’
그래서 모세가 회막을 걷어서, 진 바깥으로 옮겨버린 것입니다.
▲교회사에 보면, 본문의 모세와 같은 사람이 계속 시대마다 등장했습니다.
①존 위클리프와, 존 후스 등이 있었습니다. (先종교개혁자들)
위클리프는 라틴어 말고,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영어로 성경을 번역한다는 마음의 부담이 있었습니다.
후스는 위클리프와 루터의 중간 고리 역할을 한 사람으로서, 라틴어 대신에 자국어인 체코어로 설교했습니다.
②또한 정식으로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은,
매우 평범한 수도사였던 마르틴 루터가
갑자기 이 마음의 부담/짐을 느끼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너무나 무겁게 느껴졌고,
그래서 그것에 대해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부담감을 느끼는 딱 한 사람,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놀라운 역사를 교회 안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다른 부흥의 이야기들을 통해서도 이 점은 얼마든지 예증할 수 있습니다.
③웨일즈나 미국에서도 동시에 그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모든 경우에서
그 움직임이 딱 한사람으로부터 시작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1857년 뉴욕시의 풀턴가에서 기도 모임을 시작한 그 사람은
매우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소명감을 느꼈고,
그것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했습니다.
북아일랜드의 부흥도 딱 한 사람, 제임스 맥퀼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웨일즈에서도 역시 딱 한 사람, 험프리 존즈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는 미국에서 일어나는 부흥의 능력을 보고
자기 나라에도 이러한 일이 있어야겠다는 마음의 강박감을 느끼고
대서양을 건너 웨일즈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이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나, 교회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매우 가슴 설레는 "로맨틱"한 요소입니다. (이 말은 제가 쓰기 좋아하는 표현입니다.)
즉, 하나님은 평범한 한 사람을 선택해서/감동해서.. 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유의 일은 기독교회에서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가운데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지도자들과 위대한 사람들을 쳐다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말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들어 쓰심으로써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들을 사용하심으로 "있는 것들을 폐하십니다."
어떤 사람도 그러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모세도 보면, 80세가 넘은, 세상적으로는 은퇴해야할 나이입니다.
때로는 대수롭지 않은 사람들을, 선지자들을 택하여 사용하신 것을 봅니다.
그러한 일이 기독교회의 역사 속에서 계속되었습니다.
누군들 나사렛에서 구세주가 나실 것이라고 기대했겠습니까?
속담이 이르듯이 나사렛에서 구세주가 나실 것이라고 기대했겠습니까?
속담이 이르듯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세상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구주가 나사렛에서 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점을 인식합시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사람이 바로 ‘평범하고 무능한 당신’일 수 있습니다.
무명의 교회 성원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손에 들린 통로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무엇인가 당신의 마음에 ‘강력한 부담감’을 주셨다면
기도하면서 그 일에 순종하십시오.
그 일을 착수하십시오.
(모세에게 그 일은, 회막을 걷어서 진 바깥에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회막은 기도와 중보의 장소
모세는 전에 진영 가운데 있던 장막을 옮겨 "진 밖에" 쳤습니다.
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말입니다. 여기에 주목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흥의 역사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여러 요인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모세는 ‘기도와 중보의 처소’를 세우는 행동을 취합니다.
그는 백성들이 (출32장에서 금송아지 사건을 계기로) 회개하는 것을 보고 기뻤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현실은, 금송아지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졌습니다. 구름 기둥이 없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그들과 함께 가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회개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를 다시 되찾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 처소’를 세운 것입니다.
◑부흥은 조용하게 일어납니다.
▲자,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행해졌는지 주목합시다. - 조용하고, 겸손하게
그것은 섬세하게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는 어떤 진술도 하지 않았고, 그것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며,
백성들에게 연설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무거운 짐을 느끼며,
전과 같이 진영 가운데에서는 중보 기도를 할 수 없음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진 밖으로 옮겼고,
역시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는 사람은
누구나 그 곳에 나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강조되는가를 보십시오.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출33:7
이것은 분명히 겸손한 행동이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조용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나팔을 불거나 어떤 위대한 선언도/성명서 발표도 없었습니다.
다만 그러한 행동을 취했을 따름입니다.
중보기도를 드릴 필요성을 느끼며,
어떤 비상한 행동을 취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는 그 자신이 이러한 행동을 하기 원했습니다.
그는 그러한 행동에 자기와 함께하고 싶은 그러한 느낌을 가지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런 일을 하도록 문을 열어 놓았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부흥은.. 조용하게 시작되었습니다.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이러한 모든 부흥들의 역사 속에서 그 점을 발견합니다.
제임스 맥킬킨은 다른 두 사람에게 말했고, 그들은 전체적인 상황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 사람만이 작은 학교 교실의 좁은 통로에서 함께 모였습니다.
제가 북아일랜드에 갔을 때, 그곳을 방문할 특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코너 마을이나 켈스 마을에서 모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을 밖에 있는 이 조용하고 작은 교실로 왔습니다.
그곳은 평화롭고 고요한 곳으로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 마을에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충분히 중보 기도할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또한 그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기도하라는 부르심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점에서 강조되는 바입니다.
저는 이 표현을 좋아합니다.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백성들 모두가 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느꼈던 것을 함께 느끼기 시작한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모세는 혼자 기도하기 위해서 그리로 가고 있다. 자, 우리도 함께 가자,
우리도 가서 모세와 합세합시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씩 나아갔습니다.
이것은 크게 조직회된 일도 아니었고,
어떤 대단한 선언을 하거나, 어떤 시간에 그러한 기도회를 어떠한 방식으로
열겠다고 발표한 것도 아닙니다.
부흥은 결코 그러한 식으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기독교회의 상태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조직부터 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첫 번째 움직임은 어떤 위원회를 세우고 영리하게 광고를 하며
그리고 거대하고 조직화된 방식으로 시작합니다.
성경에서 보는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그것은 오랜 기독교회 역사 속에서 발견하는 부흥의 여러 사례들과
정반대 현상입니다.
제 말을 믿으십시오. 그것은 이처럼 떠들썩하지 않은 방식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조용하게 기도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속에 어떤 소명감/부담감을 느끼기 때문이며,
스스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고,
기도하지 않고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똑같은 것을 느끼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합세하기 원하며,
함께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들이 회막을 세웁니다.
▲부흥은.. 비주류 가운데서 일어났습니다. (물론 주류에서도 일어납니다.)
그 다음 요점은, 모세가 회막을 진 밖에, 진에서 떨어진 곳에 세웠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교훈이 됩니다.
모든 부흥의 역사 속에 필연적으로 이러한 '떨어짐/구별/분리'의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진이 그 당시에는 하나님의 교회였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 있던 교회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교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무슨 일을 했습니까?
그는 말하자면 회막을 교회 가운데서 다른 데로 옮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영 밖의 떨어진 곳에 세웠습니다.
오랜 교회 역사 속에서 체험되는 어떠한 부흥도
교회 내의 어떤 공식적인 활동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극단적인 표현일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는 이것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교회가 알았던 그 어떠한 부흥도.. 공식적인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은 종교 개혁의 위대한 선구자들에 대한 기록을 읽어 보십시오.
①존 위클리프나 존 후스나 그 밖의 다른 사람들에 대서 말입니다.
언제나 그것은 비공식적인 것이었고, 공직의 사람들은 그러한 것들을 싫어했습니다.
②마르틴 루터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교황청)에는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일은 자기 방에 있던 이 수도사에게만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그 일은 계속 일어났습니다.
③영국 국교회의 개혁이 있은 후에도, 불만을 느끼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패턴을 따라 똑같은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청교도 신앙의 기원입니다.
④그리고 여러분은 아마 메소디즘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200년 전에 그것이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웨슬리 형제나 휫필드나 그 외 동역자들은 영국 국교회의 성원이었습니다.
그들은 영국 국교회에서 어떠한 일을 하려고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은 그 진 밖에 홀리클럽 holy club이란 것을 만들었습니다.
사적으로 그저 몇 명의 사람들만 모였습니다.
한동안 어느 누구도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함께 모였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생각에 함께 끌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비공식적인 것이었고 말하자면 진 밖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메소디즘의 시초였습니다.
⑤플리머스 형제단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초기 운동도 역시 그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초기 단계에서 그것은 단지 교회에 대해서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모임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우리가 주의 깊게 주목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새로운 교단을 세우란 말인가요?"
이것은 이 교훈이 암시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이것은 모임을 공식화하고, 하나의 운동으로 만들어 버리고,
조직을 구성하는 것을 뜻합니다. 저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교회 안에서 행하기 시작하실 때,
부흥을 위한 길을 마련하고 계실 때,
언제나 그러한 방식으로 역사하신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떨어져서 함께 모여서
조용하고 떠들썩하지 않게 모여서 기도합니다. 자기 마음의 부담감을 갖고서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러한 사명감의 부담을 의식하기 때문에, 기도 안 할 수 없습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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