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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나간 과녁 2090

LNCK 2009. 9. 18. 23:57

◈빗나간 과녁                         창33:1-20                   -07.01.06설교스크랩, 출처-

 


▲본문 설명

야곱과 그의 형 에서의 극적인 상봉 장면이 나옵니다. 

장자 권을 탈취했다는 이유로, 에서가 분노하여 야곱을 죽이려고 했던 상황에서

야곱이 외국에 도피해서 20년을 보내다가

이제 나름대로 재산도 모았고, 가정을 일군 뒤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중입니다.


그 옛날 에서에게 행한 일들을 기억하며

야곱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큰 두려움에 싸여서

얍복강 가에서 그 두려움에 쫒기면서

살기 위하여,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와 밤새도록 씨름한 이후입니다.


▲극적 반전

에서가 군사 4백인을 데리고 나왔다는 것은,

결코 우호적인 영접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정말 20년 만에 만나는 동생이 그리워서 영접하러 나왔다면

군사 4백인을 거느리고 나올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어제는 에서가 그렇게 살기등등했고,

그래서 야곱이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하룻밤이 지나니까,

에서도 변했고, 야곱도 변했습니다.

서로 원수처럼 되었던 형제간의 상봉이, 변하여 마치 남북이산가족 상봉 같습니다. 

서로 너무 반가워 울면서, 목을 어긋나게 해서 서로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성경은 이런 야곱의 생애를 통해서,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스스로 문제를 다 해결하십니다.


▲마하나임 .. 하나님이 군대를 앞서 보내 주셨습니다. 미리 환경을 다 변화시켜 놓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군대를 에서에게 먼저 보내심으로써

야곱을 지키시겠다고 하는 창28장 벧엘의 약속을

하나님은 지금 이루어가시고 계시는 겁니다.


창32장에 보면 이제 야곱이 그 얍복강을 건너기 전에

자기의 가족들을 먼저 앞세워서 보내고 혼자 남게 되는

그 기사가 나오기 전에 32:1~2절을 보면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하는 말이 나와요.


자. 야곱이 하나님의 군대를 만납니다.

얍복강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화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군대를 만납니다.


그럼 이 군대는 뭘까요?

갑자기 생뚱맞게 '하나님의 군대'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자(소돔성을 방문했던

천사들처럼 3차원적으로 현현한 천사들로 봐도 될 것 같습니다.)들을

야곱이 만났다는 기사를, 성경은 왜 쓰고 있는 것입니까?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머물고 온갖 일(선물 보내고, 행렬을 나누는 등)을 다 하고 있을 때,

자기 나름대로 두려움에 떨면서

화해의 제스처를 쓰기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을 때

이미 하나님의 군대가 앞서가면서, 에서의 군대를 변화시켜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400명을 끌고나오면서 야곱을 죽이려고 했던 에서의 마음이

완전히 기적적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마치 그 출애굽당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시면서

당신의 기적적인 역사를 통해 영광을 나타내신 하나님의 계획에서 보는 것처럼

이미 하나님의 군대가 야곱을 앞서가면서

창28장에서 해주셨던 약속을 친히 지키신 것입니다.


“내가 너를 지키며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그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이 지키신 거예요.


야곱은, 마하나임에서 하나님의 군대를 봤습니다. 32:1~2

그러나 하나님이 먼저 군대를 보내어, 에서의 군대를 만지신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야곱을 두렵게 만드신 이유   - 이 설교문의 본론


그럼 이러한 사건을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얍복강가의 이야기를 통틀어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야곱에게서 원하셨던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씨름의 기도'를 시키셨습니다.

우리가 얍복강가의 씨름을 보면서, 자꾸 야곱이 기도를 했다고 말하는데

야곱이 먼저기도를 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사자가 먼저 와서 씨름을 겁니다.

야곱에게 시비를 걸듯이, 하나님의 사자가 와서 씨름을 합니다.


▲하나님이 씨름의 기도를 시키시는 이유는 -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두려움을 넣어주시면서 나와 씨름을 하실 때

무엇을 목적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이 두려움을 넣어주시는 이유는

내가 빼앗길 것 같아서 두려워하는 그 어떤 것이

빼앗겨지는 것이 마땅할 만큼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뭔가 두렵잖아요? 예를 들어서 내 자식이 사고를 당할까봐 두렵다..,

그러면 지금 내가 이 자식을 잃어버려도 싸다고(합당하다고) 할 정도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된 자기 모습을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그걸 인정하라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지금 내게 두려움을 넣어주셔서 씨름을 하고 계시는 이유는

내가 내 잘못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내가 범한 죄로 인해서

내가 자식(소중한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해도

할말이 없는 사람인 것을... 마땅한 죄인인 것을 ... 하나님은 내가 인정하기를 원하십니다.


마하나임에서, 하나님이 야곱의 문제를 앞서 다 처리해 주십니다.

그런데도 얍복강 가에서 야곱은, 극심한 두려움이 자기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문제를 미리 다 처리해 주시고도, 야곱을 계속 두렵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야곱의 자아를 죽이시고, 그를 회개의 자리로 이끌어 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하라는 얘깁니다.

환도뼈를 부러뜨려서라도, 하나님은 그의 항복을 받아내십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자녀를 우상처럼 애지중지 할 때

'내가 아들을 이러저러한 방법을 통해서, 네 아들을 다시 내가 찾으려 할 때

그러면 너는 어떻게 할래?'

 

이 때 “하나님께서 그러신다고 하면, 그래도 마땅할 정도로 내가 죄인입니다.”

하고 무릎을 꿇으라는 얘기에요.


그 두려워하는 것들을 뺏길까봐 염려가 되는 것들을

내가 붙잡고 그것을 안 놓겠다고 씨름하지 말고

아들을 데려가는 일/직장을 관두는 일/애인에게 차이는 일 등이

끔찍한 일이고,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주께서 혹시 내게 그렇게 한다고 하실지라도,

내가 아무 할말이 없을 만큼

내가 전적인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얘깁니다.


야곱이 지금 두려워해요. 씨름을 하는 겁니다.

처음에는 안 뺏기려고/안 죽으려고/끝까지 살려고 발버둥치며 씨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정말 20년 동안 라반의 집에 와서 이렇게 큰 은혜를 주셨는데

에서 형을 만나려고 하니까, 다 뺏기고 내 목숨까지 잃을까봐 두렵습니다.”


그런데 환도뼈가 부러지는 것을 계기로,

야곱의 씨름에 판도가 바뀝니다. 변화가 일어납니다.

야곱의 자아의 죽음/야곱의 항복/야곱의 포기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 다 뺏긴다고 해도 할말이 없을 죄인입니다.

내가 형 손에 죽는다고 내가 할말이 있겠습니까? 불쌍히 여겨주세요. 이제 죽어도 좋습니다.

나는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다 잃는다고 해도 할말이 없습니다.”

이렇게 죄인 된 자기의 모습/자기 죽음의 모습을..

하나님은, 야곱이 발견하고, 스스로 시인하기 원하셨던 것이에요.


야곱이 처음에 살겠다고 발버둥 친 것은,

자기의 본능, 자기 방어의식, 자기 변호의식을 강화시켜서

끝까지 밀고 나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환도뼈가 부러진 것을 계기로, 그것을 결국 포기했다는 것이지요.

 

 

▲마치는 말

마하나임에서 이미 하나님의 군대가 앞서가면서

에서와 그 군대를 진정시켜놓고

자기 분노를 이끌고 4백인의 장정을 끌고 와서 죽이려고 했던

에서의 마음을 이겨버리고, 반갑게 맞이하도록 바꿔놓으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28장 벧엘의) 약속대로 다 처리해 주시는 상황에서

그래도 야곱에게 극심한 두려움이 찾아온 것은,

이런 환란을 통해서/계기로 

나의 죄 된 모습을 하나님 앞에 들춰내고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 죄과를 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그 밤에 자아가 죽었습니다.

살겠다는 자기 노력을 다 포기했습니다.

어차피 환도뼈가 부러져서, 도망도 못 갈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자기가 죽었다고 여겨질 때, 살 길이 열리더라는 것입니다.

에서를 만날 수 있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용기를 주시고,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두려움이 생길 때는

언제나 그 두려워하는 일이 일어나도 마땅할 만큼 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내가 인정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지는 겁니다.

 

그래서 두려움은, 하나님의 호출이라고 봐야 되고

하나님이 씨름을 걸어오실 때는

무조건하고 내 죄를 들춰내고, 내 죄를 인정해 버리는 겁니다.

죽어 마땅한 것을, 내가 두려워하는 것을 잃어도 마땅한 사람인 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라는 겁니다... 그래도 안 죽어요.


그리고 일이 잘못되고 두려움이 생기잖아요?

그 모든 두려움은 어떤 사람이 나를 죽일까봐

어떤 원수가 나를 해칠까봐 두려워지잖아요?

그 때 절대로 그 사람을 향해서 제스처를 쓰지 말라는 것이에요.


에서를 향하여 제스처를 쓰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는 겁니다.

이미 에서의 마음, 우리로 치면 내 원수의 마음,

우리가 두려워하게 되는 세상의 그 이유들은

하나님이 마하나임, 하나님의 군대를 보내서 다 우리를 위해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내게 두려움이 생길 때는

하나님과 씨름을 하되

내 죄를 드러내면서, 하나님께 지는/항복하는 기도의 씨름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내 죄를 자복하면서

“나는 그 두려워하는 일들이 일어나도 마땅한 죄인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내가 당해야 될 이 두려워하는 일들의 값을

다 십자가에서 치러주셨습니다. 하나님, 용서해주세요.”


두려움이 생기지요?

과녁을 잘 못 맞히면 안 됩니다.        ←이 설교문의 제목이 ‘빗나간 과녁’

에서에게 7번 굽히고, 선물 보내고... 이런 화해의 제스처는, '빗나간 과녁'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에서가 그것을 받기를, 원하지도/기뻐하지도 않았던 것들이었습니다. 

 

과녁을 올바르게 맞히는 길은,

나를 두렵게 하는 그 일은 하나님이 맡으십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이 맡으십니다... 이 사실을 믿고서, 


두려움이 생길 때는 하나님께로 가서

두려워하게 되는 그 상실, 그것이 내게는 마땅한 상실일 만큼

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회개의 기회로 삼으세요.

자아의 죽음의 기회로 삼으세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이 과녁을 바로 맞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나를 점점 더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일꾼으로 키워 가시는 것입니다.

 


.......................................... 더 읽으실 분 ..............................................

 

 

◑어쩌면 야곱의 화해의 제스처는.. 쓸데 없는 오버(빗나간 과녁) 이었습니다.

 

▲비굴할 정도로 에서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이는 야곱

무엇이 그렇게 비굴할 정도의 화해의 제스처냐 하면,

 

몸을 7번 땅에 굽히며 앞으로 나갔습니다. 창33:3

여기서 7번 땅에 굽혔다는 것은,

한번 절하고 몇 걸음 나가서 또 한번 절하고

몇 걸음 나가서 절하는 것을 7번을 반복했다는 것이고,

 

이것은 옛날에 정복자에게, 피정복자들이 갖추는 예였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항복이고, 비굴할 정도로 상대방을 높이고 자기를 낮추는 태도입니다.


②좋아요. 자기를 낮추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또 야곱이 예물까지 준비하지 않습니까?

양과 염소와 낙타와 소와 이런 것들을 다 예물로 준비해서 에서에게 줍니다.


그런데 에서는, 벌써 마음이 풀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야곱의 화해의 제스처를 보고, 예물을 받고, 마음을 돌린 것이 아니라

밤사이에 에서의 마음은 이미 화해되어있었고

야곱을 단지 반가운 마음으로 맞이하는 마음상태가 되어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화해의 제스처는, 지금 전혀 상황에 맞지 않는 것이에요.

마치 과녁에 빗나간 화살과 같습니다.


▲선물과 화해의 제스처 때문에, 에서가 마음을 돌이킨 것은 아닙니다.

에서가 마음을 돌이킨 것은,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에서의 마음을 만지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쓸데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를 태어날 때부터 에서가 먼저 태어나게 하시고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나게 하시고

또 영적인 의미에서 야곱을 장자의 자리로 앉히시려고 섭리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에서와 야곱의 상봉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점을 생각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신다는 이 만남의 현장을,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셨다는 점을 이해하지 않으면

오늘 야곱의 행동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행동은 지금 뭔가 어긋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것에 비교해서 같이 맞대어서 생각하면

잘 맞아떨어지지 않습니다.


이미 에서는 화해가 되어있었는데도,

야곱은 그 화해를 위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자기를 낮추고 예물을 준비했습니다.


에서가 선물을 안 받겠다고 합니다.

물질적인 재산으로 말하자면, 나는 충분하니까 너나 써라... 합니다.

400명의 장정을 통솔할 수 있을 정도라면

에서의 재력도 상당하리라고 봅니다. (이삭의 모든 재산은 에서가 물려받았나요?)


어쨌거나 에서는 야곱의 선물이 불필요합니다.

받고 싶은 마음도 없고, 받아야 될 이유도 마음으로 느끼지를 못하고 있다는

이 점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에요. 창33:9~11                                                    ▣ 죄, 복된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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