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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7

새와 백합화 2097

LNCK 2009. 9. 23. 23:01

◈새와 백합화                         마6:25~34                     -09.10.18.설교스크랩/출처-

 


◑걱정, 염려 안 하고 살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확장시키면, 이 세상 사는 일 자체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자녀 일, 남편일, 직장 일 등 내일 일 자체를 아예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런 말씀을 해 주시면서 백합화, 공중에 나는 새 이야기를 해 주셨어요.

이 말씀을 그냥 예수님의 끊임없는 잔소리쯤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아니면 종교적으로 뻔한 소리 하는 말로 넘기지도 마세요.


그런데 우리가 염려 하고 싶어서 합니까?

당연히 내일 일을 염려하고 싶지 않습니다.

만약 염려 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뭘 더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염려가 되는 걸 어떻게 합니까!


내가 염려를 한다기 보다는.. 염려가 나를 하는 것 같아요.

내가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이 나를 먹는 것처럼,

내가 염려를 한다기 보다는.. 염려가 나를 공격하고,

염려가 나를 사로잡았다는 말이 가능할 정도로.. 우리는 염려에 사로잡혀있습니다.


▲생활의 염려는 현실적 문제

목사인 저도 밴쿠버에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솔직히 염려가 되더라고요.

우리 선교회가 위치한 이 서초동 골목이 ‘먹자 골목’인데,                                         *식당가

그런데 ‘제가 앞으로 뭘 먹고 살아야 할지...’ 걱정이 되더라고요.

‘아내와 자식은 뭘로 내가 먹여 살리나?’ .. 하는 걱정이 들더라고요.


그래도 제가 주의 종(목사) 아닙니까!

그러면 주인 되신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 주실 거야..’ 하며 견뎠지만,

이런 염려 문제가 사실 잠깐(5초)이라도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현실은 계속해서 ‘죽겠네, 정말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 하는데,

성경말씀은 ‘염려하지 말라’ 하니까, 마치 선거철에 난무하는 헛공약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그게 당연히 아니죠!


▲내 눈으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눈으로 보는 것에 따라서.. 걱정이 생기기도 하고, 안심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예가 적절할지 모르지만,

롤러코스트(청룡열차)를 탈 때,

무서움을 느끼는 여자들은.. 아예 자기 양 눈을 딱 감아버립니다.

왜냐하면 무서움이 눈을 통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포영화 볼 때도, 눈을 감아버리면.. 하나도 안 무섭습니다.


바꾸어 말해서 <안심>이란.. 신뢰가 가는 무엇인가를 내 눈으로 봐야 됩니다.

(또는 신뢰가 가는 분의 음성을.. 내 귀로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안심 됩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눈으로 보는 것(세상) 때문에.. 염려하고

눈으로 보는 것(하나님) 때문에.. 염려 없이 안심하고 살게 되는데요....

 


◑1. 세상만을 바라보면... 염려투성이가 됩니다.


‘세상을 고통의 바다’라는 말이 있는데, 모두가 동의합니다.

세상에 약간의 기쁨이 있어도, 얼마 시간이 지나면 세상은 곧 슬픔투성이가 됩니다.


자식을 바라보면.. 자식 염려

사업을 바라보면.. 사업 걱정

건강을 바라보면.. 건강 근심

장래를 바라보면,, 장래 불안

 

가만히 세상을 보십시오.

두 눈 가진 사람이, 세상을 안 쳐다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쳐다보면 볼수록.. 안심보다는, 근심이 더합니다.


위에서 <안심>이란.. 신뢰가 가는 무엇인가를 내 눈으로 봐야 된다고 했는데,

그렇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반석이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만, 비로소 안심할 수 있는데요,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다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이 바라보신 것


▲예수님은 매사에 하나님을 연관지어 바라보셨습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 직전에  마6:34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들에 백합화를 생각해 보라고 하십니다. 마6:26, 28


예수님은, 공중에 나는 새를 보시며.. 저들을 먹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들에 백합화를 보실 때.. 저들을 다 입히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염려하지 않으셨고,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들의 백합화를 봅니다.

성철 스님은 ‘백합화를 백합화로 보라’고 합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우리들은 ‘저거 꺾어다가 우리 집에 꽂아두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며 봅니다.

결혼식을 앞둔 자매는 ‘저 꽃으로 결혼 부케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쳐다 볼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백합화를 보는데, 그 속에서 '입히시는 하나님'을 보십니다.


예를 들어, 공중에 나는 새를 봅니다.

성철 스님은 ‘새를 새로 보라’고 합니다.                            (맨 아래 설명 참조) 

우리는 ‘저 참새를 구이 해먹으면 좋겠다/ 저거 잡아서 팔면 얼마 받을까?’ 라고

각자의 필요 및 사업적 시각으로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참새 한 마리 속에서 '먹이시는 하나님'을 보십니다. 


문제는.. 백합화를 보든지, 공중의 새를 보든지, 다른 어떤 것을 보든지,

우리가 세상적 관점으로 보면.. 염려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요,

우리가 하나님 관점으로 보면.. 염려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아니,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신다는데... 뭐가 염려스럽겠습니까?

우리가 매일/매시간 쳐다보고 있는 것이 하나님이 아닐 경우에는,

이 세상 천지에 염려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지금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주님의 방식은 모든 사물 속에서.. 하나님을 봐 내시더란 말입니다.

이렇게 매사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만이, 염려를 근본적으로 끝낼 수가 있어요!


▲풍랑이 삼킬 듯이 넘실거리는 배위에서

주님은 그 풍랑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십니다.

풍랑 만난 배 위에서, 하나님이 요람을 흔드시는 줄로 아셨나봐요.


예수님이 너무 고단하게 사역을 하시니까,

하나님이 더 쉬라고 요람(배)을 흔드시고, 예수님은 흔들흔들 리듬에 맞춰 잠을 주무시는 것이죠.

우리도 그렇게 살 수 는 없을까요?

 

그런데 그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한 제자들은

'지금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며 야단법썩을 떨었습니다.


◑3. 사도 베드로가 바라본 것


베드로가 전도하다가 헤롯대왕에 붙잡혀서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야고보 사도를 뒤이어 참수형을 당하게 됩니다.

그렇게 다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내일이면 참수형을 당하는 사람이.. 깊이 잠이 듭니다.

그 때 천사가 와서 깨우는데, 워낙 안 일어나니까, 옆구리를 그냥 발로 찼다 잖아요?

천하태평 너무 깊이 잠자고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베드로는 봤어요. 자기가 지금 감옥에 들어와 있지만,

자기의 현실 속에서 들어와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봤어요.

자기를 이제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손이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안심이 되지요. 감옥에서 잠을 쿨쿨 잡니다.


사람이 뭘 확실하게 봐야.. 믿는 구석이 행기죠.

그 하나님의 임재와 그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있으니까

베드로는, 다음날 죽을 사람이지만, 천하태평 깊은 잠을 잤던 것입니다.


◑4. 사도 바울이 바라본 것


바울도 똑 같았어요.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자기가 갇힌 것이 복음의 진보를 이룬다고 했어요.


공중에 나는 새를 기르시는 하나님의 손길처럼,

자기가 감옥에 갇힌 현실을 움직여 나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니까,

자기 삶과 자기 장래에 대한 모든 걱정이 싹 사라진 거예요.

그래서 정말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5. 적용


우리가 이 세상을 보면서 염려를 안 할 수는 없어요.

왜냐면 보는 대로, 보는 것에서부터 기운을 받거든요.


그래서 제가 설교할 때, 누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면, 그 기운을 받습니다.

설교시간에 막 힘이 납니다.

반대로 누가 인상 찌푸리고 앉아 있으면, 힘이 쭉 빠지지요.

사람은 '자기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기운을 받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1.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바라봅니다.

이상한 것은 내가 백합화를 하나 봐도,

내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모습을 잊지 않는 마음에서 바라보면,

즉 ‘주님, 내가 십자가에서 주님 죽으실 때 같이 죽은 잡니다.’ 라는 생각으로 백합화를 보면..

백합화속에 숨어있는 하나님을 보면서,, 안심됩니다.


자식을 보면서

‘주님의 십자가에서 내가 죽었습니다’ 라는 생각으로 자식을 쳐다보면,

그 전까지는 걱정덩어리인 자식의 삶이..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되면서.. 안심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제가 달리 설득할 방법이 없어요. 이건 여러분이 직접 해 보셔야 알아요.

안경 쓰듯이, 내가 죽었다는 생각을 쓰고서, 계속 세상을 바라보는 겁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주님의 사랑의 기운이 전달됩니다. 내게 느껴집니다.

그 기운이 내게 닿자마자, 내 마음이 염려가 없어져 버립니다.

그제야 염려가 없어지는 것이지...

내가 뭐 돈을 많이 가졌다고, 갖가지 염려를 다 없앨 수는 없다고요.


예수 믿기가 얼마나 쉬워요?

주님의 십자가를 늘 먼저 바라보면서, 그것을 통해, 사물을 바라보고,

만나는 사람을 보고, 주어진 현실을 보자고요.


▲여러분, 혹시 지금 교도소에 갇힌 사람도,

거기서라도 십자가를 깊이 바라보면,

자기가 놓여 있는 현실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봅니다.

자기를 움직여 가시는, 그래서 교도소까지 오게 하신, 하나님의 오묘하신 손길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자기 삶에 대한 염려가 다 도망가 버립니다.

그리고 장래에 소망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따뜻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마음에, 다른 볼 것들을 잔뜩 가지고 있어요.

자식, 돈, 건강, 사업, 직장, 장래, 주식 등등을 자기 시각으로 다 보고 계세요.

그러니까 염려가 떠나지 않습니다. 매일 매 시각이 ‘염려 투성이’로 삽니다.


여러분, 오늘 기도하실 때

자녀, 남편, 재물, 내 건강, 내 장래에 대한 관심

십자가 위에서 다 태우고, 십자가 보면서 다 죽입시다.


그리고 하나님을 통해서

또는 십자가를 통과해서

자녀, 남편, 재물, 내 건강, 내 장래를 바라봅시다.


그것이 바로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입니다.


▲2. 하나님을 신경 쓰고 삽시다.

직장에서 은퇴한 남편과 지내보니, 6개월도 안 되서, 부인의 고충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늘 남편이 나가서 일하다가, 이제 은퇴해서 집에 24시간 자기와 같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얼마나 신경이 쓰이고, 불편한지 이루 말 할 수가 없더랍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신경쓰고 살아라는 말입니다. :33

그러면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게 됩니다. :34

두 구절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서로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신경을 끊고 삽니다.

그래서 자기 일상생활에, 하나님이 전혀 신경이 안 쓰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지 않으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에 대해 신경을 쓰고 사십니까? 

    위에서 말한 부인은, 6개월 지나니까 아주 힘들다고 했습니다. 

   

    자식을 볼 때, 하나님과 연관지어 쳐다본다면,

    ‘하나님, 제가 자식에게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좋아할까요.’ 하면서 늘 신경이 쓰여야 합니다.

    그것이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의를 구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목사님이 심방을 오셨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때 남편이 ‘여보 물 떠줘’ 그러면,

    ‘여보, 가만히 있어. 목사님 오셨잖아요!’ 그러지 않겠어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대하는 태도가..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사에 하나님을 먼저 신경 쓰며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33

    그러면 신기하게도 내일 일에 대한 염려가 없어집니다.  :34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주님은 삼라만상을 통해 보이시고 계시는데,

      우리 마음의 눈은, 이 세상 것을 보느라고 마음을 다 빼앗기고 있습니다.

      세상 것을 보며 염려와 걱정을 다 혼자 짊어지고,

      거룩한 순교의 길이나 가는 것처럼 생각해서 혼자 비극의 주인공이 되면서

      우울증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주님 십자가 바라보며, 십자가를 통해서 만물을 바라보고,

      만인을 대할 수 있게 하여주시고,

      만사를 대할 수 있게 하여 주시고,


      그 속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염려가 사라지고 평강을 누리며

      그 좋은 하나님께 신경 써 드려서 하나님 좋아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늘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하늘 백성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이다. 


 

.................................. 더 읽으실 분 ..................................



◑보는 눈에 따라.. 세상은 완전히 달라 보입니다.


▲사람에 따라 보는 관점이 다릅니다. 우리는 신앙적인 눈으로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먼저 예술가들이 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자기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서 봅니다.

사람을 바라보고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을 때도

정수리 꼭대기에서 보기도 하고, 반대로 발바닥 쪽에서 보기도 하고,

예술가들이 보는 관점은.., 일반 사람들이 보는 ‘정면’과는

보는 각도와 관점이 전혀 다릅니다.


또한 목회자가 차를 타고 가다보면, 근처에 어떤 식당 집이 있습니다.

그런데 망해서 한참 동안을 비어있는 집입니다.

그러면 그 빈 집을 보면서..

‘여기다 교회를 임대할까? 주차장이 넓어서 좋겠다.’ 이런 눈으로 봅니다.


산을 봐도 ‘여기는 기도원 하기가 좋은 자리네!’ 라고 보입니다.

목회자가 강물을 보면 ‘침례식이라도 할 수 있으려나?’ 하게 되죠.


여러분은 여러분 나름대로의 필요와 관심에 따라 보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아파트에 들어오는 전단지를 봐도,

배고픈 사람은, 음식점 광고만 보이고,

자식 기르는 사람은, 학원 광고만 보입니다.


이런 식으로 보는 한,

염려는 끊이지 않고 우리들에게 찾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불교에서 보는 눈이 있습니다.

성철스님이 하신 말,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

산을 봐도, 목사처럼 기도원하기 좋겠다고 보지 말라는 겁니다.

산이 그냥 산인데, 왜 내 용도와 필요에 따라 결정을 하느냐.. 이 말입니다.


물을 봐도, 어떤 자기에게 필요한 용도를 생각하지 말고,

물을 그 자체로 보라는 말입니다. 참 좋은 얘기죠.


그러니까 우리가 사람 얼굴을 볼 때도

눈이 크니까 좋다/안 좋다 하지 말고, 그냥 모습 그대로 보라는 얘기죠.

키 큰 사람은 큰 대로, 작은 사람은 작은 대로,

그냥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인데,

사람을 아무 기준/관점 없이 보면, 다 예뻐요. 다 괜찮습니다.

늙어서 주름살이 많아도,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면.. 다 존귀하게 보입니다.


(이게 말은 쉬운데, 실천이 어렵죠.

속사람이 새롭게 변화되지 않고는, 이론은 알아도 실천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기의 필요에 따라 사람을 구별해서 봅니다.

목사가 교인을 볼 때는

‘이 사람 충성하고 봉사 할 사람/ 안 할 사람,

헌금 많이 낼 사람/ 아닌 사람’

만나는 모든 사람을, 이런 눈으로 보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일각에서, 목회자 만나기를 꺼려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목회자는 자기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자기를 도와줄 사람/아닌 사람으로 나누어서 보는 시각이.. 부담스럽다는 겁니다.

‘또 이번에는 내게 뭘 부탁하려고 하는 걸까?’


사업하는 사람도 마찬가집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을

‘내 고객인가/아닌가?’를 계산하면서 봅니다.


그런데 그런 눈과 그런 마음을 가지고서는

예수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 삶의 통찰력         


우리는 주님처럼, 세상을 바라볼 때, 하나님과 연관지어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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