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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은 복음의 진보를 초래합니다 2103

LNCK 2009. 9. 27. 09:34

◈고난은 복음의 진보를 초래합니다         행28:16~22            09.08.23.설교스크랩



▲쉬지 않고 기도하지만, 고난이 떠나지 않았던 사도바울

우리가 기도했는데도 상황이 호전되지는 않고

점점 더 악화되는 경험을 하신 일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기도한다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바울 사도의 선교 여행은 기도로 시작된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행13:3에 보면 안디옥 교회는 금식하고 기도하며

바나바와 바울 두 사람을 선교사로 선교 여행을 떠나보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선교 여정 내내 줄곧 기도로 사역을 감당해 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면처럼, 쉬지 않고 기도하며 선교의 과제를 수행해 온 것입니다.


빌립보의 감옥에 갇힌 깊은 밤에도 행16:25에 보면

“한 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라고 기록합니다.

행20:36에 보면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과 작별하며

바울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작별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쉬지 않는 기도에도 불구하고

고난은 면제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며 걷는 선교의 길-그 길에도 고난은 더 심해 가기만 합니다.


제3차 선교 여행 마무리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바울은 체포되어

가이사랴 감옥에서 억울한 옥살이 2년을 하게 되고,

마침내 가이사에게 항소함으로 로마 항해 길에 올랐지만 풍랑을 만나

배는 손실되었고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채로 멜리데 섬에 당도하게 됩니다.


이 섬에서 바울 일행은 이 섬의 원주민들의 아주 특별한 호의를 입어

휴식하고 요양하며 회복의 시간을 갖습니다.

비록 바울이 여기서도 뱀에 물리는 사고가 있었지만 치유되는 모습을 보고

오히려 섬 사람들은 바울에게 치유 기도를 부탁하게 됩니다.


행28:7-10에 보면 보블리오라는 섬의 높은 사람(로마 총독?)의 부친을

치유기도를 해주어 낫게 하자, 섬의 많은 사람들을 위한 치유 사역을 감당하게 됩니다.


멜리데 섬은 이태리 시실리 남쪽 95km에 위치한 작은 섬(말타)입니다.

교회 전승에 의하면 총독 보블리오는 바울에게 전도를 받고

후일 그 섬의 목회자가 되어 목회를 하다가, 박해가 왔을 때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지금도 이 섬 사람들은 그들이 파선하여 도착한 바울 일행을 잘 대접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고, 그 결과 이 섬은 100% 복음화되고

경제적으로도 아주 부유한 섬(관광수입으로)이 됩니다.

나그네 대접을 잘 한 것이 섬 전체가 복을 받게 된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지금 이 섬에는 바울이 독사에게 물린 곳,

그리고 보블리오의 별장이 있었던 곳에 바울 기념 교회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 섬의 수도 발레타에는 로마의 베드로 성당 못지않은

아름답고 거대한 성당이 세워져 있습니다.


자, 이제 바울 일행은 이 섬사람들의 특별한 환대를 받으며

다시 섬을 떠나 최종 목적지 로마로 출항하게 됩니다. 행28:10을 함께 읽겠습니다.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실었더라.


그리고 이제 28:16절입니다.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드디어 바울은 꿈의 도시 로마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고난을 겪은 후였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바울의 로마 입성이 보여주는 고난의 레슨은 무엇일까요?


◑1. 고난은 때로는 기도의 응답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제 드디어 바울은 로마에 입성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그것이 바울의 기도의 응답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를 향하여 보내는 그의 서신 롬1:9-10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 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당시 세계의 수도인 로마의 복음화 없이 세계의 복음화는 없다고 판단한

바울의 기도 제목 제1 우선순위는 “로마로 가게 하옵소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은 쉽게 열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로마서15:22을 읽어 보십시오.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그 길이 쉽게 열리지 않고 오히려 막힌 길로 인한

그의 안타까운 마음을 읽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 사건의 상황이 바울을 로마로 인도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에서의 체포와 가이사랴 재판의 상황,

그리고 가이사에게 항소한 사건의 진전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 행을 기도하면서 아마도 로마 성도들과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

로마로 입성하는 선교사 바울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아주 뜻 밖에 그는 죄수의 몸이 되어 재판받기 위해

로마에 입성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하튼 그것은 기도의 응답이 아니었겠습니까?


바울 자신이 상상한 방법대로의 기도의 응답은 아니었지만

분명한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고난의 길을 가게 하시면서 그는 기도를 응답하셨을까요?


만일 고난의 장애물 없이 순적하게만 그 길을 갔다면

그는 자신의 전략이나 계획의 지혜로움을 자만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속되는 고난으로 인하여 그는 기도하며 이 길을 갈 수밖에 없었고

낱낱의 장애물을 극복할 때마다 그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실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우리의 기도의 응답의 과정 속에

이미 고난은 포함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응답하실까요? 물론입니다.

그러나 그 응답의 과정 속에는, 많은 경우 고난의 여정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계획의 시작을 위해 기도할 때 그 시작의 시간만이 아니라,

그 계획이 진행되는 과정에도 우리는 기도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고 시작한 일인데도 고난이 왔다면 실망하지 마십시다.

오히려 그때 기억하실 일은,

그 고난이 바로 기도의 응답의 과정임을 알고...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2. 고난은 때로 섭리의 실현이라는 사실입니다.


고난은 기도의 응답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시는 방식임을 주목하십시다.


왜 도대체 하나님은 바울을 죄수의 몸으로 사슬에 묶인 몸으로

로마로 오게 하신단 말입니까?

그 놀라우신 섭리의 신비한 한 측면을 이제 묵상해 보십시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온다는 소문이 퍼졌을 때

이를 제일 기뻐 한 사람들은 소위 유대의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을 각처에서 개종시켜 유대교를 위축시키고 이상한 종교를 퍼트리는

이 사람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고,

이 때야 말로 그를 제거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때문이었습니다.


행23:12-13을 읽어 보십시다.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여명이었더라.


이런 40여명 이상의 자객들이 바울의 목숨을 노리는 상황에서

바울 사도가 한가롭게 몇 사람과 함께 로마 길을 가고 있다고 가정해 보십니다.

바울이 무사하게 로마까지 도착할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지금 로마의 가이사 황제의 재판을 받기 위한

특별 VIP 죄수의 몸으로 그는 잘 훈련된 로마의 특별 경호대의 호송을 받고

목숨의 안전을 보장받으며 로마로 오지 않았습니까? 할렐루야?


거기다가 바울과 그의 선교 팀 일행이 무슨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겠습니까?

로마까지 오는 배 삯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죄수로 가니까 무슨 비용이 얼마나 들었겠습니까? 거의 공짜로 왔을 것입니다.


얼마나 신묘막측한 놀라우신 그분의 섭리인지요?

그래서 그 분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이사야 55:8-9의 말씀입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그러므로 인생이 내 뜻대로 내 계획대로 내 생각대로 안 된다고 좌절하지 마십시오.

기도하고 사는데도 왜 고난이 더 해지느냐고 불평하지도 마십시오.

기도하고 시작한 일인데 고난의 장애물이 있거든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바로 그 고난의 장애물이 하나님의 기이하신 섭리의 방편이 될 것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기뻐하십시오. 고난의 장애물을 오히려 감사하십시오.


◑3. 고난은 복음의 진보를 초래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제 로마로 와서 재판을 기다리게 됩니다.

아마도 처음 로마에 입성해서는 재판을 받는 동안, 그리고 형이 확정되기 까지

일종의 가택연금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행28:16절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그렇다고 너무 편안한 상황을 연상하지는 마십시오.

존 스토트는 그의 <사도행전 주석>을 통해,

이때 바울은 그의 오른쪽 손목이 로마 군인에게 사슬로 묶인 채

24시간 교대로 감시당하는 상태였다고 증거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면회는 상당히 자유롭게 허용된 상태였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먼저 바울은 유대인 지도자들을 청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19-20절을 읽겠습니다.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함이 아니니라.

    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메시야)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바 되었노라.


그의 로마 전도는 유대인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바울의 로마 도착 소문이 알려지며 여러 로마 고관들이 바울을 면회하게 됩니다.

바울은 가만히 앉아서 그를 찾아오는 로마인들에게

복음 전도의 기회를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것도 죄수로 그가 로마에 오지 않았더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신묘한 섭리를 실감하게 하는 대목이 아닙니까?


이제 후일 이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를 행해 쓴 빌립보서1:12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그 다음 13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시위대(바울을 감시하고 지키는

책임을 가진 가이사의 친위 부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무슨 말입니까? 내가 로마 감옥에 있음으로 여러 시위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전도 받은 사람중에는 로마의 고위 관료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빌4:22을 읽어 보십시오.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중 몇이니라”


이미 가이사의 황실의 사람들이 바울이 전한 예수를 믿고

빌립보 교회를 향한 문안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자신의 고난 중에서도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고

편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옥이 빼앗아 가지 못한 이런 기쁨,

바울의 손과 발을 결박한 쇠사슬이 결박하지 못한 바울의 놀라운 기쁨이 갈망되지 않으시나요?


그러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오늘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고난 속에서도 굳게 믿으십시오.

이 고난 중에도 뜻이 있음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 한 것처럼 한 밤중에 일어나 찬양해 보십시오.

감옥이 진동할 것입니다.

복음의 승리가 선포되고 환경을 초월한 하늘의 기쁨이 임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의 비밀을 묻는 사람들에게

예수가 내 인생의 구주요 주님되신 때문이라고 증거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 마침내 주께서 예비하신 꿈의 도시

영원한 로마에 입성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09.08.23.)은 고 김 대중 대통령의 국장國葬일입니다.

김 대통령 생전에 한 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부인 이희호 여사에게 서운하게 느끼신 적이 있느냐?”고.


김 대통령은 주저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 제가 사형언도를 받았을 때 집 사람이 제가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는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되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였습니다”고.


그 이야기를 이희호 여사에게 전달했더니

이 여사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

하나님은 또한 저의 깊은 마음을 헤아려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고.


얼마나 귀한 고백입니까?

우리도 한 평생 주의 뜻을 구하며 고난을 기도로 승리하는 성도가 되십시다.

그러면 마침내 우리의 기도가 고통의 쇠사슬을 풀 것입니다.

그리고 새 아침을 열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마침내 우리로 하여금 하늘의 보좌에 승리자로 도달하게 할 것입니다.할렐루야! 

 

     (주) 이런 단순비교가 무리가 있지만,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서 김대중, 김영삼 두 지도자께서, 비슷한 시기에 비슷하게 활동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분은 세계적인 지도자로 인정 받고, 한 분은 국내적인 지도자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저(편집자)는 그것이 정치력/지도력의 차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한 분은, 대한해협에서 바다에 빠뜨려 죽을 뻔한 고난을 당하고,

     또 군사정권이 자기들 잣대로 내란음모죄를 씌워서 사형언도를 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분은, 그런 고난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즉 <고난>의 차이인 것입니다.

                                                                                                                ▣ 고난의 신학, 영광의 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