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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8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 2110

LNCK 2009. 10. 1. 13:48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  in hope against all hope       롬4:18           08.02.04.설교 일부 녹취



▲1. 불가능한 상황에서.. 믿음이 드러난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살 때,

나의 능력과 나의 경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큰 문제에 부닥칠 때가 있다.


이때 우리는 당연히 절망하게 된다.

(그것이 질병이든지, 사업상의 문제이든지, 혹은 다른 문제이든지)

왜냐하면 내 능력과, 내 경험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때 우리의 믿음이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여러분, 믿음이란,

자기 능력과 경험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때..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자기 능력/경험/지식/연줄을 총동원해도, 그 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때,

그래도 절망, 좌절하지 않고 주님을 신뢰하고, 바라보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아브라함이 절망 중에 믿음을 가졌다.


롬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in hope against all hope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위 성경구절의 헬라어는, 영어와 동일하다. in hope against all hope이다.

‘도저히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지금 자기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절망 중에 있다.

자기 죽을 때가 가까워오는데, 자기 후손이 없는 것이었다.

(고대 사회 문화에서는, 이것이 매우 중대한 문제였다.

여러분, 왕들이 얼마나 후손문제로 고민하는지.. 영화 같은데 보면 잘 나온다.)


이 때 아브라함이 믿음을 가졌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는 할 수 있다.

나는 1백세나 되었고, 내 아내를 바라봐도 전혀 소망이 없지만,

도저히 자식을 바랄 수 없는 환경이지만, 그래도 나는 주님을 바란다!

즉 in hope against all hope를 가졌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절망 중에, 주님이 주신 약속을 믿었다.


롬4: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하나님은 ‘성경’이란 약속을 주셨으며,

또한 레마의 말씀으로 우리 각자에게 약속을 주신다.

어떤 약속은 10년, 20년 지나도... 더디게 안 이루어지는 것들도 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고 믿었다.

‘이제는 끝장이야, 불가능해, 너무 늦었어!’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다... 이렇게 약속을 믿는 게 믿음이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가 <믿음을 갖는다. 믿음이 있다>는 뜻은

불가능한 현실 속에서.. 약속대로 이루어질 줄을 믿는 것이다.

또한 뭔가 내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약속 아니었음)

그래도 하나님의 섭리/선하심을 여전히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아이가 대학에 떨어져 삼수를 해도,

남편의 사업이 손 대는 족족 실패해도,

내 몸이 병들어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더욱 악화되어 가더라도,

집안에 돈이 점점 떨어져서 이제는 굴러다니는 동전을 모으는 처지에 이르더라도

절대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절대로 주님의 돌보심을 의심하지 않고, 여전히 신뢰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바꾸어 말해서,

아이가 대학에 척척 붙고,

남편이 사업을 잘 해서 돈을 잘 벌고,

내 몸이 건강하고, 내 환경이 순풍에 돛 단 듯 거침 없이 미끄러져 갈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믿음이 잘 안 생긴다. 믿음이 잘 안 드러난다.

주님을 간절히 의지하고, 주님을 절대로 신뢰할 필요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나의 불가능한 현실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이 나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것이다.

내 믿음을 단련해 주시고, 내 믿음을 강화시켜 주시는.. 좋은 기회이다.

그런 하나님의 이면적 섭리를 보는 눈을.. 내가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사랑하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척척 낳게 해 주실 수도 있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아들도 척척 낳는데, 어째서인지 아브라함 그게 어려웠다.)

그러나 그러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시는 것은,

그에게 믿음을 테스트/연단/강화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이다.


▲믿음은, 이런 사면초가/불가능한 상황에서 쑥쑥 자란다.

반대로, 환경에 뭔가 조금 될만한 기미가 보이고,

내 자신을 바라봐도, 내 힘으로 뭔가 할 수 있을 것만 같을 때,

그 때는 ‘믿음’이 안 생긴다. ‘신념’은 생길지 모르겠지만..


여러분,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 즉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개념을

오늘 우리가 확실히 정립하기 원한다.


뭔가 바랄 수 있는 중에 바라는 것..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아무 것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2. 죄 사함/구원에 관련해서 볼 때.., 믿음이란?


‘나는 그래도 평균이상으로 선한 사람이지.. 우리 가문이 옛적부터 그랬지..’

- 여러분, 이런 분은 대단히 위험하다. 참된 믿음이 아닐 수 있다.

자기가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자기가 생성한 믿음’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자기의 (구원 받을) 가능성’이지, 참된 믿음이 아니다.


‘나는 정말 큰 죄인이야, 나는 도저히 가능성, 가망이 없는 죄인이야,

우리 가문도 마찬가지야!’ - 여기서 참된 믿음이 나온다는 것이다.

완전히 절망/불가능/도저히 바랄 수 없는 중에...

‘그래도 주님은 나를 구원하실 수 있을 거야!’ 라고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절망 중에 믿는 믿음이.. '참 믿음'이라는 것이다.

     절망 없이 믿는 믿음은.. '자기(힘/능력)의 가능성'인데.., '참 믿음'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비추어 볼 때,

자기 힘/의지/능력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아무 가능성도 없이 절망에 처했을 때,

그 절망의 상황 가운데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신뢰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이런 절망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말로는 주님을 믿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자기 의, 자기 선함, 자기 가능성’으로 살아간다.

결과는, 마지막 심판의 때에.. 아마 통과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러분, 주님은 심판대에서 우리의 ‘믿음’을 보신다. 다른 것 안 보신다.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있었던 그 누더기 같은 ‘자기 의’는.. 그 때 아무 소용없다.


▲과거에 부흥회 할 때, 부흥사와 회중이 이런 대화를 하는 것을 들었다.

‘여러분, 구원을 믿음으로 받습니까, 행위로 받습니까?’

‘믿음으로 받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면 믿음에 선한행위까지 덧붙이면 어떨까요?’

‘그거야 금상첨화죠!’


여러분, 그게 아니다.

우리의 선한 행실은.. 그것이 아무리 선하다 할지라도.. 누더기 같은 것이다.

외적으로 선하게 보이더라도, 내적으로 부패했고 본질이 타락했다.


우리는, 나같이 선하고 괜찮은 사람이, 믿음을 가져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나같이 절대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 절망 중에서 주님의 의를 힘입어서

구원 받는 것이다.



▲3. 사업이나 사역에 관련해서 볼 때.., 믿음으로 행하는 일이란?

여러분, 우리가 내 생각에 ... ‘내가 하면 어느 정도 될 것 같은’ 일들이 있다.

내 능력, 내 경험, 내 수완으로 ... ‘내가 한 번 해 보면 될 것 같다.’

그런 일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하는 일은 아니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행하는 일’이란,

내 능력, 내 경험, 내 수완으로... 내가 시도해 봐도 도저히 안 될 것 같은 일에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런데 신기하게도 바로 그 때, 주님이 내 마음속에 믿음을 주신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은 다 절망적이라는데, 자기 혼자 희망을 가지는 것이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이다.


목회나 사역도

어느 수준까지, 어느 기간까지는.. 대부분 ‘자기 가능성’으로 한다.

그런데 어느 수준, 어느 기간이 지나면.. 다 벽에 부딪힌다. 한계점에 이른다.


바로 이 때가 중요하다.

이제 ‘믿음’이 발동될 때이다. 주님이 ‘믿음’을 주시는 때이다.


도저히 자기 힘/자기 능력으로 안 되서, 한계점에 이르렀는데,

이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랬더니 주님을 의지해서, 그 불가능한 상황을 딛고 일어나는 것이다.

이 때부터 비로소 ‘믿음의 사역, 믿음의 목회’가 시작된다.


(그러니까 빨리 빨리 벽에 부딪히고, 빨리 빨리 좌절하고 실패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거기서 주저앉지 않고, 믿음으로

어렵지만 딛고 꿋꿋이 일어서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믿음이 없는 사람, 주님이 믿음을 주시지 않는 사람은

주저 앉아 버리고 만다. 못 일어선다.


그러니까 사역/목회를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자기 가능성, 자기 능력, 자기 잔머리로 하는 사람, 처음에 어느 선까지는 된다.

-한계선에 이르러, 안 된다고 좌절하고 포기하고 주저 앉아버리는 사람

-완전히 주저앉은 상황에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으로 다시 일어서는 사람

  완전히 자기 힘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 좌절하다가

  비로소 믿음으로 하는 법을 터득한 사람.

 

      지금 나는 어느 단계에 와 있는가?



▲마치는 말 : 믿음이란.. 자신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자기가 뭔가 할 수 있다고 날뛰는 것도.. 자기를 믿는 것이고,

자기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절망하는 것도.. 자기를 믿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바랄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바라고 믿는다.

자기를 바라보지 않고, 자기를 통해 역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본다.


내가 예수를 믿었는데, 그래서 운수 대통하기를 바랬는데,

어쩐지 햇수가 지날수록, 점점 노쇠해져가고, 점점 내 활동범위가 줄어질 수 있다.

돈도 더 줄어들고, 영향력도 점점 더 줄어들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은 이게 정상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내 힘과 능력을 점점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힘과 능력을 의지해서 믿음으로 살아라는 것이다.


모세가 그랬고, 사도바울이 그랬고, 모두가 다 그랬다.

아직도 돈의 힘으로, 사람의 힘으로, 뭘 해보겠다고 할 때... 거기에 '믿음'은 역사 안 한다.


믿음은,

돈의 힘도 안 되고, 사람의 힘으로도 안 되는, 절대 절망의 상황가운데서

주님의 능력만 간절히 의지할 때.. 비로소 역사하는 것이다.

이것을 터득한 사람에게는, 이런 고백이 나온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으니라  막9:23


물론 돈이 생길 때도 있고, 사람의 힘이 모아질 때도 있다.

그러나 이때 주의할 것은, 믿음으로 행하기 어렵게 된다는 것이다.

돈의 힘으로, 사람의 힘으로 행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러나 있든지/없든지, 많든지/작든지

주님의 일은.. 믿음으로 하는 것이다.

 

즉, 자기 힘/자기 가능성을 제로로 만들고,

바랄 수 없는 중에 주님의 능력만 간절히 바래서,

좌절하지 않고, 주님의 약속을 믿고 계속 진군하는 것이다.                                           ▣ 믿음론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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