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갈릴리 첫 번째 설교 눅4:24~30 08.01.02.설교녹취
본문은 갈릴리 첫 번째 설교이면서, 동시에 주님의 공생애 첫 번째 설교이다.
설교 본문이 자세히 나와 있는 경우에 한해서다.
(보통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왔다’를 예수님의 최초 설교로 보는데 이견이 없다.
그러나 그 설교는, 설교본문이 나와 있지 않다.)
그런데 예수님의 첫 번째 설교랄 수 있는 본문은, 그 내용이 좀 친절하지 않다.
◑본문 설명
▲처음에는 갈릴리에서 설교로 칭찬을 받으셨다. 눅4:15
앞서 예수님은, 눅4:14절에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을 하신다. 그리고 갈릴리로 오셨다고 되어 있다. ※참고 : 사복음서 대조표 -클릭-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눅4:15
40일간 금식기도를 마치시고, 갈릴리에서 성령의 권능으로 설교하셨기 때문에
갈릴리의 여러 회당들이 한 번 들썩 한 것이다.
이 소문이, 갈릴리에서 가까운 산동네 마을인 나사렛까지 들려왔다.
‘아니 그 예수가 우리 고향사람이라면서?’
‘우리 고향에서 큰 인물이 났다던데?’
그래서 예수님이 나사렛에 도착하시기 전부터, 나사렛이 술렁거리고 있었다.
▲처음에 자신의 사명부터 밝히셨다.
드디어 예수님이 고향 나사렛에 오셔서, 회당에 들어가셨다. 눅4:16~20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눅4:16
나사렛의 회당장은 예수님께 이사야서를 드렸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두루마리를 찾으시더니, 이 본문을 펴시고, 읽으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4:18~19 / 사61:1~2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읽으시고, 두루마리를 돌려주시자,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주목하였다고 했다.
예수님은 본격적인 설교를 시작하셨다.
예수님의 설교의 첫 문장은 ‘이 말씀이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fulfilled’ 이었다. 4:21
예수님은 위 이사야서를 인용하심을 통해서,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셨다.
한 마디로, 마음이 가난하고, 영혼이 포로 되고, 영안이 멀어버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다.
▲그러나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께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한편으로 예수님의 설교에 놀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의사야 너 자신부터 고쳐라’는 속담을 예수님께 적용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와 비슷한 조롱이었다.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눅4:22~23
그러면서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아마 요2장 가나혼인잔치, 4복음서 대조표 참조, 가나는 가버나움 근처)
을 네 고향 여기 나사렛에서도 행하라면서,
예수님께 비우호적으로 나왔다. 기적이나 보이라는 식이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책망 조로 그들에게 설교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4:24 하시면서
엘리야 때 이야기, 엘리사 때 이야기를 말씀하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는데, 한 명도 믿음이 없었다.
그 당시 믿음 가진 여인은, 이방 시돈 땅의 과부 한 명뿐이었다.)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당시 이스라엘에 많은 한센병자가 있었지만, 이스라엘 병자는 한 사람도 낫지 않고,
적성국가 아람의 나아만 장군 한 사람만.. 엘리사를 통해서 병이 나았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에 나아만 장군 만큼의 믿음이 없었다는 것이다.
나아만 장군은, 노예로 잡혀온 계집아이의 말을 들을 만큼.. 겸손했다.)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눅4:25~29
◑해석 및 적용
예수님의 첫 설교는,
사람들의 분노를 가득하게 일으키고,
자신이 배척당할 것을 뻔히 아실 내용을... 설교하셨다.
저는 이 <책망>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해한다.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씀들을, 거침없이 꺼내셨다.
▲듣기에 좋은 설교는.. 나를 살리지 못한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 예수님처럼
회중을 분노하게 만들고, 회중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씀들을
거침없이 전달할 수 있는가?
여러분, 제가 만약 어떤 설교를 여러분께 했는데,
여러분들이 제게 ‘목사님, 은혜 많이 받았어요! 목사님 설교 잘 하시네요!’
이렇게 여러분이 칭찬하는 설교가... 아마도 여러분을 살리지 못한다.
여러분을 기분 좋게 하고, 여러분의 삶에 활력을 주는 설교
그런 설교도 필요하겠지만,
여러분, 그 설교가 여러분을 살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설교 중에, 그 설교가 여러분의 가슴을 찌르고,
분기가 일어나게 만드는 그 설교...
여러분, 그 설교가 여러분을 살릴 것이다.
▲저는 이 본문을 대할 때마다, 예수님의 사명감이 느껴진다.
어떻게 사역의 처음부터, 자기 고향에서, 벼랑 끝에 온 회중이 모여서
예수님을 떨어뜨려 밀쳐 죽이려고 했을 만큼...
‘찌르는 설교’를 하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찌르는 설교를 못하는 것은, 그만큼 사랑이 없기 때문이요,
또한 그런 설교 했다가 ‘차라리 안 하는 것이 나았다’고 후회하는 것은
사랑으로 하지 않고, 내 혈기를 못 이겨서 회중을 찌르기 때문이다.
이 본문, 이 첫 설교부터, 예수님의 사명감이 물씬 풍겨난다.
예수님은 ‘살고자 오신 것이 아니요, 죽고자 오신 것이구나!’
‘예수님은 사역 초기부터 아예 죽기를 각오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어떻게 첫 설교를 하셨는데, 사람들이 벼랑에 밀쳐서 죽일 생각까지 했을까?
예수님은 로마 군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시기 이전에,
자기 백성들로부터 죽임을 당하셨던 것이다. (미수에 거쳤지만)
▲오늘도 맞아죽을 각오하고 설교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세상을 살릴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진정 사랑하심으로써, 배척 받는 설교를 하셨다.
오늘날도, 성도들을 진정 사랑하는 목회자는, 배척 받는 설교를 할 것이다.
성도들에게 늘 칭찬 듣는 설교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사실은/그 밑바닥에..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지,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왜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끌고 가서, 벼랑에 밀쳐 죽이고자 했는가?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의 설교 요지는
‘너희들에게는 전혀 소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너희 믿음은, 이방 여인/사렙다 과부의 믿음보다 못하고,
너희 믿음은, 이방 장군/나아만 보다 믿음이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동네 사람들은, 그 설교를 더 이상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을 끌고 나가 버렸던 것이다.
이게 예수님의 첫 설교였다.
사람들에게 분노를 일으키고,
설교자를 잡아 죽이고 싶은.. 그런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예수님은, 그 결과를 다 아시면서도, -사랑하니까- 그런 설교를 하신 것이다.
저는 성경을 읽다가 이 본문을 대할 때마다,
예수님의 그 사랑을 다시 한 번 크게 느끼게 된다.
▲당신은 설교로 인해 배척 받고 있는가?
그래서 엘리야도... 그 시대에 배척을 받았으며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는데, 한 명도 엘리야가 보내심을 받지 않고,
이방 시돈 땅의 과부 한 명에게만 엘리야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
그래서 엘리사도... 그 시대에 배척을 받았고,
(이스라엘에 많은 한센병자가 있었지만, 이스라엘 병자는 한 사람도 낫지 않고,
적성국가 아람의 나아만 장군 한 사람만.. 엘리사를 통해서 병이 나았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이스라엘에 나아만 장군 만큼의 믿음이 없었다는 것이다.
나아만 장군은, 노예로 잡혀온 계집아이의 말을 들을 만큼.. 겸손했다.)
마침내는, 예수님까지도 배척을 받았다.
그 당시 나사렛에, 사렙다 과부 같은 한 사람,
나아만 장군 같은 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시대 시대마다, 세상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종을 배척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배척할 사람이 없다면.. 그것은 오늘날의 ‘설교의 위기’일 수 있다.
오늘날에는 엘리아, 엘리사 같은 종이 없어졌다는 말이다.
▲마치는 말
이 새해에는 (이 설교 시점이 2008.01.02)
우리 자신의 혈기와 분노를 자극하고,
감춰진 나의 교만이 드러나고, 혈기가 드러나고,
제 설교가 우리 모두를 회개케 하고,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는
그런 능력의 설교가 전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는 무슨 말씀을 듣든지,
일단 겸손하게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아무리 누가 엉뚱한 소리를 하더라도
‘혹시 주님이 저를 통해서 나에게 말씀하셨는지 몰라!’ 하면서
겸손하게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해야 한다. 다윗이 그랬다. 삼하16:10
............................... 관련글 ....................................
▲복음의 변질 <신윤ㅅ 목사님 로마서 강해에서 발췌
지금 많은 신자들은 복음 전하는 것을
예배당에 나오는 사람들을 많이 모으는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큰 실수입니다.
복음은 자기 백성을 찾기 위해서 주어진 것임을 잊어버린 채
자기 교회에 다닐 교인 만들기 위해서
복음을 자기 멋대로 이용해버리는 것이 오늘날의 교회입니다.
복음은 현 세상과 충돌합니다.
즉 복음이 있는 곳에는 필히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존 인간의 종교성과 충돌하는 것이 복음이고,
세상 사고방식과 충돌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현 교회는 복음 안에서 충돌될만한 위험 요소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버렸습니다.
충돌은 오히려 복음 전파에 방해된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멋대로 충돌 요소들을 제거하고
대신 화합하고 이해될 요소들을 삽입시켜 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변질입니다.
복음 아닌 것을 복음이라고 고집하면서
복음을 이용해서 자기 교회를 키우고 자기의 득을 얻고자 하는 것이
현 기독교의 모습입니다.
이런 세상에 참된 복음이 떨어지면, 세상의 반응은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자기의 현재적 복음을 고수하고 자신의 욕망을 유지하기 위해서
참된 복음을 밀쳐버리고
그 복음을 들고 온 자를 핍박하고 내어쫓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일생을 통해서 알 수 있고,
또 복음이신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힘썼던 사도들의 일생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 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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