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의심한 세례요한 눅7:18~23 09.08.16. 설교일부녹취
◑본문 설명 :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의심한 이유
▲헷갈리는 세례요한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자기 제자 두 명을 예수님께 보내서
예수님이 진짜 메시아인지/아닌지 좀 직접 물어보라고 했다.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눅7:19
그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 중에 한 마디는 이렇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눅7:23
그러니까, 위의 질문과 답을 생각해 볼 때,
세례요한이 잠깐이라도 ‘예수님이 메시아’ 되심을 의심했다는 말이 된다.
물론 세례요한은 지금 (헤롯의 죄를 지적한 관계로) 감옥에 갇혀 있다.
감옥이라는 곳은, 정확한 정보의 흐름을 감지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 점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한 때 자기 입으로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 분의 신발끈을 풀기도 나는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말했던 세례요한이
지금 본문 상황에서,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의심하고 있다니...
▲왜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의심했을까?
한 마디로 말하면,
<자기가 예상하고 생각해 오던 메시아 상image과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세례요한은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 전파했는데,
그 메시지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장차 오실 메시아는 ‘구원주’이시지만, 동시에 무서운 ‘심판주’였다.
사실 구약성경이 예언하는 메시아의 이미지는
‘구원자’ 이면서도 동시에 무서운 ‘심판자’의 이미지로 예언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세례요한의 메시지를 보면,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불로 세례를 베푼다는 말은, 성령의 불세례보다는, 불 심판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특히 연이은 구절↓을 볼 때, 문맥상 불로 세례..는 심판의 이미지가 강하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눅3:16~17
그 외에도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있지 않느냐..
이런 말씀들은, ‘내 뒤에 오시는 메시아.. 그 분은 <심판주>이시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빨리 회개하라!’ .. 이것이 세례요한의 메시지였다.
▲그런데 실제로 오신 메시아의 실상은
물론 <심판>을 말씀하기도 하셨지만, 주로 <사랑, 용서, 자비, 구원>의 이미지였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에 의심을 품었다’는 말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실제 뚜껑을 열어보니, 메시아로 오셨다는 예수는
자기가 예언한 그런 이미지와 많이 달랐고,
더욱이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이미지와도 상당히 다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구약에서도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이런 구절도 있고,
어미가 모태에서 낳은 자식을 잊지 않는다는.. ‘사랑의 주’를 예언하는 구절도 많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은 로마의 압제아래 놓인 상황에서
그들이 바라보고 기대하는 메시아는.. ‘힘 있는 심판주로서의 메시아’였다.)
세례요한이 감옥에서 듣는 예수님에 관한 소식은
‘심판주’보다는 주로 ‘구원주’에 관한 것들이었다.
병자를 낫게 하시고, 소외받는 자들을 위로하시고,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로마나 헤롯에 대해서는 거의 심판을 하지 않으시고...
세례요한은, 자기가 예언한 메시아와
실제로 오신 메시아의 모습이.. 많이 달랐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이 메시아 되심을.. 잠깐이라도 의심했던 것이다.
문제는, 자기가 기대한 메시아 상image과
예수님이 보여주신 실제 메시아의 모습이.. 달랐다는 데 있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억측을 하자면)
그래서 요한은, 혹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사람들이 가진 본성 중에 하나가,
자기가 말/예측한 것이 그대로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그대로 보고 싶어 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가 예언한 '심판주'의 모습을 거의 보이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싶지 않은 마음도.. 얼마간 있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적용 : 기대와 실상 사이의 갭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마11:6
▲내가 생각하는 주님과, 실제 주님의 역사는.. 많이 다르다.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우리도 세례요한과 같은 실수를 종종 범한다.
내 생각에는 주님이 이러 이러하셔야 될 것 같은데
실제로 보면.. 주님은 다르게 역사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그 사랑을/그 섭리를.. 의심하게 되고,
심지어는 믿음까지 흔들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주님이 잘 못 되신 것이 결코 아니다.
‘내 짧은 생각과/내 작은 믿음으로,
깊은 주님의 생각과/크신 주님의 역사를... 내 마음대로 예상/예측하는데 있다.’
▲섣불리 예측하고, 내가 예측한 그대로 되기를 바라는.. 우리의 습관을.. 고치자.
우리는 이런 습관이 있다.
‘봐, 내가 말한 그대로 되었지? 내가 말한 것이 맞지?’
우리가 무슨 ‘쪽집게 무당’이 아니더라도
보통 사람의 속성 중에 항상
어떤 사실을 예측/예상/예단하고.. 그대로 일어나기를 바라는 속성이 있다.
(예화) 어떤 아이가, 자기 집 마당 연못에 거북이를 기르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보니까, 거북이가 움직이지 못하고, 쭉 뻗어 있었다.
아이는 너무 슬퍼서 울었다.
그래서 부모는, 그 거북이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러주어서, 아이를 달래려고 했다.
드디어 거북이 장례식 시간이 되었다.
모든 장례준비가 끝나고, 아이는 사뭇 흥미진진하게 장례식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연못에서, 거북이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 발을 기어가더니, 연못에 풍덩 빠져서 헤엄도 쳤다.
그러자 아이는,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귓속말로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엄마, 저 거북이 죽여주세요!’
물론 지어낸 이야기지만, 얼마든지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말해 놓고는,
상황이 자기가 말한 대로 되기를 바라는.. 어떤 강한 ‘예언적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본문의 세례요한도 그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점을 조심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섣불리 예단하고,
상황이.. 자리가 예단한 대로 펼쳐지는 것을 보고 즐기는.. 그런 속성이 있다.
심지어는, 상황이 자기가 예단한 대로 펼쳐지지 않을 때에는
(위에서 거북이 예화에 나오는 아이처럼)
억지로 그 상황을 맞추어 가는.. 어마어마한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함부로 예단/예측/예언하지 말자.
그리고 어쩌다가 예단/예측/예언했는데,
그 상황이 자기가 예단한 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는
자기의 예단/예측/예언이 틀렸음을 시인하면 된다.
‘자기 말의 신빙성’을 확증하기 위해서, 그 상황까지 변개시키려 하면 안 된다.
(과거 역사에 보면, 그런 왜곡들이 시대마다 있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주도권>을 가지기 좋아한다.
무슨 점쟁이가 아니더라도,
뭔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자기 나름대로 예측하고,
그것이 그대로 일어나는 것을 보고서.. 막 즐거워한다.
그래서 선거전에 항상 당선자 및 예상득표율이 발표되고,
스포츠 경기에 앞서 예상 승리팀이 발표되고,
야구경기를 볼 때 ‘오늘은 누가 잘 때릴 것이다’ 라는 말을 해설자들이 종종 한다.
우리는 ‘거 봐, 내 예상대로 되었잖아!’ .. 이런 말을 하고 싶은 유혹이 있다.
누구나 선지자가 되고 싶은 유혹이, 우리에게 본능적으로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함부로 예단하면 .. 대체로 그대로 잘 안 이루어진다.
주님이 주신 계시(예언)가 없었는데,
내가 함부로 예단/예언/예측해서.. 그것을 맞추어서 내가 영광을 받으려 한다면
주님은 그것을 매우 싫어하신다.
그래서 절대 내가 예단/예언/예측한 그대로 .. 일이 되어지지 않을 것이다.
▲다미 선교회 사건
1992년 10월인가, 다미 선교회가 예수님의 재림을 예언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
‘1992년에는 절대 예수님이 안 오실 것이다!’
예수님이 재림하려고 하셨다가도
괜히 다미선교회의 예언이 발표되니까..
그 재림을 취소하셨을 것이라는.. 농담 반, 진담 반의 말이 있었다.
▲어떤 타교회 분이, 제게, 자기가 본 환상을 말씀해 주셨다.
‘2009년 12월까지 우리교회에 ?명(상당한 숫자)이 나온다’는
그런 환상을 보셨다고 했다.
그래서 그 환상대로 이루어지기를, 자기가 지금 기도하고 계신다고 했다.
저는 그 환상을 들었지만 ‘잊어버리기로’ 했다.
교회가 부흥되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에 맡겨야지..
‘어떤 인간적 기대감’으로
‘내 생각에는 어느 시점까지 몇 명이 되어야 한다’..
이런 것들은.. 내가 주님을 마치 무슨 종처럼 부리는 격이 되고 만다.
내가 주님이고, 내 계획에 주님이 따라오시게끔 만드는.. 계획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자기가 예언하고.. 자기 예언이 맞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혹시라도 그 분이 그런 심정으로 예언을 하셨다면..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 뻔하다.
(사람은 참으로 그러기가/예단하기가 쉽다. 나 스스로 철저히 조심하자는 뜻임)
▲또한 예언/예단 이런 데 너무 깊이 빠지다 보면.. 현재 해야 할 일에 무관심하기 쉽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오늘 현재,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도덕적/영적/신앙적인 영역의) 뜻을 잘 알고 있다.
그 일에 충실해야 하는데,
예언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자기가 해야 할 일은 등한시하고,
오직 그 예언에 따라서 행하고/안 행하고 하다보면... 잘못되기 쉽다.
..........................................................
※편집자 주. 20년 전 쯤에, 샘터 같은 잡지에서 읽은 내용인데,
어렴풋이 기억을 끄집어 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어떤 심리학자들이
어떤 상자에 무슨 물건을 넣어놓고,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맞춰보라는 문제를 냈다.
사람들은 흔들어 보기도 하고, 냄새를 맡기도 하고, 그래서 그 속의 내용물을 맞추는 것인데
아프리카 or 남미의 일반 사람들은.. 대체로 '모르겠다'고 답변했다.
그런데 그 곳의 무속인들은.. '이 안에 틀림없이 무엇이 들었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답변했다.
물론 한결같이 틀린 답변들이었다.
이 심리학자의 실험은 이런 결과를 보여준다.
- 사람들 중에는, '예측/예단을 잘 하는 어떤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혹시 자기 예측이 틀릴까봐 '모르겠다'고 대답하는데 비해서
똑같이 모르는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기 예측이 틀릴지도 모르지만 '분명히 이런 것 같다'고
스스로 확신하거나, 스스로 잘 예측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성향의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예측/예단을 잘 하는 사람이.. 무속인이 되기도 하거니와 (남미나 아프리카에서)
또한 그런 무속인들은, 일반사람들보다, 훨씬 더 예측/예단을 잘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은 신중하게 판단해서 '모르겠다'고 조심하는 반면에,
무속인들은, 똑같은 상황에서 '자기는 알 수 있다'고.. 자기 생각을 지나치게 확신한다는 것이다.
적용하자면, 스스로 신령하다는 종교인들은, 그렇지 않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예측/예단을 잘 하는 경향이 있고,
또 그것이 확실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예측이 확실하다고 믿는 경향이 심하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보다 기도를 더 많이 하기 때문일까?
적어도 제 개인적인 예를 놓고 보면.. 이 말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제가 그것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글은, 하나님께 받은 예언을 무시하는 것은 아님)
.............................................................
(몇 일 전 발행분 속에 관련 내용이 있어서, 다시 인용 합니다.)
우리가 2004년도, 2005년도에 출석인원 얼마를 채워 달라고
간절히 기도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금요기도회와 새벽기도회 때마다 모여서 그렇게 간절히 구했는데,
죽어도 그 명수가 안 되는 거예요.
그때 계셨던 지체들은 우리가 그 기도에 얼마나 목맸는지 잘 아실 겁니다.
그런데 결국 안 됐어요.
제 아내는, 그 목표에 도달하면 다같이 자르려고 케잌도 만들 계획을 세웠는데,
결국은 못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 때 참 실망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사람 수에 대해서는 기도를 드리지 않고 그냥 지냈습니다.
그런데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어느 날 보니까 그 수를 넘었더라고요.
그때 제가 알았습니다.
“아! 일은 잊어 버려야 되는 거구나.
그냥 잊고 자고 깨고 열심히 살다 보면 되는 거구나”
그래서 나이 든 처녀 총각들이 결혼하고 싶으면
오히려 잊어먹어야 결혼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목사님! 저 올 연말까지 결혼할 거예요!”
그러면 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아이고 올해 저 자매가 결혼하기는 또 틀렸구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까짓 것 기왕 늦었으니 주님 일이나 맘껏 하면서 살아야지’
그러면서 열심히 살다 보면 자고 깨는 사이 어느 날,
‘어, 내가 결혼했네, 어, 애가 생겼네...’ 그렇게 되는 겁니다. #2117에서 스크랩 ▣ 크리스천 삶(리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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