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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나의 힘 2129

LNCK 2009. 10. 14. 13:02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나의 힘            느8:1-18         09.09.13. 설교스크랩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느8:10



◑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8:9-18


▲낭독되는 율법의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 있던 백성들은 다 울기 시작했습니다(9절).

그들이 왜 울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들을 비추어 보니

율법에 순종하지 못한, 그래서 실패한 것에 대한 회한이 밀려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들은 실패 의식과 좌절감에 목 놓아 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수많은 축복들을 다 빼앗기고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의 변방에

초라하게 모여 있는 자신들의 처지가 너무나 어처구니없이 느껴져 울었습니다.

"우리는 왜 그리도 어리석었을까? 왜 그렇게 멍청하게 크고 위대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과 강대국들을 섬겼을까?"

자책하고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기에 울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와 에스라, 레위 사람들과 같은 지도자들은 그들이 우는 것을 말렸습니다.


오늘은 너희 하나님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9절)


「하나님의 성일」이란 말은 이 날이 우는 날이 아니라, 기뻐하는 날이라는 의미입니다.

나팔절은 그 성격상 마땅히 기뻐하며 즐거워해야 할 절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들의 슬픔은 쉽게 누그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느헤미야가 다시 나서서 그들을 권면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느8:10



▲슬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느헤미야는, 어떻게 기뻐할 수 있다고 말합니까?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호와를」기뻐한다는 말은,「여호와로 인하여」기뻐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백성들은 율법의 거울 앞에서 자신들의 처지를 보았습니다.

율법의 거울로 자신들을 보니, 자신들의 비참함이 극명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자신들의 비참함만 보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그들은 '여호와'께 시선을 돌려 그분을 보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완전히 망한 그 백성들에게 지금 은혜를 베푸시고 계십니다.


'선한 손'으로 그들을 도우셔서 성벽을 재건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서 새 역사를 이루어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에 불순종한 백성들을 심판하셨지만,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백성에게는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심을 그들은 보아야 합니다.

그때 그들은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그들의 힘입니다.

그들이 율법의 정죄 앞에서 실패감과 좌절감에 빠져 슬퍼하기만 한다면

그들은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여기서 '힘'(마오츠)이란 단어는 '요새지', '성채'란 뜻도 있습니다.

'요새'란..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는 곳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기뻐하면, 우리가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유대주의자들의 집요한 공격을 당하고 있는

빌립보 교회에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빌3:1



▲적용1. 우리는 어디서 <힘>을 얻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우리는 어디서 안전을 확보합니까?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안전입니다.


우리는 때로 성경 말씀을 볼 때, 내 허물과 죄가 드러나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기에 실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수는 우리에게 회한을 남기고 우리를 슬프게 만듭니다.


우리가 말씀에 비추어 지난날을 생각한다면, 온통 회한과 슬퍼할 일 뿐입니다.

저는 문득 문득 지난날에 잘 못했던 것을 떠올릴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너무나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어떤 때는 그렇게 했던 자신에게 막 화를 내기도 합니다.

가슴을 치기도 하고 머리를 쥐어박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볼 때, 제가 그렇게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자기 아들을 내어 주신 하나님,

그리고 지금도 변함없이 저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기뻐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나의 힘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적용2. 우리는 어디서 <기쁨>을 얻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기뻐하다가도

자꾸 세상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눈이 돌아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주말 TV 드라마를 기뻐하기도 하고,

사람들의 조그만 인정과 칭찬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하고,

내가 하는 일의 성취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일에 파묻히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어지는 여러 가지 것들을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는 금욕주의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좋은 것들을 감사하며 기쁨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에게 근본적인 <힘>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 것들을 통한 기쁨은 일시적이기 때문입니다. 금방 사라집니다.

그래서 허무합니다. 그 기쁨은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을 기뻐하면 우리의 영혼이 만족합니다. 힘이 납니다.

하나님이 무슨 돈다발을 주셔서..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슨 기적을 베풀어주셔서..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로 기뻐해야 합니다.


마치 사랑하는 애인과 있을 때보다 더,

마치 사랑하는 부모님과 있을 때보다 더,

마치 존경하는 선생님과 있을 때보다 더한 기쁨으로.. 여호와를 기뻐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닙니다.

꾸준히 경건의 훈련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로 인한 기쁨’이.. ‘세상 기쁨’보다 더 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성령충만한 성도이고, 성숙한 신자인 것입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을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준 말씀을 밝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율법이 자신들의 죄를 드러낼 뿐 아니라,

순종하는 자에게 은혜와 회복을 약속하신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백성들은 초막절을 지킴으로 기쁨을 표현했습니다.

그들이 초막절을 지킨 것은

자신들을 제2의 출애굽 백성으로 인식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출애굽 한 백성들은 율법을 버렸기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하나님은 1,2,3차 포로 귀환을 통해 제2의 출애굽을 이루셨습니다.

그들은 마치 홍해를 막 건넌 후 약속의 땅을 향해 첫 걸음을 내딛는

조상들의 심정을 가졌습니다.


조상들은 실패했지만, 우리는 실패할 수 없다는 각오를 새롭게 했습니다.

자신들의 형편은 광야에 첫 발을 내딛었던 조상들의 형편보다 더 어렵지만,

조상들을 메마른 광야에서 먹이시고 입히셨던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입히시고 먹이실 것이라는 믿음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를 고백하면서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느8:17~18


여호와 하나님을 기뻐하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무한한 용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기뻐하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허물과 약점 투성이인 우리의 모습은 초라하지만,

회개하고 나아갈 때 우리를 뜨겁게 안아주시는 하나님을 기뻐하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우리는 늘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걱정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기뻐하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불안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순종하며 나갈 때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기뻐하십시오.


그래서 날마다 우리가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시편 18편 1절을 보십시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시18:1                         ※관련글 : 유쾌한 (기쁜) 거지들



......................................... 더 읽으실 분 ........................................


(위 설교문에서, 너무 길어서 전략前略된 부분을 아래에 배치했습니다.)


느헤미야서 7장에 보면, 성벽이 건축되자

느헤미야는 가장 먼저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웠습니다.

또한 충성스럽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뛰어난 하나냐를

자기 동생 하나니와 함께 예루살렘 성주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예루살렘 성은 황폐된 채 버려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이 별로 살지 않았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느헤미야가 생각해 낸 계획이

족보의 기록을 조사하여 그들을 이주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7장에 그 족보들이 나오는데, 총 46,360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루살렘에 이주하여 사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일을 먼저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렬한 자세 (느8:1-8)


느8:1-8절까지의 요지는 한마디로 이것입니다.

즉 성벽 재건을 마친 백성들이, 제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것을 이중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4절에서 한 번 이야기 하고,

5-8절에서 다시 한번 이야기 합니다.

앞부분에서는 개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고,

뒷부분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두 주체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듣는 입장에 선 사람들 즉 대다수의 청중들이고,

다른 하나는 가르치는 입장에 선 사람들 즉 에스라와 그를 돕는 사람들입니다.


▲1. 듣는 입장에 선 대다수의 청중들 (느8:1-4절)

우리가 이 본문을 읽을 때, 우리는 먼저 듣는 입장에 선 사람들을 주목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본문이 그들의 자세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떤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까? 먼저, 1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그 본성에 거하였더니 칠월에 이르러는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


7월 1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전통적으로 '나팔절'(the Feast of Trumpets)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한 해를 시작하는 '설날'(New Year Day)인 셈입니다.


성벽 건축이 6월 25일(엘룰월 25일, 느6:15)에 끝났으니까,

잠깐의 휴식을 취한 후 설날을 맞이하여 백성들이 다시 모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설날은 그 어느 때와는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성벽 재건을 마치고 포로 후기 하나님의 공동체의

새 출발을 알리는 시점에서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공동체의 시작,

그리고 한 해의 시작이 맞물려 '새로운 시작'의 의미를 배가시키는 날이었던 것입니다.


▲이때 백성들은 무엇을 하고자 했습니까?

학사(서기관)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책' 곧 「모세 오경」을 가져오라고 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새 출발을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하겠다는 자세입니다.


공동체의 나아갈 길을, 비전을, 그리고 각 개인의 삶의 방향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겠다는 자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삶의 기준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발견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자신들의 나아갈 방향을 구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했습니다.


그래서 성경 선생인 에스라에게 먼저, 자발적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청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발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하는 그들의 자세를 배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자세가

영적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매주 이렇게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한 주의 출발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첫 시간에 새벽기도회를 하고, 첫 시간에 Q.T.를 하는 것은

하루의 시작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본문의 백성들처럼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해야 겠습니다.


▲백성들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경외심'을 가졌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서 책을 폈습니다.

그러자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들이 일어섰습니다.

'일어섰다'는 것은 존경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기 위해 일어섰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듣겠다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또한 6절을 보니까,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했습니다.

그러자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했습니다.

그리고는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열렬한 마음으로, 뜨거운 심정으로, 그리고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런 자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긴 시간 동안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 들을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 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새벽부터 정오까지는 대략 6,7시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인 남자와 여자는 물론이거니와 말귀를 알아들을만한 청소년부터 어린이까지

그렇게 했습니다. 7절에서 "백성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 이라고 한 것을 보면,

우리처럼 편안하게 앉을 의자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새벽부터 정오까지 꼬박 서서,

그것도 어른들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청소년이나

어린이까지 그렇게 했다는 것이 참 대단하게 보입니다.


그들이 특별히 인내심이 많아서 그렇게 했겠습니까?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만큼 그들의 처지가 절박했고,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을 생명처럼 소중하게

생각했기에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간절히 원하면 초인적인 힘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설교가 좀 길어도 좀이 쑤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듣기 원하는 사람은 말씀 듣는 시간을 사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듣기 원하는 사람은 아무리 몸이 피곤해도 새벽에 일어납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참 많이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들과 같은 열렬한 마음,

그들과 같은 경외심이 제 안에 없는 것을 보고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요즈음 중국에서의 사역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면서 지내느라 무척 바쁩니다.

겉으로 볼 때는 제가 늘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기 때문에

말씀에 대한 열심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렇게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는 것은 대부분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성경 공부를 가르치기 위해서 입니다.


정말 저 자신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무엇일까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오랜 시간 말씀에 귀를 기울였던 적은 많지 않습니다.


이제부터는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일까?' 하면서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생활을 하고자 합니다.

무엇보다 시편 기자가 고백한 대로,

"주의 말씀을 갈망하여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서 울부짖으며,

주의 말씀 묵상하다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웁니다."(시119:147,148)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2. 가르치는 입장에 선 에스라와 그를 돕는 사람들 (느8:5-8절)

말씀을 듣는 사람들도 대단했지만,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의 열심도 대단했습니다.

먼저 에스라는 6,7시간을 단에 홀로 서서 말씀을 낭독했습니다.

물론 중간 중간에 휴식 시간은 가졌을 것입니다.

또 레위인들이 백성들에게 해석해주는 시간에는 휴식을 취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오랜 시간 성경을 낭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한 그는 6,7시간 안에 모세 오경을 다 낭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시 회중의 상황에 적절한 본문을 택하여 준비해 두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백성들이 요구하기 전에, 그들이 자신을 청할 때를 대비했습니다.

읽을 본문을 준비해 두었고, 성경 선생들을 준비해 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모든 청중들이 들을 수 있도록 또박또박 성경을 낭송했습니다.


▲느헤미야 9장의 내용을 가지고 추측해 볼 때,

그가 읽은 본문은 창세기의 아브라함과 관련된 부분과

출애굽기에서 출애굽과 홍해를 건너는 부분,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는 부분과 조상들이 금송아지를 섬겨 범죄 한 부분,

민수기의 광야 생활 부분, 신명기의 축복과 저주를 선포한 부분 등이었을 것입니다.


에스라가 한 부분을 읽으면, 레위인들로 구성된 성경 선생들은 그룹 그룹을 다니며

그 뜻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히브리어를 아람어로 해석해 주고,

그 뜻을 풀어주어 백성들이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수문 앞 광장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듣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이 혼연일체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은 각 심령과 심령들을 파고들었습니다.


이로써 메마르고 갈한 심령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젖어 들었습니다.

비록 멋진 강단이 없었고, 훌륭한 예배당이 없었지만,

그들은 어느 예배보다도 뜨거운 말씀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오늘날 한국에는 교회마다 크고 멋진 강단들이 있습니다.

음악당보다도 더 세련되고 아름다운 예배당들도 많습니다.

수많은 교회에서 주일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TV나 라디오를 틀면 24시간 어느 때든지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인터넷으로도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씀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점점 쇠퇴하고 사람들은 말씀이 없어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무엇이 문제입니까?

먼저, 전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을 이야기 합니다.


듣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귀에 듣기 좋은 말만 들으려고 합니다.

그러니 점점 하나님의 말씀은 희귀해져 갑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의 말씀에 대한 자세를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절) 라는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내 길을 비추지 않으면

내가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그런 절박한 마음을 가지고 말씀을 대하고,

열렬한 마음으로 말씀을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열렬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또한 열정을 가지고 말씀을 가르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 크리스천 삶(리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