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못 알아봤던 사람들 눅8:19~21 09.09.13.설교일부녹취
◑본문 설명
▲19절, 예수의 모친과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를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막3장에 보면)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이었다.
집안의 장남인 예수가, 집을 오래 나가있으니, 가족들이 걱정도 많이 되었던 참에,
더욱이 ‘미쳤다’는 소문까지 퍼지자..
예수님의 가족들은 더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 때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충격적이다.
너무나 우리들의 정서와는 상반되는 말씀이다.
20절, 혹이 고하되 당신의 모친과 동생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섰나이다
21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가족을 모르는 체 하다니... 완전히 천륜을 짓밟는 것 같은 말씀이었다.
동양적 정서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가족들은.. 누구보다 예수님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릴 적부터 성장하는 모습을 보아왔고,
한솥밥을 같이 먹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가족들이 자기를 전혀 모른다>는 식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가족으로서, 또는 친한 친구로서
우리는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우리는 서로를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정말 많다.
◑해석/적용1. 예수가 누구인지 몰랐던 가족들
▲<부부지간>에 설문조사를 해 보면
‘내 아내가, 남편인 나를 잘 알고 있다’고 대답한 사람은 별로 없다.
남편들의 70%는.. ‘자기 아내가 자기를 잘 모르고 있다’고 대답한다.
아니 이럴 수가!
아내인 경우는 조금 더 심하다.
‘내 남편이, 아내인 자기를 잘 알고 있다’고 대답한 사람도.. 별로 없다고 한다.
아내들의 80%이상이.. ‘자기 남편이 자기를 잘 모르고 있다’고 대답한다.
그렇게 오래도록 한 집에서 같이 산 남편과 아내도
10가정 중에 7~8가정이... ‘남편과 아내들이 서로를 아직도 잘 모르겠다’로 대답했다.
▲그런데 <부모와 자식관계>에서는.. 더 심하다고 한다.
사춘기를 지난 자식들 가운데,
‘우리 부모가 나를 충분히 잘 이해하고 있다. 나를 충분히 잘 알고 있다’
이렇게 대답할 자녀는 과연 몇 %나 될까?
그 비율은, 부부지간의 비율보다 더 낮아질 것이 뻔하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 한 지붕 밑에 10년 이상 같이 사는 가족이라 하더라도
서로가 서로에 대해.. 사실은 깊이 있게 알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님에 대해 잘 몰랐던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더욱이 ‘예수님의 신성’을 알아보기란.. 정말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제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19살 된 제 딸과 마주 앉아서
아빠인 제 인생과, 딸인 자기 인생과 장래에 대해서
한 번 진지하게 얘기해 본 적은
지난 19년을 살아온 동안에, 아마 다섯 손가락 안으로 꼽힐 것이다.
제가 못된 아빠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게 아마 우리의 보편적 현상인 것 같다.
가족이라도.. 그래서 늘 가까이 있지만,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전혀 잘 모른다.
오늘 (늘 해오던 순서에 따라) 눅8:19~21절 본문을 대하면서
예수님의 가족들의 무관심을 성토하기 이전에
알고 보니, 나도 그렇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앞으로는 좀 돌이키자는 것이다.
가족여행을 가든지, 편지를 쓰든지..
너무 외부 일에만 몰두해서 가족을 팽개치지 말고..
일주일에 하루를 택해서, 한 나절이라도..
가족끼리만 relax하면서, 서로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정말 필요하다.
relax하지 않으면.. 진지한 대화가 서로 간에 나오지 않는다.
◑해석/적용2. 예수가 누구인지 몰랐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사실은 제일 멀리 있었다.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복음서 전체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성경(특히 모세오경)을 많이 연구하고, 암송하고, 그렇게 종교적이면서도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전혀 알지 못했다.
가장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대하고,
스스로 가장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바리새인 : 경건한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하나님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이것을 지금 우리 이야기로 들으시면, 설교를 잘 따라오시는 것이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이런 오류에 빠지게 했을까?
①먼저는,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예 세리나 창기처럼
‘나는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다’ 이렇게 나왔으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었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를 수 있었다.
그런데 자기들 스스로 ‘아무렴, 나는 하나님을 잘 알고 있지!’ 이런 교만한 생각들이
자기 눈앞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아들을 보면서도,
그 말씀을 들으며, 그 기사와 표적을 다 보면서도,
도리어 ‘귀신 들렸다’고 욕하고, 예수가 ‘올무에 걸리도록’ 계속 시험했던 것이다.
②적당히 믿기 때문이다.
적당히 믿고 살다가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우리도 바리새인들처럼) 모르게 된다.
‘좋은 것은 위대한 것의 적이다’는 말이 있듯이
‘적당히 믿기 때문에.. 우리는 제대로 신앙생활을 못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 적당히 살다가는.. 잘못하면 이렇게 될 수도 있다.
캐나다에 인디언들이 사는데, 정부가 그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한다.
사회에 부적응자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하는 수 없이 정부는 ‘인디언 거주구역’을 정해 주고,
강제가 아니라, 인디언이 자원해서 거기에 들어가서 살면
평균생활비의 85%를 정부가 지원해 주었다.
그래서 대부분 인디언들은, 바깥으로 뛰쳐나오지 않고,
그 정착촌에서 계속 머물러 산다고 한다.
그런데 일을 안 하고, 정부 지원금에 의존해서 <적당히> 살다 보니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이 마약에 빠지고, 아빠가 불분명한 아이를 놓고..
그들의 삶이 황폐해져 가기 때문에, 그게 또 문제라고 한다.
이런 말씀을 드려서 죄송하지만,
예수 안 믿고 <적당히> 살려 하다가는.. 캐나다의 인디언처럼 되기 쉽고 (안 그런 분이 많이 있지만)
예수 믿으면서 <적당히> 살려 하다가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되기 쉽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을 열심히 믿은 것 같지만,
잔과 대접의 겉만 깨끗이 하고.. 속으로는 안 믿은 사람들과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적당히> 남들 보기에 좋게 신앙생활 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매우 무리되는 말씀을 하셨는데
죽도록 충성하라.. 는 말씀이다. 계2:10
굉장히 의미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죽도록 충성하지 않으면, 충성이 안 되기 때문’이다.
또한 적당히 믿고, 적당히 살다가는
마귀의 밥이 되기 딱 알맞기 때문에
(마25장의 5처녀/한 달란트/염소처럼) 영생을 못 얻을 수도 있기 때문에,
죽도록 충성하라.. 고 말씀하신 것이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믿되, 목숨 걸고 믿으라’는 뜻이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도.. 하하호호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따르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피도 눈물도 없이 매몰차신 분이 아니라,
죽도록 충성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 수 있으며
참으로 이 땅에서 천국과 영생을 상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적당히’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행복한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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