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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저편으로 건너가자 2160

LNCK 2009. 11. 1. 20:31

◈바다 저편으로 건너가자                     막4:35-41                        1998년경 설교로 추정함

                                                                                                              인터넷설교 스크랩


◑도입, ‘두려움’이란 두려움


오늘 우리는 민족적으로 IMF(1998)라는 매우 어려운 시기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미국에도 경제 대공황의 시기를 지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 유명한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 국민들에게 이런 스피치를 남겼습 니다.

"미국 국민여러분, 우리가 이 시점에서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다면

두려워한다는 사실 그 자체 하나뿐입니다."


그는 경제위기나 정치 위기보다도

두려움이란 심리적 상태를 경계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말은 옳습니다.

왜냐하면 두려워하게 되면 우리는 판단이 흐려지게 되고 행동이 마비 가 됩니다.

뭘 해야 될지 모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갈릴리 동편에 가셔서 예수께서 안식도 취하시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자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건너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무시고 있었는데 풍랑이 일어납니다. 물결이 배에 부딪칩니다.

배에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물이 배를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겁에 질린 제자들은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깨웁니다.

예수님이 일어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두려움을 경계하라고 주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모든 것이 두려워집니다.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익명의 공포, 미지의 공포,

대상도 알 수 없는 두려움 속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요즈음 한국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는 유머 시리즈 가운데

<무서워 시리즈>가 다 생겼어요.


   '무섭나' ... 공포의 대상 가운데 하나가 자기 자신 입니다. 내가 무섭다는 뜻이지요.

   '무서워유' ... 당신이 내 공포의 대상이 될 수가 있다는 뜻이지요.

   '무서운걸' ... 남자들은 여자를 두려워합니다. 

   '무섭군' ... 여자들은 남자가 두려워집니다.

   '무섭데이' ... 하도 살맛이 나지 않으니까 생의 무력증에 시달린 나머지

                       아침에 일어나면 하루 사는 것이 너무 무서 나머지 ‘무섭데이’ 합니다.

   ‘무섭지비’ ... 저는 주일날 아침에 비가 오면 ‘무섭지비’ 합니다.

                      왜냐하면 비가 오면 주차할 때 우리 교인들이 고생하지 않을까...

   ‘무섭다’ ... 위에 나온것 다 통털어, 삶의 모든 것이 무서운 사람은 ‘무섭’합니다.

                   공포에 사로잡힌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 제기

그러나 예수께서 일어나시자마자 파도와 바다를 잠잠하게 하십니다.

드디어 제자들은 풍랑을 극복하고 예수님과 함께 바다 저 편으로 건너갑니다.


오늘 우리가 이 시대의 풍랑, 민족적인 풍랑, 가정적인 풍랑,

이 풍랑을 극복하고 우리가 우리의 꿈이 기다리는 저편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풍랑은 늘 일어나니까.. 늘 맞이할 각오하고 살아야 합니다.


자, 큰 광풍이 일어났습니다. 물결이 배에 부딪칩니다. 배가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뱃전에 물이 스며들기 시작 했고, 심지어 배에 가득하게 되었는데

아직도 예수는 주무시고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께서는 잠을 청할 수가 있었을까요,

정말 예수님이 주무셨을까? 저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처음에는 피곤하니까 주무셨겠지만

자, 광풍이 몰아 부치고 배가 흔들리고,

얼굴에 막 비가 뿌리기 시작하고 물이 들어오고 뱃전에 아우성인데

아직도 주무시고 있었거든요,


저는 예수님이 처음에는 주무셨지만. 어느 시점에서는 깨어나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주무시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주무시는 것처럼 가만히 계셨을 거예요, 

그럼 왜 일어나지 않으셨나요?

예수님에게는 한 가지 중요한 의도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이 물결 속에, 어떻게 이 파도에 반응하는가?’

그것을 보시고 싶어 했던 것이에요. 상당히 의도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사건이, 예수님이 제자들을 ‘시험 test’ 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풍랑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다.


왜 이런 시험을 하셨을까요?

인생의 바다에는 풍랑이 끊이지 않습니다.

하나가 지나가면 또 다른 풍랑이 다가 옵니다.

그러니까 풍랑이 오면.. 싸우고, 견디는 훈련도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은 경제적인 풍랑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은 인간관계의 풍랑, 관계가 단절되어 상처를 주고받고

갑자기 한 순간 건강이 꺾여 버린 그런 풍랑을 겪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거대한 풍랑 하나를 겪고 나면

다른 풍랑에는 상당히 자신이 있거든요.

풍랑을 겪을 줄 아는 마음의 준비,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예수께서 이 풍랑을 잠시 나마 허용하지 않으셨을까 생각합니다.


사실 이번 IMF(1998)가 왔을 때

기성세대 들은 상당히 느긋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6.25와 비슷한 민족사의 풍랑을 겪은 경험이 있습니다.


저는 이번 IMF가 결코 먼 안목으로 볼 때

우리 민족에게 유해한 결과만을 가져오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특별히 젊은 세대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신세대, 정보information가 많고, 똑똑하고, 유능하고 유망합니다.

그런데 우리 젊은 세대의 약점중의 하나는

이 어려운 환경을 부딪치는 거센 용기가 좀 부족합니다.

만약 이 풍랑을 지나간다면 우리의 신세대도 저는 달라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습니다.


그런가하면 문제는 뭐냐 하면

풍랑이 어떤 때는 전혀 예고 없이 다가온다는데 우리를 당황시키는 요인이 있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풍랑, 사실 인생의 많은 풍랑은 이런 것들입니다.

갑자기 다가와서 상처를 남기고 홀연히 이 풍랑은 떠나갑니다.

갈릴리 바다의 풍랑이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성지 순례를 해 보시면 이 갈릴리라는 이 바다,

갈릴리 바다는요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여있어요.

그리고요 저기 앞에 보시면 헬몬산이 보입니다. 아주 높은 산입니다.


이 헬몬산은 해발 2760m, 굉장히 높은 산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보면 항상 눈이 덮여 있어요. (매우 높다는 뜻)

헬몬산에서 차가운 물이 좁은 협곡을 타고 내려와 갈릴리 바다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 갈릴리 바다는 아열대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상당히 덥습니다.

이 찬물이 헬몬 산에서부터 내려오면서

이 아열대성의 더운 갈릴리 바다의 표면의 물과 부딪치면서

갈릴리 바다는 예고하지 않았던 급작스런 풍랑을 일으킵니다.

 

이렇게 갑작스런 풍랑이 일어나는 갈릴리 바다야말로

우리 인생에 대한 적절한 상징symbol 이 됩니다.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의외성의 풍랑, 급작스런 환란, 그래서 우리는 더 당황하고 더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런 풍랑은 인생에서 쉴 새 없이 다가올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삶은, 풍랑을 늘 준비하고 살아야 합니다. ←설교의 1대지

그리고 작은 풍랑을 점점 허락하심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가 점점 더 풍랑에 익숙한/노련한 성도로.. 키워 가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 믿고 신앙을 가졌다는 사실 때문에

풍랑이 면제된다... 이렇게 가르치신 적이 없어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 세상에서는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풍랑의 면제를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풍랑은 오지만 너희는 풍랑을 뚫고 나아갈 수가 있다.

마지막 승리자가 될 수가 있다!

여러분 이 약속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사도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기쁘게 여기라'

‘여러 가지 시험’이라는 말을 원어로 보면 ‘여러 가지 색깔’이라는 말입니다.

인생은 형형색색의 시험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시험을 대비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만약 불시험을 당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아라'

우리는 평범한 시험도 있지만, 어떤 시험은 불같은 시험,

그런데 ‘이런 불같은 시험을 경험할 때라도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말라’

이렇게 성경은 가르칩니다.


사실 본문에 나타난 갈릴리 바다의 풍랑, 제자들이 경험했던 이 풍랑은

오늘 성경에 보시면 ‘큰(메갈레) 광풍’이라고 그랬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메가톤급의 풍랑이에요.


내 삶의 근저를 흔들어 버리는 풍랑, 그리고 내 삶의 존재를 위협할 수 있는 풍랑,

이 거센 풍랑이 덮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풍랑만 이기고 나갈 수 있다면

우리는 인생의 어떤 풍랑에도 승리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이 풍랑을 허용하신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여러분, 우리가 거센 풍랑이 일고 있는 이 바다를 지나가

소망의 피안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풍랑은 있을 수 있다. 시련은 있을 수 있다.’

이렇게 마음의 준비를 하시길 바랍니다.



◑2.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


우리가 풍랑을 넘어서서 바다 건너편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두 번째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막4:40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배에서 주무시다가 깨어 일어나시면서

풍랑이 일어나고 있는 바다를 향해서 명하십니다. ‘바다야 잠잠하라’

그리고 바다는 유리알처럼 투명한 고요한 바다로 변화되었습니다.


자, 이 사건 직후에 예수께서 두 마디 말씀을 하세요.

‘너희가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그리고 또 하나는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막4:40


▲제자들이 영 믿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느냐?’고 말씀하셨지만,

따지고 보면, 제자들에게 전혀 믿음이 없었다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어부의 직업을 포기하고 예수님 좇아 나섰을 때,

예수께 대한 신뢰와 믿음이 없었다면..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예수님이 메시야다, 구세주다, 저 분 따라가면 인생이 변한다’

이렇게 그들은 예수님을 신뢰하고 따라 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큰 풍랑이 일어났을 때,

이 순간, 이 현장 속에서만큼은.. 제자들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신앙인의 불신앙> 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어느 한 순간, 인생의 어느 한 사건 앞에서, 어떤 특수한 한 현장에서는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항상 있는 것이지요.

저는 제자들의 입장이 그런 입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은 당황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을 흔들어 깨웁니다.

‘선생님, 일어나셔야죠. 우리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째서 잠만 주무십니까?’

‘일어나서 뭔가를 좀 하십시오.’


당황하니까 예수님 보고 지시하고 있어요. 예수님 보고 막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런 인생의 에피소드는, 우리에게도 언제나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예수님 이렇게 좀 해 주십시오.’ 하고

예수님께 막 지시할 때가 많아요.


이런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어떻게 믿음을 가진 자가 될 수가 있을까요?

여러분, 우리가 제대로 믿음을 가지려면 환경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현실의 환경은, 거대한 파도 앞에서 제자들의 믿음은 위축되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는 여러분, 보려고만 하지 말고, 들으려고 하세요.

주님의 음성을 들으세요.

그 음성은 작은 음성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이 고통의 현장, 이 낙심과 불안의 환경, 시련의 역경의 현장 속에서도

주님은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을까? 하고 주님의 음성을 들어 보세요.


여러분, 이런 역경이야말로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열 시간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주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음성을 들어 보세요.

그 말씀은 믿음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만 가지면 이길 것입니다.


우리는 재기할 것입니다.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풍랑의 바다 건너가려면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악령을 꾸짖으시라!

예수께서 이제 풍랑이 일고 있는 바다를 향해서 꾸짖으시고 명령하십니다.

본래 ‘꾸짖는다’는 단어는 악령/귀신들을 꾸짖을 때 사용되는 독특한 표현입니다.

그것이 바람을 꾸짖는데 사용되었어요. 그래서 한 성서 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풍랑의 배후에는 어쩌면 악한 세력, 사단의 역사함이 있었을 것이다’라고요.


그렇습니다. 모든 고통이 악마 때문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고 통은 사탄 때문에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나를 좌절시키고, 나를 낙망 시키고, 나를 주저앉게 만드는 일의 배후에는

악한 영들의 역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어나 예수님처럼, 예수님의 권세를 의지하고 꾸짖으셔야 합니다.

‘파도야, 잠잠하라. 고통아, 사라져라 . 문제야, 극복될지어다.’

이렇게 예수님의 권세를 갖고 나아가면.. 여러분, 고통은 극복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꾸짖으시자, 파도와 바람이 잠잠해 졌어요.

이 놀라운 광경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이렇게 외칩니다.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막4:41


여러분! 우리 신앙생활의 초기에 우리가 가장 많이 던지는 질문이 있다면

'무엇'이라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무엇을 해줄 수가 있는가?’

우리는 이런 차원에서 신앙을 접근합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실 수가 있을까?’

‘이 신앙이 나에게 어떤 유익이 있을까?’

우리는 이런 실용주의적 차원에서 신앙을 접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대로 된 신앙의 사람이 되려면

참된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무엇’에서 → ‘누구’라는 질문으로 바뀌어야 되요.


‘예수님이 누구이신가?’ 그 확신이 없이,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진정한 신앙의 고백이 없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저분은 누구일까? 바람과 파도도 복종하시는 저분은 누구일까?’

제자들은 어느새 깨닫고 있는 것이 예요. 무엇을 깨달았을 까요?

바람을 잠잠케 하시는 저분은, 바람을 지으신 분이 아닐까?

파도를 잠잠케 하시는 저분은, 파도를 지으신 분이 아닐까?


한순간 그들은 한낱 인간 예수에서 → 그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창조자이십니다.

창조자일 뿐만 아니라, 그는 만물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섭리자이십니다.

풍랑을 잠잠하게 하고 평안을 줄 수가 있는 분,

인간의 내면의 내 마음 속에 있는 풍랑도 잠잠하게 하고,

나를 평화로 인도할 수가 있는 분, 나를 구원할 수가 있는 분,

예수는 구원자, 믿으십니까?


▲제자들, (풍랑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께 경외감을 갖게 되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40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41


40절의 ‘무서워하다’와 41절의 ‘두려워하다’가 헬라어로 다른 단어업니다.

그래서 특별히 R.S.V. 영어번역은,

41절을 ‘저희가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으로 가득 찼다. filled with awe’라고 했고,

40절은 그냥 일반적인 무서움을 뜻하는 afraid/fear를 쓰고 있습니다.


(후략)                                                                                                 ▣ 고난의 신학, 영광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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