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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 왜 나! 2163

LNCK 2009. 11. 3. 14:43

◈왜 나?, 왜 나!   Why Me? vs Why Me!            빌4:12~13              09.06.14. 설교 스크랩



*이 설교문의 주제

1. 분노와 좌절과 고통의 ‘Why Me?’가 기쁨과 만족과 감사의 ‘Why Me!’로 승화되도록.

2. 모든 상황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사귐의 비밀을 더욱 깊이 알아가도록.



◑Why Me? 에서 Why Me! 의 신앙으로


“Why me?”는.. 분을 품고 하늘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왜 내게 이런 일이!’하며 항의하는 그림이지만,

“Why me!”는.. 두 팔을 넓게 벌리고 ‘왜 나 같은 것에게 이런 은혜가!’의 고백입니다.


전자는.. 세상적인 상황에 휩쓸리고 좌우되지만,

후자는.. 믿음에 기반 해서 상황에 적응하여 자족합니다.


전자는.. 이 땅의 조건을 의지하지만,

후자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전자는.. 풍족하면 범죄하고, 궁핍하면 불평, 원망하지만,

후자는.. 십자가의 감격으로 상황을 초월하여 언제나 감사합니다.


몇 년 전 <Bruce Almighty>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뉴욕州 버팔로市의 한 방송사에서, 부루스 놀란(짐 캐리 분)은       *Bruce Nolan

그 방송사의 ‘저녁뉴스 앵커’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삽니다.


그러나 동료 이반에게 뉴스 앵커자리가 돌아가자

부루스는 분을 참지 못해, 생방송 중에 욕설을 하는 사고를 내고, 해고되고 맙니다.


그는 격렬하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위 전자의 “Why me?”)

그 때, 집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오는데,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모건 프리먼 분


하나님은 Bruce에게 Buffalo 한 지역을 떼 주면서, 하나님 역할을 하도록 합니다.

(학급에서 제일 말썽꾸러기에게 반장 맡기잖아요?)

그러자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신적인 권능을 모두 발휘해서

자기가 방송국 앵커 되는 데에만 집중합니다.


결국 앵커 자리를 따내기는 하지만, 그 와중에 Buffalo시는 엉망이 되고,

그의 극심한 이기주의는

결국 오랜 세월동안 그를 한결같이 지켜주었던 여자친구마저 잃게 합니다.


절망 가운데, 비 오는 길 한 가운데 서서  Bruce는 이렇게 외칩니다.

“I surrender to Your will!”                  *당신의 뜻에 제가 항복합니다.


바로 다음 장면에 그는, 트럭에 치여 정신을 잃습니다.

“I surrender to Your will!”을 외친 후, 트럭에 치여 혼수상태 가운데

Bruce는 하나님을 다시 만납니다.


자신의 지독한 이기주의와 한계를 처절하게 깨달은 그는,

이제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물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어 깨어나게 합니다.

자기 몸도 회복되고, Buffalo市도 정상화되고, 여자친구와의 관계도 회복이 됩니다.

잠시 하던 하나님 역할도 관두고, 이제 정상인으로 다시 복귀했습니다. 


저녁뉴스 앵커 자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그 자리를 잡지 못하고, 원래 방송 리포터의 자리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복합니다.

“나에게 능력 주시는 분”안에서 모든 것을 감당하며 자족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과의 영원한 동행을 누리며

자족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바로 영화 속의 ‘부루스’ 입니다.

오늘날 모든 것이 (주님 뜻대로 되지 않고) 내 뜻대로만 된다면,

즉 내가 하나님이 된다면, 

나도 절단 나고, 세상도 절단 납니다. 모두가 큰 혼란에 빠집니다.


그러므로 모든 상황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맡기시고,

“Why Me?”가 “Why Me!”가 되는 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들은, 절대 선하시고 인자하시고, 모두에게 공평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일상의 ‘밋밋함의 축복’에 감사해야!

왜 우리는 쉽게, 상황에 좌우되어.. 불만족과 불평에 빠질까요?

어떻게 우리는 “Why me?”가 아닌, “Why me!”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먼저는, 우리의 영적 감각이 무뎌져서

섬세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는 일상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느끼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Why me! (왜 제게 이런 은혜를 주십니까?)


1년간 이라크 파병생활을 마치고 가족들과 함께 오른 모 교회 방문길, (군목?)

2004년 성탄절 이브 날이었습니다.

마침 돌입한 US Airways 항공사의 파업으로

제가 졸지에 Philadelphia에서 연결편이 끊어진 채 발이 묶이고 말았습니다.


저녁 무렵, 기적적으로 보스톤행 비행기에 몸을 실으며   

가슴 깊은 감사가 터져 나왔습니다.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 때 바로 마음에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전에도 비행기 탄 적 많지 않니? 그런데, 왜 그 때는 이렇게 감사하지 않았니?’


정말 그랬습니다. 정시에 출발하고 정시에 도착하는 수많은 비행기를 탔으면서도

제가.. 가슴 깊은 감사는커녕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따져보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전쟁 없이 편안하게 사는 것도.. 너무나 감사할 일입니다.


전쟁터(이라크, 아프간)에서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는 것보다

그런 곳에 아예 가지 않는 것이 얼마나 더 감사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런 하나님의 일상적인 인도하심의 축복에.. 제가 이름을 붙였습니다.

‘밋밋함의 축복 Blessing of the Mundane’ 이라고.


▲문명이 발달하고 삶이 ‘편안 easy’해 질수록,               *not 평안

보통 사람은 누구나.. 고통에 대한 한계점(threshold)은 낮아지기 쉽습니다.


워싱턴DC Metro 역에서 카드충전 자판기가 고장 났다고

자기 분을 참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한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구 반대편 이라크 현지에서 만났던 Zuhair 아저씨,

매일 목숨을 걸고 미군부대로 출퇴근 하면서도

언제나 감사하며 기뻐하던 Assyrian Christian brother의 모습과.. 그 변호사가 대비됩니다.


인생을 오래 사신 어르신들은 체험적으로 증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생활이 편해질수록 대개 참을성이 적어집니다.

오늘날 우리가 겪는 어려움들을 평가절하 하는 것은 아니지만

평균적으로 볼 때,

<선진국 사람들은 제3세계 사람들에 비해 훨씬 나약해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고통에 대한 한계점’이 훨씬 더 낮아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나의 모든 불평과 불만은

하나님이 나를 홀대하셔서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너무 편하니까.. 고통의 한계점이 낮아져서 생긴.. 그런 과분한 불평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때로는.. 내 실존을 뒤흔드는 정말 고통스러운 상황을 만나기도 합니다.

불치병일수도 있고, 경제적인 어려움, 혹은 관계/가정적인 어려움일 수도 있습니다.


저희 집 큰 아이가 5살 때쯤엔가 높은 열에 시달리며 힘들어 할 때

제게 했던 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아빠, 하나님이 왜 나 아프게 해?”


9/11이 일어났을 때, 우리 주변의 많은 미국 친구들이

무고한 희생, 이해할 수 없는 재난이라고 했습니다.


전쟁이나 큰 규모의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우리는 자연적으로 ‘신정론’적인 질문을 하게 됩니다.

즉 ‘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세상에 악을 허용하시나?’ 질문합니다.


전능하고 선하신 하나님이 재앙과 악을 이 세상에 허락하시는 상황은,

인지부조화를 일으킬 최상의 조건이 되는데요...


..................................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설교 ...................................


▲질문 제기 : 어느 암 환자의 불평 ‘Why me? 왜 하필 납니까?’

캐롤Carol Winters은 6년 동안 4가지 각기 다른 암과 싸운 사람입니다.

그녀는 투병생활 초기, 극심한 고통 중에 이런 질문을 했었다고

자신의 책 <When Hope Is Tried>에 서술합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합니까? 나는 십일조도 했고,

교회 유아실 보모도 했고, 주일학교 선생님으로 성경학교에도 참여했고,

목사님 설교말씀을 꼼꼼히 요약하여 실천하기를 힘썼습니다.

만약 질병으로, 삶의 어려움으로 뭔가를 깨달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

저보다 훨씬 덜 영적이고, 덜 헌신적인 다른 사람들이 많이 있잖아요?’


▲답변1. (소극적으로) 인생의 고통은 당연한 것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나보다 더 악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마땅하거나,

덜 성숙하여 하나님의 교훈의 매를 맞아야 할 사람들이 많이 있어 보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종종 영적으로 무지하고 게으르며

도덕적으로도 악한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납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선함”을 주장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과 일대일로 나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면,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악한 존재는 ‘바로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는 로마서3:10의 말씀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경험적으로..

내 스스로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죄의 본성에 사로잡히기 쉬운지 잘 압니다.

(어떤 사람은 ‘언덕 위에 수레’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매일, 매순간 붙잡아주지 않으면, 그냥 나락으로 굴러 떨어져 버립니다.)


죄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누구보다도 나를 더 잘 압니다.

내가 아는 가장 악한 사람은 나 자신입니다.

그래서 누가 내게 이런 말을 할 때, 우리는 적극 항변하지 못 합니다.

‘네가 잘못한 대로 매를 맞았다면, 너는 벌써 하나님께 맞아죽었을 거야.’


(설교 도중 중간에 나가시면 안 되니까) 죄목을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겠지만,

양심적으로 생각해 볼 때 사실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어서 죄인이기도 하지만,

본질상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 Adam 때문에 들어온 죄의 유전성을 깨닫지 못하면

또 다른 한 사람Jesus 때문에 들어온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교리적으로 보나 경험적으로 보나

도저히 선함(Goodness)을 주장할 수 없는 죽어 마땅하고, 망해 마땅한 죄인들입니다.


그러니까 ‘왜 하필 납니까? Why me?’라는 항변이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에 욥과 같은 사람이 새로 나타나서, 그보다 더한 고난을 받더라도,

우리의 죄성과 죄 값으로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심판의 지연’인 셈이지요. 언젠가는 다 치르게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얻어맞고.. 회개하는 사람이 정말 복받은 사람입니다.



▲2. (적극적으로) 십자가 은혜는.. 내 삶에 기쁨을 줍니다. 

그런 우리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게 하는 흔들리지 않는 토대는

다시 말해서 Why me? 에서 Why me!로 바뀔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오늘 본문의)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 분입니다.


빌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십자가의)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내 힘으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그러나 내 실존에 있어 가장 중요한,

죄와 죽음의 문제를 영원히 해결해 주신 예수님의 이 희생의 은혜는,

우리 주변 환경이 어떠함과 상관없이,

영원한 기쁨과 만족과 감사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큰 문제를 은혜로 해결했으니

이제 작은 문제(생활의 문제/풍부와 비천의 문제)는.. 잘 되거나/못 되거나 별 것 아니라는 뜻인 듯..)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믿음의 연륜이 쌓이고 인생 경험이 많아질수록,

더욱 그리스도 중심적, 십자가 중심적Christo-centric, Cross-centric이 되어간다고 합니다.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할 수 있게 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높여드리는 일만이

한결같은 삶의 최우선순위가 됩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그래서 지금도 일부 중국성도들은

예수 믿기 때문에 감옥에 가는 것을 겁내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신정론 神政論’에서 흔히 제기하는 질문인

‘왜 선한 사람에게 나쁜 일들이 일어나는가?’는.. 질문을 바꾸어야 합니다.

‘왜 나 같은 죄인에게,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복음의 은혜를 주셨나?’ 로 바꾸어야 합니다.

 

이렇게 오히려 하나님의 크신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할 일입니다.

그 무슨 억울하고 어려운 일을.. 지금 내가 당했더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물음표(?)는 느낌표(!)로 바뀌게 됩니다.

“Why me?”(왜 나같이 선하게 사는 사람에게 이런 어려움이?)가

“Why me!”(왜 나 같은 죄인에게 상황을 초월하는 십자가의 영원한 은혜가!)로

질문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문제(건강, 돈, 명예, 관계)는, 한 때 해결되어도.. 곧 다시 찾아옵니다.

앞서 인용한 캐롤Carol Winters은 4종류의 암을 극복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녀가 영원히 살까요?

예수님이 직접 다시 살리거나 병을 고친 모든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지금은 살아있지 않습니다.


이 땅의 모든 것들은 아무리 좋아져도.. 결코 참된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그게 진짜 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십자가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입니다.


그분은 단번에 우리의 신정론적인 질문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Why me? → Why me! 로


지금도 세상은, 전쟁과 폭력으로 인간의 죄악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상황 속에서도,

설명할 수 없는 자연재해 가운데서도,

내 삶이 애매히 받는 고난으로 점철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누리는 구원의 은혜/믿음의 사귐은 영원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을 가끔 합니다.


‘내 과거/현재/미래의 죄악들과 죄성을

십자가의 은혜, 때를 따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비추어볼 때,

이제 이후로 나와 내 가정에 큰 어려움이 혹시 닥치더라도,

하나님께 항의할 자격이 내겐 없다.


내게 영원한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은,

내 모든 고통, 심지어 내 죽음까지도

그분의 뜻과 영광을 위해 사용하실 권리가 있으시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만일 그런 상황을 주신다면

분명 나나 혹은 관련된 사람들이 깨달아야 할 사랑의 계획이 있을 것이다.’

 

(주,  설교의 분위기가 너무 우울하고, 비관적이라는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세상에 십자가보다 더 큰 능력은 없고, 십자가보다 더 큰 기적도 없다.

만약에 우리가 십자가보다 더 큰 어떤 은혜(신유/축복/기적/지식 그 외 뭐든지)를 받는 소스가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에게 가장 큰 은혜의 근원source이다.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3. 또 한 가지 통찰력

사실 이 땅의 모든 일들(흥/망/성/쇠, 건강/병듦, 기쁨/슬픔)은

주님과의 영원한 사귐(믿음)이 더욱 넓고 깊어지도록 도와주는

훈련소(Training Ground)입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과의 영원한 동행을 누리며

자족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Why Me?”가 “Why Me!”가 되는 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또한 내 주변에 벌어지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모든 상황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사귐의 비밀을 더욱 깊이 알아가시게 되시기 바랍니다.     ▣ 고난의 신학, 영광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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