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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잠겨 살다 2165

LNCK 2009. 11. 4. 13:40

◈사랑에 잠겨 살다                       요17:20~26                       09.03.29. 설교스크랩



◑예수님의 공생애 원동력.. ‘아버지의 사랑’


▲예수님 기도의 핵심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기도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요17:24절을 주목해 보십시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도,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하여 주시고,

창세전부터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주신 내 영광을,

그들도 보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계신 곳에, 우리가 그분과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갈릴리나 예루살렘 혹은 성전이나

호수 같은 어떤 특정한 장소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두고 하시는 말씀일까요?


▲예수님의 생활환경은 ‘하나님의 사랑 안’

독일어 표현에 ‘Sitz im Leben’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삶의 자리’라는 뜻인데, 영어로는 ‘setting in life’라고 번역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즉, 당신이 살고 계셨던 생활환경과

그분의 삶의 방식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생활환경에서 사셨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은 가난하게 사셨다.

-그분은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사셨다.

-그분은 따돌림 받고 외면당한 사람들과 함께 하셨다.

-그분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사셨다.

-그분은 반대와 미움과 박해를 자초하며 사셨다.


하지만 이 모든 대답은 외형적인 상황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들도 중요합니다만, 예수님은 여기에서 좀 더 본질적인 것을 두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고 가장 근본적으로

성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사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사랑, 그것이 그분이 사신 자리였고 생활환경이었습니다.


즉 요17:24절,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도,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하여 주시고 에서

‘내가 있는 곳’이란.. 다름 아닌 ‘성부 하나님의 사랑의 품안’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우리들도.. 똑같은 곳에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시다.

오늘 본문에만 보더라도 예수님은 그 사실을 두 번씩이나 강조하십니다.

요17:23절에서 그분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26절에서는 또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게 하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확신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우리들도, 그 사랑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공생애의 힘의 근원 .. 하나님의 사랑

우리 시대에 가장 사랑받는 저자 중 한 사람인 헨리 나우웬은    *Henri Nouwen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들으신 하나님의 음성,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좋아한다)는 말씀 안에  *막1:11

예수님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어려운 사역을 잘 감당해 내실 수 있었던 것은

이 음성이 그분의 마음에서 늘 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유혹을 이기고 당신의 길을 갈 수 있었던 힘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분이 인간으로서 당할 수 있는 고난의 가장 깊은 자리까지 갈 수 있었던 힘도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머물러 살았다는 사실에서 나왔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안에!

 


◑적용


▲1. 여기서 우리는 흔히 가지기 쉬운 중대한 오해를 수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생각할 때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많은 시간 기도를 하거나, 힘껏 헌금을 하거나,

교회를 위해 땀 흘려 봉사를 하거나,

어쨌든 무엇이건 간에 ‘뭔가 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무거운 죄책감에 짓눌립니다.

반면, 무엇인가를 한 사람은 자신이 좋은 신앙인이나 된 것처럼 오해합니다.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해 주신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누리며,

그 (사랑)안에 머물러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은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누리며,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먼저입니다. 그것이 본질입니다. 그것이 바탕입니다.


그것 없이는 우리의 모든 희생과 봉사와 경건의 훈련은

결국 우리의 헛된 교만을 쌓거나 무거운 죄책감을 만들어 줄 뿐입니다.


▲한 과학자의 간증

이번 봄철 영성수양회에서 들은 마음 흐뭇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평생을 과학자로 살아온 한 교우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무엇이든 이성으로 납득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입니다.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분을 찾아왔지만,

교리와 이성 사이에서 그리고 믿음과 과학 사이에서 포로가 되어,

영적 생활에 별 진전이 없이 교회를 다니셨습니다.


다행히, 최근에 와서 그분은 교리에 붙들리지 않고도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믿고 살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과학과 이성을 부정하지 않고도 믿는 길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점차 하나님께 마음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설거지를 하는데,

환한 햇살이 싱크대 앞 창문을 통해 자신에게 내려 비추었습니다.

그 때 그분에게 섬광처럼 스치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 하나님의 사랑이 이 햇살처럼 내 삶을 비추어 왔는데, 내가 그것을 몰랐구나!’

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분은 수양회 내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멋쩍으시었던지,

‘아니, 왜 이렇게 눈물이 계속 나오는지 모르겠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눈물이 의미 깊은 눈물이라고 느꼈습니다.


저와 따로 만나는 시간에 그분은, 제 마음을 찡하게 하는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제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진작 알았더라면, 제 삶이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이 좋은 것을 제가 너무 늦게 알았네요."


저는, "아니, 그동안에도 많은 이들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해 오셨는데,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아니에요. 이제껏 살아온 제 인생은, 다 제 자신을 위한 몸부림이었지요."


그럴 리가 없을 것입니다. 잘은 모르지만,

그분은 지금까지의 인생을 살아오시면서 직업을 통해

그리고 개인적인 삶을 통해 많은 이들을 도와 오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는 한 가지 진실을 확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 그것이 신앙의 출발이요, 핵심이며, 바탕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니, 어쩌면 신앙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버나드 로너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Bernard Lonergan

"모든 종교 체험의 뿌리는 무조건, 무제한의 사랑을 받는 체험이다."


▲2. 현대의 정신분석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증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이.. 삶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대부분의 심리적인 질병은.. 사랑의 결핍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내면의 상처들은 대부분은.. 사랑으로만 치료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만이.. 인간을 인간되게 한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고된 인생을 견디게 하는 힘도.. 사랑이며,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도 두렵게 느끼지 않도록 만드는 유일한 힘도.. 사랑입니다.


▲3. 우리의 인생은 정확히 말해 ‘사랑을 찾아 헤매는 소풍’입니다.

어릴 때는 부모로부터 이 사랑을 구합니다.

형제자매에게서 이 사랑을 찾기도 합니다.

조금 성장하면 친구들로부터 혹은 선생님으로부터 이 사랑을 찾습니다.

더 자라면 연인에게서 이 사랑을 찾습니다.

나중에는 자식에게서 사랑을 찾습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닮은 것 하나라도 찾고 경험한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가족 심지어 배우자로부터도.. 참 사랑은 좀처럼 찾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안에 거하는 사람은, 절대 세상의 사랑/가족의 사랑에.. 배고파 하지 않습니다.


▲4. 우리 시대는 온전한 사랑을 경험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부부 사이에서 사랑은.. 더 이상 가장 중요한 가치가 아닙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사랑은.. 제일 중요한 자리를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많은 경우, 현대 가정은.. 더 이상 사랑이 나누어지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사랑 대신에 경쟁이 있고,

사랑 대신에 자기중심적인 요구와 갈등이 있습니다.

친구들 사이에도 사랑보다는.. 서로 앞서려는 경쟁이 미덕으로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경쟁에는 잘 길들여졌지만 사랑하는 일에는 낯설고 서툽니다.

그것이 현대 문화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참된 사랑이 나누어지는 가정에서 살고 있고,

진정한 우정과 사귐이 있는 직장에서 일하고 있으며,

자신을 진실로 이해하고 언제나 함께 있어줄 친구가 있다면,

그렇다면 여러분은 특별한 축복을 받은 분입니다.

그것은 아주 보기 드문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시대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더욱 절실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어떤 사랑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한 것이기에,

그 사랑을 경험하고 나면, 다른 사랑의 결핍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참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고 자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나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 이게 바로 내가 찾던 그것이다! 이것만 있으면 아무 상관없다."


자라면서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나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 그 동안 내가 받은 사랑은, 이 사랑을 알아보도록 나를 훈련시킨 것이로구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있으면, 우리는 더 이상 외롭지 않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내 마음 안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내면의 공간이 아무리 크고 넓어도

그분의 사랑은 그 모든 것을 채우고도 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있으면, 우리는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이유는 사랑을 잃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며,

그 무엇도 이 사랑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면

우리는 모든 두려움을 벗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요일4:10

 

▲5. 사랑은.. 대가를 치르는 것이 아깝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자리를 틀고 그 안에 머물러 살면,

우리의 삶의 방식이 달라집니다.


저는 지난주일 설교에서 세상 안에 살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기 위해서

‘제자 됨의 값’을 치르자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 설교에 대해 많은 교우들이

"참으로 옳은 말씀이지만, 또한 참으로 어려운 말씀입니다"라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도 어렵습니다. 모두에게 어렵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있으면 그 모든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을 위해 무슨 일이든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을 위해 사용하는 돈이 아깝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위한 희생이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연인의 경우도 그렇고, 부모님의 경우도 그렇고, 자녀들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친구를 사랑하면 그를 위한 희생이 아깝지 않습니다.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치룰 값이 크고 감당해야 할 희생이 무겁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하다는 데 있습니다.


▲6. 사랑 안에 생명/영생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서의 핵심 메시지를 ‘생명의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정확한 이름입니다.

이 복음서는 참된 생명이 어디에 있으며,

그 생명을 누리며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참된 생명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진실로 살았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영원하신 하나님과 잇대어 살고 있음을 확신하게 해 주는 것도..

그분의 사랑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지치지 않고 신나게 살도록 만드는 힘은.. 오직 그분의 사랑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 그리고 그분의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뿐입니다. 요한복음은 바로 그 사랑을 증언합니다.


▲7. 이 사랑을 받고 이 사랑 안에서 살면 우리의 삶은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나면 더 이상 과거와 동일하게 살 수 없습니다.

억지로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이 나를 변화시키고 나의 길을 바꾸어 줍니다.

삶의 방식이 저절로 달라집니다.


부모의 사랑을 모르던 자식이 그 사랑을 깨닫고 나면

부모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배우자가 자신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으면,

배우자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사랑만이 우리를 진실로 변화시킵니다. 사랑이 참될수록 변화는 참됩니다.

사랑이 진할수록 변화는 진해집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웅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보혈을 통해서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생명입니다. 그 사랑이 희망입니다.

그 사랑이 전부입니다. 그 사랑에 잠기면 됩니다.

그 사랑을 알면 됩니다. 그 사랑에 취하면 됩니다.

그 사랑이 우리 마음 안에 살아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다 됩니다.


그 사랑이 내 속에 있으면

이 세상 안에 살면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값을 기쁘게 치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답은 그 사랑을 체험하고,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사는 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 하나님을 알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늘 사귀며 살아가는 삶에 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보다 더 큰 은혜를 사모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은 없습니다.

지식이든지, 예언이든지, 기적이든지, 축복이든지.. (그것이 내게 은혜를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십자가보다 더 큰 은혜를 주고, 더 큰 사랑을 준다면..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가장 큰 은혜, 가장 큰 사랑을.. 오직 십자가에서만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의 정도를 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은혜를.., 십자가를 떠나서, 다른 데서 구하지 마십시오.

십자가의 은혜는..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는데서.. 얻어집니다. ↙


그렇다면 그 사랑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습니까?

그 사랑을 어떻게 체험할 수 있습니까? 불행하게도, 여기에는 공식이 없습니다.

법칙이 없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드립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열망을 마음에 불 지핍시다.   

굳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참된 사랑, 영원한 사랑, 사람들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사랑을

간절히 열망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랑은 없다!"고 단정하지 마십시오. 참되고 영원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을 마음으로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그 사랑이 여러분을 찾아 올 것입니다.

어느 날 문득 쏟아지는 햇살을 통해, 혹은 호수에 반사되는 반짝이는 빛을 통해

혹은 품에 안은 손녀, 손자의 숨소리를 통해 찾아 올 것입니다.


둘째, 십자가를 바라보십시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 가운데 가장 분명한 사랑의 증거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중에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도록 도와줍니다.

십자가는 능력입니다.


그 위에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사랑이 내 마음을 칠 때가지 십자가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분명코 그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점령할 것입니다.



▲성령에 감동받은 찬양시를 소개해 드립니다.

반주자 최상옥 권사께서 봉헌 찬양을 하셨습니다.

그 찬양은 최상옥 권사님이,

몇 년 전에 성령의 감동에 이끌려 작사하고 작곡한 찬양이었습니다.


부활절을 몇 주일 앞 둔 주일,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눈에 들어오는 봄꽃들이 너무나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그분은 운전을 하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당신이 지으신 이 세계가 너무 아름답네요!"


그러자 마음에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그래? 하지만 정말 아름다운 것은 따로 있다."


그분은 "하나님, 그게 무엇인가요?"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마음의 음성이 답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내 몸이다. 내 손과 발과 입술이다."


그 순간, 그분에게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이 드러났고,

그 사랑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립니다.

그분의 마음에는 마치 오래 전에 외웠던 시가 생각나듯 시상이 쏟아지고

멜로디가 터져 나왔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분은 그 시를 받아 적었고, 곡을 악보에 옮겼습니다.

그리고 혼자 그 찬양을 연주하고 부르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잠겨 있었다고 합니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원래 가사는 영어로 쓰였는데, 설교자가 우리말로 번역했습니다.

번역 과정에서 원래의 시상을 손상시키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눈 먼 사람의 눈을 만져 보게 한 그 손은 아름답습니다.

나병 환자의 피부를 만져 치유하신 그 손은 아름답습니다.

열 두 제자의 발을 씻으신 그 손은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제게 제일 아름다운 손은 따로 있습니다.


Those hands that touched the blind and gave them sight were beautiful,

Those hands that touched the leper’s skins and heal them were beautiful,

Those hands that washed the feet of the twelve were beautiful

And yet they were not the most beautiful to me.


약한 사람들을 긍휼히 보신 그 눈은 아름답습니다.

악한 마음을 사랑으로 보신 그 눈은 아름답습니다.

사랑 때문에 눈물을 흘리신 그 눈은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제게 가장 아름다운 눈은 따로 있습니다.


Those eyes with such compassion on the weak were beautiful,

Those eyes that saw the wicked heart with love were beautiful

Those eyes that cried the tears because of love were beautiful,

And yet they were not the most beautiful to me.


진리와 빛에 대해 말씀하신 그 입술은 아름답습니다.

어린 아이들과 홀어미들을 축복하신 그 입술은 아름답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시고 영혼을 치유하신 그 입술은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제게 가장 아름다운 입술은 따로 있습니다.


Those lips that spoke of truth and of light were beautiful,

Those lips that blessed the little ones and widows were beautiful,

Those lips that drove out demons and restored spirits were beautiful,

And yet they were not the most beautiful to me.


가장 아름다운 손은 십자가에 못 박힌 손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눈은 십자가에서 내려다보시는 눈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입술은 십자가 위에서 침묵하신 입술입니다.

이것이 제게는 가장 아름답습니다.


The most beautiful hands are those that toop the nails on the cross,

The most beautiful eyes are those that looked down from the cross,

The most beautiful lips are those that uttered nothing on the cross,

Those are the most beautiful to me.


진실로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손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시는 그 깊은 눈만큼 아름다운 눈은 없습니다.

핏빛으로 물든 그분의 메마른 입술만큼 아름다운 입술은 없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사랑처럼 아름다운 것은 따로 없습니다.

인간의 불완전한 사랑도 그러하다면,

십자가 위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완전하고 영원한 사랑은 얼마나 더 그렇겠습니까?                   ▣ 사 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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