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09

아침을 빚고 계시는 하나님 2170

LNCK 2009. 11. 6. 21:17

◈아침을 빚고 계시는 하나님             시편130:1~8           09.06.28.설교스크랩


 

◑1.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 기도


“바닥을 치다!”(to hit the bottom)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영어에서는 “돌바닥을 치다”(to hit the rock bottom)라고 표현되곤 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 일어나는 현상을 비유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에 빠져서 몸이 속절없이 가라앉을 때, 절망감이 압도합니다.

‘이렇게 죽는가보다!’라고 생각하는데, 발끝에 무엇이 걸립니다. 돌바닥입니다.

‘이젠 됐다!’ 싶어 그 바닥에 발을 딛고 힘껏 몸을 솟구칩니다.

살 희망이 생긴 것입니다. 그것이 바닥을 치는 경험입니다.


건강의 문제, 관계의 문제, 재정적인 문제, 자녀의 문제 등이 삶을 짓누를 때,

우리는 무력하게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듯한 느낌에 압도당합니다.

때로는 꿈에서 그런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합니다.

‘바닥은 언제쯤 나올까? 과연 바닥은 있는 것일까?’


오늘 읽은 시편 130편이 바로 그런 경험 가운데 씌어진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1절이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주님, 내가 깊은 물 속에서 주님을 불렀습니다.

Out of the depths, I cry to you, Lord!


이것을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이렇게 번역합니다.

Help, GOD! the bottom has fallen out of my life!

‘하나님, 도우소서. 바닥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깊이 빠져도 바닥이 닿지 않는 것 같은 느낌, 

혹은 발을 딛고 선 바닥이 갑자기 허물어 내리는 느낌, 

그것이 시편 130편의 저자가 느끼는 절망감입니다.


◑2. ‘건너편’에 희망은 반드시 있습니다. 단, 믿음의 눈으로만 보입니다.


지난 주, 정말 ‘깊은 곳에’ 빠져 있는 제 친구 소식을 들었습니다.

청소년 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인데, 교회에서 저와 중고등부 생활을 같이 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신학교를 나와서, 같이 목사가 되었는데,

얼마 전, 건강 문제로 목회직을 휴직했다 하여, 그의 근황이 궁금했던 터였습니다.


친구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유전적인 질환으로 인해

몸의 근육이 점차로 약화되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현재로는 치료 방법이 없답니다.


설상가상으로, 얼마 전에 그 친구의 막내 동생에게도 똑같은 병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 병은 여성에게는 발병이 되지 않고, 남성에게만 40대 이후에 발병한다고 합니다.


3형제 중에 두 형제가 이유도 알 수 없고, 치료법도 없는 병에 걸려 버렸습니다.

속수무책으로 점점 약해지다가 ‘떠나는’ 병입니다.

‘아, 인생이 이렇게 잔인할 수가 있는가요!’


생각해 보니, 이 병이야말로 ‘밑바닥이 없는 병’입니다.

살기 위해 몸부림 쳐 볼 여지가 없습니다.

몸을 혹사해서 자초한 병도 아니요, 무슨 죄를 범하여 생긴 병도 아닙니다.

유전적인 요인 때문에 애꿎게 당하는 질병입니다.

나에게서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자녀들 중에 또 누구에게 언제 발병할지 모릅니다.


도대체 이렇게 황당하고 부당하고 억울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요즈음 이 형제들에 대해 기도할 때마다 마음이 아립니다.

끝도 없이 내려가는 ‘바닥없는 구덩이’에 빠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희망을 찾아야 하는지,

직접 당하지 않은 저로서는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당사자는 얼마나 더 할까?’ 싶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사자는 오히려 그 가운데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니, 그를 위한 기도에 힘이 실렸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오랜 만에 전화를 통해 듣는 그의 목소리는

의외로 평안하게 느껴졌습니다. 한결 위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 같은 상황에서 어떤 희망이 있을 수 있을까요?

죽은 사람도 살리셨던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기적적으로 치료해 주실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 기적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런 기적적인 치유가 오늘도 일어나고 있음을 알고 있고,

또한 그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흔히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기적적 치유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다른 무슨 희망이 있을까요?

어쩔 수 없이, 그 희망은 ‘현세’와 ‘육신’과 ‘이생’의 건너편에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는 바닥도 없는 구덩이에 속절없이 빠져 버렸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힘입어

영원한 복락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희망, 말입니다.


     ▲자, 이 대목에서 “아멘!”으로 응답하고 싶은 분도 계시겠지만,

    정반대의 느낌을 가지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결국, 당신도 그렇게 쉽고 빤한 대답으로 문제를 얼버무리는군요.

    그것이 기독교의 한계지요!’

    ‘그러니까 종교는 마약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반응하는 분들에게는 실상 유구무언입니다. (제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육신의 눈을 감고, 영의 눈을 떠 보지 않고는

실상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에 눈을 뜨고 보면, 이 땅이 전부가 아니며,

이 육신이 전부가 아니고, 현세가 전부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것 모두를 포함하지만, 또한 그것 모두를 초월하는 세계가 있으며,

그러한 존재가 있고, 그러한 삶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을 소망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을 말로 설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오직 체험한 사람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천국을 바라보면, 현세가 다르게(똑바로) 보입니다.


저는 제 친구가, 그리고 그 가족 모두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굳게 붙들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굳게 붙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달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미래를 믿음 안에서 희망하게 되면,

지금 우리가 처한 현재가 달라 보입니다.

무엇이 영원하고, 무엇이 덧없는 것인지 알게 됩니다.

진실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고,

겉으로는 가치 있어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깨닫습니다.


거짓된 기쁨이 무엇이고,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로소 지금, 이곳에서, 나에게, 주어진 생명을 감사히 여기고,

순간 순간을 기뻐할 수 있으며, 그 삶 속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대단한 역설입니다. 저 세상에 눈을 떠야 이 세상이 제대로 보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눈 떠야.. 지금 내게 있는 목숨이 제대로 보입니다.


영원에 눈 떠야 순간의 값을 알고 촌음을 아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세상에서 살면서 참된 희망을 얻으려면,

하나님에 대해 눈을 떠야 합니다.


건강해지는 것도 필요하고,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어느 정도는 필요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가져다주는 희망은 며칠 가지 못하며,

우리 삶에 깊은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그저 조금 더 편리해질 뿐입니다.


전보다 편리해졌다고 전보다 행복 지수가 높아집니까?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에 대해 눈을 뜰 때,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 생명을 경험할 때,

오직 그 때에만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희망을 찾을 수 있고,

그런 희망만이 우리의 삶을 속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줍니다.


지금 ‘바닥이 없는 수렁’으로 빠져가고 있는 제 친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싶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눈 뜨고,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 생명을 누림으로써, 목숨보다 더 큰 생명을 소망하고,

이 세상보다 더 큰 나라를 소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릴 때부터 믿음이 좋은 친구였으니, 그럴 줄로 믿습니다.

그 믿음이 분명하다면, 제 친구는 앞날에 대한 두려움을 하나님께 맡겨 놓고,

살아있는 동안, 매일 ‘오늘’이라고 하는 날이 주어졌을 때,

하루 동안의 행복을 누리며, 그 안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제 친구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제 친구처럼 ‘밑바닥 없는 수렁’에 빠져 있는 분들에게도 이 믿음이 필요하고,

분명히 바닥은 있는데, 언제 그 바닥이 나타날지 몰라 두려워하는 분들에게도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믿음은.. 평탄한 곳에 서 있는 분들이나, 높은 곳에 서 있는 분들에게도 필요합니다.

어려움을 당해도 이 믿음이 있으면, 그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며,

평탄하고 번영할 때 이 믿음이 있으면, 교만해지거나 타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데일 카아네기가 말했듯이, 인간은 고난보다 번영을 이겨내기가 더 어려운 법입니다.


그러므로 깊은 물에 빠졌을 때나 흔들리지 않는 바위 위에 서 있을 때나,

우리는 늘 주님을 바라보고 그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은 어려울 때에만 부르고, 형편이 나아지면 잊는 이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지속적으로, 시시때때로 그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시130:1~2


▲평소에 주님과 깊은 사귐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어려울 때 그 이름을 기억하고 그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시편 130편을 쓴 기도자는 분명 평소에

꾸준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저의 경험 상 그렇습니다. 평소에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나누지 못한 사람은

어려움에 처해서도 참된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물론, 평소에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나누지 않은 사람도

어려움에 빠져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분께 다급한 기도를 드립니다.

하지만 그것은 참된 믿음의 기도가 아닙니다.

절박하니까 부르짖는 비명일 뿐입니다.


그 위기가 지나가는 순간, 그 사람은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셨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운이 좋았거나 상황이 달라진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늘 하나님과 사귐을 나누는 사람은 어려움에 직면하여 흔들리지 않습니다.

진실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붙들고 있음을 믿으며, 그 손으로 결국 구원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4. 내가 깊은 곳에서.. 주님을 기다림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시130:5~6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진실하게 그분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어려움에 직면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안절부절하는 기다림입니다.

그 사람이 올지 안 올지 몰라서, 혹은 그 일이 이루어질지 어떨지 몰라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기다림입니다.


마치, 아빠 차를 몰고 나간 아이가, 밤 늦은 시각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을 때,

집 안을 서성대며 아이를 기다리는 엄마의 기다림과 같은 것입니다.

불안한 기다림입니다. 앞으로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런 확신이 없습니다.


또 다른 기다림은 평안한 기다림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기다림이 아니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분명히 아는 사람의 기다림입니다.

이런 기다림은 우리의 삶을 불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안정시켜 줍니다.

결국 올 것이 올 줄로 믿고, 그 때를 기다리며, 주어진 일에 전심하게 만들어 줍니다.


밤늦게 자식이 돌아오지 않더라도,

그 아이를 믿는 부모라면 편안히 잠자리에 들 수 있습니다.

출장을 간 남편이 기약한 날짜에 올 것을 믿는 아내는

그 동안 자신의 일에 전념할 수 있습니다.


깊은 물에 빠진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의 행동을 기다릴 때,

그 기다림은 두 번째의 기다림, 즉 평안한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평소의 사귐을 통해 체험했기 때문에

그분이 구원해 주실 것을 압니다. 그것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든든히/평안히 기다릴 수 있습니다.


기도자는, 주님을 기다리면서, 먼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죄를 지켜보고 계시면,

주님 앞에 누가 감히 맞설 수 있겠습니까?

용서는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므로,

우리가 주님만을 경외합니다. (3-4절)

……

이스라엘아,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주님께만 인자하심이 있고

속량하시는 큰 능력은, 그에게만 있다.

오직, 주님만이 이스라엘을

모든 죄에서 속량하신다. (7-8절)


믿는 사람들은 어려움에 빠지면 거의 본능적으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혹시, 내가 무슨 큰 죄를 지어서 이런 벌을 받는 것은 아닐까?’

그럴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경제적인 문제나, 질병, 혹은 관계에 큰 문제가 생길 때,

먼저 하나님 앞에 잠잠히 앉아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는 것은 아주 지혜로운 일입니다.

혹시나 자신의 죄로 인해 환난을 얻은 것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일단 진실하게 회개하고 나면,

하나님의 자비를 믿고,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의 구원을 바라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샅샅이 조사하여 벌 줄 구실을 찾는 분이 아니라,

자비와 긍휼로 우리를 살피시고 돌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설사, 벌을 주시더라도 그 벌은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진 뜻은, 재앙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그런 분을 믿고 기다리기에 우리는 어려움에 직면하여

우왕좌왕하거나 서성이며 시간을 보내지 않습니다.


때로 우리가 당한 어려움이 기대 밖으로 길어지기도 합니다.

때로 우리를 에워싼 어둠이 더욱 짙어지기만 합니다.

때로 우리를 위협하는 질병이 더욱 심해지기만 합니다.

때로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엉킨 문제들이 더욱 엉클어져 갑니다.


‘언제든 바닥에 닿겠지!’ 기대했는데, 한 없이 빠져 들어가는 기분입니다.

도대체 출구가 없어 보입니다. 다른 방도가 없어 보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시편의 기도처럼 절박하게 기도하게 됩니다.


내가 주님을 기다린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며

내가 주님의 말씀만을 바란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림이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하다.

진실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하다. (5-6절)


저도 군에서 파수를 본 적이 있습니다.

임진강 초소에서 ‘쩌렁 쩌렁’ 얼음 깨지는 소리를 들어가며,

밤을 새워 보초를 서 본 적이 있습니다.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졸음과 싸워가며, 밤 새워 보초를 서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압니다.

밤 새워 보초를 설 때, 어슴프레 동 터 오는 순간이 얼마나 간절히 기다려졌던지요!

 

하나님의 구원은, 아침이 오는 것만큼이나 분명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시계를 정지시켜도, 어김없이 아침은 찾아옵니다.

문제는 동이 틀 때까지 우리가 버티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내가 깊은 곳에 빠져 들어가면서, 혹은 바닥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어려움에 봉착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침이 오듯, 하나님의 구원은 반드시 옵니다.


저도 자식을 키우는 아비로서 그럴 때가 있습니다.

자식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뻔히 보고 있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저에게는 그 아이를 구해 줄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그래서 때로는 모른 체 하고, 그 아이 스스로 그 어려움과 싸워 이기기를

기도하며 기다립니다.

그러는 아비의 마음이 때로 더 아프지만, 그 아픔을 견디고 버텨야만 함을 압니다.


◑5. 아침은 이미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천둥과 번개가 심한 어느 날 밤, 아이가 한 밤 중에 일어나 엄마 방으로 찾아옵니다.

무서움에 질려 엄마 품에 안긴 아이가 엄마에게 묻습니다.

“엄마, 하나님은 뭐하시기에 이렇게 시끄럽게 그냥 두시는 거야?”

엄마가 아이를 꼭 안아 주면서 대답합니다.

“그래, 지금 하나님이 아침을 만들고 계신단다.”


그렇습니다. 새벽이 되면 짙은 어둠이 점점 사라지고

드디어 불덩이 같은 태양이 떠오릅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침이 드디어 밝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침은 그 순간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간절히 아침을 기다리는 동안,

그 지루하고 힘겨운 기간 동안, 아침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요란한 밤에도, 아침은 저벅 저벅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겪는 질병이나 환난이나 고난이 다 지나고 나면,

그제야 “하나님의 구원이 드디어 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아침에 태양이 우리 눈에 보이는 순간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 순간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나를 향해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어둠의 깊은 터널 안에 있을 그 때에도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은 나를 향해 움직이고 계셨습니다.

내가 바닥도 없어 보이는 수렁으로 빠져 들어갈 때에도,

그래서 아무런 소망도 없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하나님은 나의 구원을 위해 무엇인가 하고 계셨습니다.


바로 이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어둠이 가장 짙어질 시간에 조차,

아침은 나를 향해 견고한 발걸음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믿는 믿음, 말입니다.


모두가 아무 희망이 없다고 할 때조차,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구원을 행하고 계시다고 믿는 믿음, 말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 같고, 하나님이 나에게 무관심해 보이는 것 같고,

하나님이 나를 건지기에 무능해 보이는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구원하기 위해 일하고 계신다는 믿음, 말입니다.

이것이 ‘깊은 곳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시편130편을 암송하거나, 찬송가 479장을 조용히 불러봅시다. 


내가 깊은 곳에서  주를 불러 아뢰니

주여 나의 간구를  들어 주심 바라고

보좌 앞에 나가니  은혜 내려 주소서


주가 죄를 살피면  누가 능히 서리요

오직 주만 모든죄  용서 하여 주시니

주님 앞에 떨면서  용서 하심 빕니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고 바라듯

나의영혼 주님만  간절하게 바라네

이스라엘 백성아  주를 바라 보아라                                                           ▣ 기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