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09

신앙이란.. 내가 예수님께 적응해 가는 것 2174

LNCK 2009. 11. 9. 22:07

◈신앙이란.. 내가 예수님께 적응해 가는 것          눅8:40~56        09.10.18.인터넷설교 녹취/정리

                                                                                                  *원제목 :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1. 예수님이 사람 대하는 방식


본문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이다.


▲예수님의 관심은 언제나 <개인적>이시다.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눅8:40~41

 

‘무리가 환영하니..’

이렇게 마을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예수님을 환영했는데,

예수님은 야이로 라는 한 사람에게 집중하고 계셨다.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대중에게 관심을 가지시면서

어떤 대중적인 인기몰이랄까, 어떤 대중적인 호소를 하시고,

대중들 앞에서, 모든 사람들의 일치된 지지를 얻으시려고

시도하시거나 애쓰신 적이 한 번도 없으셨다.


우리가 이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복음서를 아무리 살펴봐도,

예수께서 대중들의 공통된 지지와 인정을 받으려고

어떻게 (쉽게 말하면 정치적 행보 같은 것을) 시도하신 적이 없으시다.


예수님 주변에는 많은 군중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항상 한 영혼에만 집중되어 있으었다.   :41

이 부분은, 오늘 우리가 정말 진지하게 묵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말의 뜻은, 한 영혼 외에는, ‘군중에게는 관심 없다.

군중은 다 그렇고 그런 사람들로 취급하신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다만 한 영혼,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신다는 뜻이며,


(그렇게 한 영혼,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시는 것이..

결국은 군중을 귀하게 여기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감정이입의 효과라고 할까? 비록 내가 예수님의 손을 붙잡지 못 했더라도

내 동료가 붙잡은 것이, 꼭 내가 붙잡은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필립 얀시리처드 포스트의 최근 일화

그래서 오늘날에도, 정말 예수님을 닮은 분들의 특징은,

한 사람, 한 사람으로 하여금

‘저 분이 나를 매우 특별하게 대해 주신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제(설교자)가 지난 주간09년10월에, 어떤 캐나다 교포로부터 상담전화를 받았다.

제가 ‘그런 문제를 위해서 꼭 기도해 드리겠다.’고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 날 제가, 그 교포 성도가 살고 있는,

캐나다 터론토에서 사역하는 친구 목사에게 전화를 해서,

그 성도의 문제를 위해, 그가 직접 만나서, 어떤 위로와 도움 주기를 바랬다.


그런데 전화를 걸어보니, 제 친구 목사가 한국에 들어와 있었다.

친구는 마침, 필립 얀시리처드 포스트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영성훈련 세미나 장소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가평 필그림 하우스

(두 분은, 영성세미나 강사로 초청받아, 방한 중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제가 그 친구 목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자기가 그렇게 자동차에서 나와 통화하고 난 후에,

이 세계적인 대가 두 분, 필립 얀시와 리처드 포스트가

자기에게, 통화 내용을 물어보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터론토에 살고 있는 어떤 성도가 이렇고 저렇고...’ 간단히 설명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 두 분의 대가들이, 그 내용을 듣는 즉시

자기들의 수첩을 꺼내어, 그 내용을 적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즉시 ‘기도합시다!’ 하더니

‘간절히’ 그 성도의 문제를 위해서 기도해 주더라는 것이다.

가평 영성훈련 세미나 장소로 이동하던 차안에서 벌어진 일이다.


친구목사로 부터, 그 얘기를 전해 듣고, 제 마음이 굉장히 감격했다.

정말 하나님께 가까이 간 사람은,

누군가를.. 마치 그 한 영혼만 상대하는 듯이 (정성껏) 대하는 사람이다.


모든 사람을 집단적으로 우루루 대하면서

뭔가 세력을 모으는.. 그런 식의 대인관계를 맺지 않는다.


예수님은, 포퓰리즘(대중인기) 식으로 사람들을 대하지 않으셨다.

결코 사람을 'N분의 1'로 대하지 않으셨다.                                                      *수학용어

대신에, 한 사람을, 천하보다 귀한 영혼으로 존귀하게 보셨다.


여러분, 오늘날 세계 기독교 인구가 20억 명이라 가정하자.

그러면 주님이 나를 ‘20억분의 1’로 대하지 않으신다.                            *1/20억, 수학의 분수

아니, 주님은 나를, 마치 나 한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 대해 주신다.


신약성경 전체가 다 그렇지만,

특히 오늘 본문, ‘예수님이 야이로를 대하는 방식’,

또한 그 중간에 갑자기 끼어든 ‘혈루병 여인을 대하는 방식’이 그렇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도, 그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더 테레사가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도 마찬가지였다. 註1)

오직 그 사람만, 지금 내 앞에 있는 듯이, 정성스럽게 대하는 것이다.



◑2. 신앙이란.. 내가 예수님께 적응해 가는 것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이 자기 집에 좀 와 주셨으면..’ 하고 요청했다.

이유는 12살 된 자기 외동딸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딸이 죽어가는 조급한 야이로에게, 속 터지는 일들이 계속 생기고 있다.

야이로는 너무 다급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1초가 길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반대로, 너무 느긋하시다. 볼 일을 다 보고 계신다. 속 터지게..


    이는 자기에게 12살 먹은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밀려들더라. (개역, 옹위하더라)    8:42


지금 야이로의 집으로 급하게 달려가도 시원찮은 상황에,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려들어서.. 갈 길을 계속 방해하고 있다.


혹시 해산하는 아내를 차에 태웠는데, 러시아워에 도로가 막혔다든지..

애가 놀다가 다쳐서 머리가 깨져서 피가 솟구치는데, 응급차가 늦게 온다든지..

지금 야이로가 바로 그런, 입술이 바짝 바짝 타들어가는, 심정이었다.

촌각을 다투는 시간에.. 무리들이 밀려들어서.. 길을 막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혈루증 여자가 예수님을 붙잡은 것이다.

이 여자는 12년 동안 혈루증에 걸려있던 여인이었다.

그렇다면 그 다음 날, 하루 늦게 치료 받으면 되지 않는가?

12년 동안이나 그렇게 살아 왔는데, 하루 더 지난다고 어디가 덧나나?


그래서 야이로 생각에는, 예수님이 마땅히 이렇게 말씀하셔야 했다.

‘지금 야이로의 딸이 죽어 가는데.. 여인이여, 미안하지만 좀 기다리시게!

그리고 내일 꼭 만납시다!’

이렇게 약속 정하고, 그 여인과는 빨리 헤어지셔야 했다.


그게 아니면, ‘여인이여, 지금 급한 길을 하고 있으니까, 나를 따라 오시게.

내가 야이로 건을 먼저 접수했고, 거기가 위급하니까, 거기를 일단 해결하고,

그 다음에 당신을 치료해 줄 터이니. 그러니 지금 나를 막지 말고, 뒤따라와요!’

이렇게 여인이 나타난 돌발 상황을 재빨리 수습하고, 민첩하게 가셔야 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다급한 길을 멈추어 서셔서,

마치 이 혈루증 여인이 굉장히 다급한 상황인 것처럼

길에서 이 여인을 상대해 주고 계시다는 점이다.

‘어휴, 속 터져!’ 야이로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을 것이다.

지금 예수님 바로 곁에 있는 야이로의 타들어가는 마음을, 한 번 상상해 보시라...


▲여기서 성경이 주는 어떤 메시지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 상황을 그리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은가?


굉장히 조급할 수밖에 없는 야이로의 상황과

그 상황을 모두 아심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조급해 하지 않으신 예수님!

그 사이에서, 우리가 무엇을 깨달으라고

성경이 우리에게 지금 이 본문을 들이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아무리 위급한 상황을 만나더라도

    서두르거나 당황하지 말라는 것이다. 마음의 평정과 평상심을 유지하면서 일을 처리하라는 것이다.

    신앙이 깊어질 수록.. 그런 예수님께, (조급한) 내가 점점 적응해 가는 것이다. 


야이로는 지극히 전형적인 우리들의 모습이다.

지금 야이로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두려움, 불안, 지독한 쫓김’ 등이다.

우리도, 자기 딸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누구나 똑같이 그럴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런 조급함에는 조금도 아랑 곳 없다는 듯

오직 자신의 페이스pace에 따라서 차근차근 움직이고 계신다.                  *걷는 속도

마치 옆에 있는 야이로의 급한 사정에는.. 거의 관심이 없으신 듯 하다.


▲신앙생활은.. 바로 이런 예수님께, 내가 적응해 가는 과정이다. ★

인생의 초보자, 신앙여정의 초행길을 가는 우리들은,

가이드가 되시는 예수님께, 내가 조심조심 적응해 나가야 한다.

지금 본문의 야이로가 그렇고, 야이로가 뜻하는 ‘나’도 그렇고

신앙이란.. 내가 예수님께 적응하고, 맞춰 나가는 과정이다.


여러분, 저는 제 자신에게 늘 다짐하는 것이 있는데

‘프로처럼 살지 말자’는 것이다.                                                       *professional, 전문가


물론 다른 상황에서는, 우리가 정말 전문가적으로 프로처럼 살아야 하지만,

이 말의 뜻을, 여러분이 잘 아실 것이다.

너무 매너리즘에 빠져서, 틀에 박힌 듯이 고자세로 살지 말아야겠다는 것이다.


특별히 우리가 대하는 매일은.. 매일 마다 새롭게 주어지는 것이다.

오늘 내가 사는 하루는, 이전에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새로운 하루이다.

그런 하루를, 마치 내가 수 십 년 살아왔으니, 익숙한 것처럼

그렇게 고리타분하고, 무덤덤하고, 지루하게 살지 말자는 것이다.


마치 외국에서 10년 살다가, 한국 땅을 처음 밟았을 때,

그 때 그 감격적인 느낌으로, 매일을 새롭게 살자는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우리에게는 자동차 라이센스는 있어도, 인생의 라이센스는 없다’고..                 *면허증  

우리 중에 그 누구도, 마치 인생에 대해 ‘유능한 경력운전자’처럼

그렇게 자신 있고, 당당하게 인생의 자동차를 몰고 갈 사람은 없다.

그랬다가는 필연적으로 대형사고가 날 것이다.


더욱이 매일 주어지는 새 날과, 새 미래는

우리가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초행길’을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두가 조심조심해서 운전해 가야 하는 길이.. 우리 인생길이다.


▲우리는 인생의 무면허자

한 번은 제가 아직 면허가 없었을 때,

아내가 운전해 주는 차를 타고, 동부간선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우리 차가 교각 쪽으로 돌진하는 것 같았다.

조수석에서 보면 그렇다. 운전석에서 보는 것과 시야가 다르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고가 날까봐, 나는, 아내의 운전대 핸들을 반대방향으로 확 꺾어버렸다.

진짜 대형사고가 날 뻔 했었다.


너무 놀라고, 또한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아내는, 갓길에 차를 딱 세우고서,

나를 막 때리기 직전 상황까지 갔었다.


그런데도 무면허인 저는 계속 항변했다.

‘당신이 운전하는 차가, 그냥 두었으면, 반드시 교각을 들이받았을 것이다!’ 라고..


여러분, 우리가 바로 이렇다.

우리는 인생에 대해 모두 다 ‘무면허’들이다.

그래서 내 눈으로 보면,

‘내가 탄 차가, 반드시 교각에 부딪힐 것만 같다.’

- 이것은 무면허의 <진짜 확신>이다.


주님이 운전해 가시는데,

내 눈으로 보니까, 불안해서 미치는 것이다.

‘이러다가 사고 나는데.. 이러다가 끝장나는데..’

이렇게 벌벌 떨면서 가는 것이다.


▲지금 야이로가, 조수석에 앉아서 무면허로 가고 있고, 예수님이 운전하고 계신다.

그 무면허 야이로의 조급함,

그리고 느긋하게 운전해 가시는 예수님!


그 두 분 사이에서, 우리가 뭔가를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야이로와 같은 상황에 닥칠 때..

두 눈 딱 감아버리고, 운전하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베다니 마을의 나사로가 죽어갈 때도,

    예수님은 느긋하게 운전해 나아가셨다.

    그 예수님의 페이스pace에, 우리가 적응해 나가야 한다.

    그게 우리의 올바른 믿음이다.


야이로/마르다의 상황에서 보면, 지금 미칠 지경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멀리 보시면서, 느긋하게 운전해 나가신다.

신앙생활이란.. 바로 이런 예수님께, 내가 적응해 가는 과정인 것이다. ★



◑3. 믿음으로 현실을 무시하기


▲그렇게 지체하시더니, 결국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

노상에서 혈루증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가 계속되고 있다.

눅8:49, ‘아직 말씀하실 때에’

이 말씀의 뜻은.. 그 대화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무척 길었다는 뜻이다.


야이로의 속 터짐은.. 이제 ‘원망’의 단계로 발전해 나갈 지경이었다.

‘내 딸이 지금 숨을 헐떡이며 끊어질 지경인데,

아니, 도와주러 우리 딸에게로 가겠다는 분이,

길에서 이 여자랑 한가롭게 뭐 하시나?’


아니나 다를까, 그 상황에서 결정적인 소식이 들려온다.

한 마디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방금 전에 죽었다는 것이다.  눅8:49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현실은.. 이제 더 이상 발버둥치지 말고

딸이 심히 아팠고, 그러다가 죽었다는.. 허무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런 주위 사람들의 의견은, 다음의 한 마디에 집약되어 있다.

선생님을 더 이상 괴롭게 하지 마세요!  :49b

부질없는 소동 그만 떨고, 이제 그만 포기하라는 뜻이었다.


▲50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이 구절은 본문 ‘야이로의 딸 사건’의 핵심구절이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씀은 ‘두려움’과 ‘믿음’이 상반된 것임을 나타낸다.

물과 기름처럼, 둘은 결코 양립兩立할 수 없는 요소들이다.


여러분, 곰곰이 우리 각자의 과거를 생각해 보면

‘두려움’과 ‘믿음’의 선택의 갈림길에서,

내 명예를 잃을까 두려워서,

내 물질을 잃을까 두려워서,

내 재산을 잃을까 두려워서,

우리가 결국 믿음을 택하지 못했던 적이 있을 수 있다.  註2)


그래서 우리는 큰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다시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으리!’


▲믿음이란.. 현실을 초월하는 것이다. 야이로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다.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우리가 절대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

크리스천들도 지극히 현실적이어야 한다.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실이 전부가 아니다.

신앙에는.. 현실을 초월하는 어떤 ‘믿음’이 있는 것이다.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는 것이.. ‘믿음’이지,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만 믿는 것은.. 결코 ‘믿음’이 아니다.


그런데 신비한 것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자기가 자체 생산해 내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도저히 바랄 수 없는 그것을 믿게 되는.. 믿음을 주님이 내게 주신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런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을 부여받기 위해

평소에 기도와 말씀으로 주님과 동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또한 12년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 옷자락을 만진 것은,

또한 복음서에 나오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야이로가, 밑져야 본전 식으로, 예수님께 나아온 것은 결코 아니었다.

만약 그런 식으로 나왔더라면, 다른 군중들과 마찬가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반드시, 우리 믿음에 반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야이로는 예수님께 문제를 들고 나아온 것도 믿음이었고,

또한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모든 상황 종료’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야이로의 믿음이었다.

그는 끝까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갔고,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우리가 다 아는 대로, 딸이 다시 살아났던 것이다.  :55


▲눅8:50절의 병행구절인 막5:36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곁에서 들으시고’라는 말은 overhearing/ignoring이다.

예수님은, 곁에서 주변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씀들을 ‘일절 무시’하셨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는 모든 상식적/객관적인 말을 ‘못 들은 것으로 여기셨다’는 것이다.


여러분, 이렇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는 것’은

때로는 주변의 현실적/상식적/객관적인 잡다한 의견들을

무시overhearing/ignoring하는 것이다.

 

▲가장 비현실적인 것이.. 가장 현실적이다.

히11: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현실(실상)이라고 했다.

그렇다. 믿음은 현실이다.


12명의 정탐꾼들의 예를 들자면,

10명은 지극히 현실적인 보고를 했다.

그러나 사실 가장 현실적인 보고를 한 정탐꾼은, 사실은 여호수아와 갈렙이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현실이고,

믿음의 말이.. 사실은 장차 이루어질,

가장 그대로 되는(현실적인, 현실에 실현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어떤 믿음의 눈으로, 현실을 초월한 미래를 바라보고 있는가?

그런 당신은 사실은 ‘가장 현실적인’ 사람이다.          ↔돈키호테



註1) 마더 테레사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

 

한 기자가 그녀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캘커타에는 수 만 명의 행려자들이 있는데,


당신이 돌보는 사람들은 고작 수 십 명,


행려자 전체에 비하면 너무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맞습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행려자들을 내가 돌보는 사명을


하나님은 제게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제가 만나는, 제 주위에 있는 행려자들을 돌보는 사명을


하나님은 제게 맡겨 주셨습니다.’




이 말은 매우 깊은 뜻을 담고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할 구제 등을 기피하면서 하는 변명의 말이


‘거지는 나랏님도 다 못 먹여 살린다는데..’


‘세상에 도움 줘야할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은데,


우리가 고작 몇 명 ~ 몇 십 명 도와줘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마더 테레사는 거기에 대해 답을 얻은 사람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내가 다 돌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다만 자기 앞에 맡겨진 사람들/자기가 지금 만나는 사람들을 집중해서 돌보는 것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사명이라는 것이다.




註2) 지금 야이로에게는 과연 어떤 두려움이 있었을까?

-한 마을의 회당장으로서 예수를 쫓는다는 것은.. 일종의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층민들은 대체로 예수께 호의적이었지만,

사회의 상층부는 대체로 예수께 비우호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회당장으로서 야이로는, 지금 백주대낮에 예수를 따르고 있는데,

그 순간에 회당장이라는 자기의 지위가.. 상당히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딸까지 죽어버렸으니까, 많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게 되었다.

사람들은 딸의 죽음을 애도하는 순간에도, 야이로를 비난했을 것이다.

‘괜한 짓 했다고, 예수께 가서 부탁하지 말고,

차라리 딸의 임종을 지키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라고...’


-무엇보다 가장 두려운 것은, ‘자기 믿음이 흔들리는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야이로가 예수님께 나아온 것은, ‘믿음’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자기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되었다.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내 믿음이 가짜였나? 내 믿음이 그냥 느낌이었나?

나는 예수님이 내 딸을 반드시 낫게 해 주신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지금 야이로는, 두려워하고 있다. 자기 믿음이 흔들거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두려움이란, 다름이 아니라, 내 믿음을 뒤흔드는 어떤 것이다.                             ▣ 복음 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