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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9

시145:1~21 느낌들의 싸움

LNCK 2009. 11. 20. 12:30

https://www.youtube.com/watch?v=bskQrQARlt0 

◈느낌들의 싸움             시145:1~21                   09.10.19.설교스크랩

 

 

▲자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자장면을 먹을 것이냐, 짬뽕을 먹을 것이냐 하는 것은

아마 대한민국사람의 영원한 숙제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간만에 자장면이 당겨서, 중국음식점에 갔습니다.

그런데 옆의 사람이 짬뽕을 먹고 있는 걸 보면,

자장면을 시켜 놓고도, 또 강렬한 유혹과 갈등이 다가옵니다.

새빨간 국물에 얼굴에 보송보송 땀이 나면서 먹는 그 짬뽕 맛..,

 

그래서 다음번에는 꼭 짬뽕을 시키지만,

또 옆에서 자장면 먹는 것을 보면.. 갈등에 부딪칩니다.

 

하도 그러니까 짬짜면이라는 게 나왔잖아요.

짬뽕과 자장면을 한 그릇에 담아줍니다.

 

여러분, 제 경험인데, 짬짜면을 드실 때,

자장면부터 드시면, 짬뽕은 백발백중 거의 맹물 같은 느낌이 듭니다.

자장면 맛이 강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짬짜면을 드실 때는 꼭 짬뽕부터 드세요.

그래야 짬뽕 맛이 느껴지고, 그 뒤의 자장면은 또 자장면 맛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맛’도 변치 않는 ‘절대 맛’이 있는 게 아니라,

그 전에 먹었던 음식 맛에 따라.. 그 다음 음식 맛이 영향을 받더라는 것입니다.

 

달콤한 사탕을 먹은 후에, 즉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면,

그 커피의 단맛이 안 납니다. 달콤한 사탕 맛 때문입니다. 

 

(이 설교문의 주제)

오늘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 맛’을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변에 너무 달콤하고, 너무 맛있는 것들이 많아요...

물질의 맛, 세상의 맛, 정욕의 맛, 자녀의 맛...

 

우리가 그 ‘세상 맛’에 한참 도취되어 살다가

‘하나님’을 대하면.. 거의 무無맛처럼 느껴집니다.

원래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시고 은혜로우신 분이시지만,

그 맛이 안 느껴지고.. 무맛처럼 느껴지는 것은.. 주위 영향 때문이라는 것이죠.

 

 

▲비슷한 예가, 우리 삶 속에서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루는 ‘과일 바구니’를 샀습니다.

그 바구니 안에는, 포도, 배, 귤, 사과가 다 있습니다.

거기다가 곶감까지 끼워져 있더라고요.

 

다른 과일은 늘 보던 거고, 곶감은 오래간만에 본 거라서

제가 제일 먼저 곶감을 집어먹었습니다.

그 다음에, 아무 과일 맛도 느끼질 못했습니다.

 

너무 단것을 먹고 나니까, 배를 먹어도 무 같고

귤을 먹어도 맹물 같고, 포도를 먹어도 맛이 무색해져버린 거예요.

이게 ‘느낌들의 싸움’입니다.                ←설교 제목

 

이런 ‘느낌들의 싸움’은 이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어요.

간호사가 주사를 놓을 때, 환자의 히프를 손으로 두드립니다.

그런데 두드려야, 주사 바늘이 살을 뚫고 들어가는 그 아픔이 삼켜져버립니다.

 

느낌이 느낌을 먹어버린다는 거예요.

강한 느낌이 약한 느낌을,

혹은 앞선 느낌이 뒤따라온 느낌들을 다 삼켜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세상의 느낌’에 너무 도취되어서

‘하나님의 느낌’이 거의 사라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반복해서 ‘찬양’을 계속하는 이유

본문 시145:1~7절까지 계속해서

‘여호와의 이름을 송축한다. 날마다 송축한다. 영원히 송축한다.

광대하심을 크게 찬양한다. 대대로 주의 행사를 칭송한다.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한다.’

이렇게 계속 찬양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시편을 읽는 우리가,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만큼

비슷한 말(찬양)을 계속 반복하는데,

그만큼 느낌이 강한 겁니다.                     *‘느낌’은 이 설교문의 키워드

하나님에 대한 느낌말입니다!

 

비단 시편145편뿐만 아니라, 시편의 를 썼다는 다윗은, (약 100편)

시편에서 계속 ‘하나님을 찬양하라!’ 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그 각각의 시편에 전반부는 ‘괴롭습니다, 힘듭니다, 어렵습니다.’ 하다가도

후반부는 거의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이렇게 분위기가 돌변해서 끝맺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그런 감사의 찬송의 말을 반복하는 다윗이

왜 약간 따분하고, 조금은 지겹게 느껴질까요?

 

이유는 간단해요.

다윗이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한다고 말할 때는 ‘느낌’이 강렬했기 때문이고,

우리는 그만큼 강렬한 ‘느낌’이 없으니까.. 약간 지루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다윗처럼, 강렬한 느낌이 없는 이유

우리가 먹혀 버렸어요.

하나님을 느끼는 느낌이, 뭔가 다른 느낌에 먹혀버렸다는 겁니다.

 

요즘 ‘맥도널드’에서 배달 서비스를 합니다.           

저희 아들이 프라이드치킨과 감자튀긴 걸 좋아합니다.

 

그런데 애가 굉장히 배가 고팠어요.

그래서 엄마가 오후5:30분쯤에 맥도널드에 전화로 주문을 해줬습니다.

 

그런데 주일날 오후가 되어서, 너무 주문이 밀렸는지,

1시간이 지났는데도 배달이 안 오는 거예요.

 

그 1시간 동안, 우리아이의 그런 모습을 처음 봤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가지고 ‘아~, 아~’ 신음소리를 내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속으로 ‘그래 이놈아, 너도 배고픈 것도 좀 알아야지.

너무 엄마가 제 때에 먹고 싶은 음식 다 해 주니까 귀한 줄 몰랐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들어가 서재에 있는데, 드디어 맥도널드가 배달이 왔습니다.

저는 서재에서 계속 이 설교(느낌들의 싸움)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애가 노래 부르는 소리를 들었어요.

흥얼흥얼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어요.

그 배달된 치킨과 감자튀김을 순식간에 다 먹고

후식으로 요구르트까지 먹으면서, 함포보복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더라고요.

 

1시간 전에 죽겠다고 아우성치던 아이가, 지금은 노래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느낀 겁니다.

맥도널드 치킨과 감자튀김을 먹어도.. 사람에겐 느낌이 있어요.

그래서 즐거워서 노래가 막 나와요. 

 

그런데 여호와의 이름에.. 신자들은 느낌이 거의 없어요.

그래서 찬양이.. 일주일 내내 한 마디도 안 나오는 신자들이 있어요.

 

아니, 여호와의 이름이, 맥도널드 치킨보다도 못한 것입니까?

마음에 드는 옷 한 벌, 그것도 싸게 사고, 좀 돋보이는 가방 하나 새로 사면

그냥 가만히 있지 못하고, 저절로 흥에 겨워 콧노래를 부르는 주부들이

주님께 감사/찬양하는 일에는.. 평소에 늘 시큰둥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그만큼 ‘느낌 싸움’에서 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너무 오래 지속되다 보니, 이제 아예 느낌이 죽어버렸어요.

그래서 집에서 오래간만에 찬양이라도 한 곡 드리면,

주님이 ‘그래, 정말 참 오래간 만이구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찬양이 뭡니까? 하나님에 대한 감동, 다른 말로 느낌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왜 찬양합니까?

느껴지니까요.

 

그런데 이제 안 느껴져요.

하나님이 안 느껴져요.

그래서 찬양도.. 이제는 기능성 찬양이 돼버렸어요.

 

찬양을 통하여 무슨 예배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든지,

한참 찬양을 부르다보면 만족함이 생긴다든지, 이런 ‘기능성 찬양’이 돼버렸어요.

 

   (이게 ‘하나님의 영광’이 내게서 떠나버린 증거입니다. 이건 사실 심각한 문제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영광'을 어서 속히 내게 다시 회복시키면 됩니다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느낌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 대한 느낌이 없을까요?

느낌의 싸움에서 물러난 것이에요. 삼켜져버린 겁니다.

 

오늘날 마귀가 하는 일이 뭡니까?

돈으로 사람들에게 강한 자극을 준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대한 느낌, 자극’이 그만 죽어버리는 겁니다.

(마치 간호사가 주사 놓을 때 히프를 때리듯이)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느낌’은 다 잊어버리고,

이제는 돈이 벌리면.. 느낌이 충만해지고

돈이 안 벌리면.. 느낌이 죽을상이 됩니다.

 

물론 신자들이 옷을 깨끗하게 입고 다녀야 합니다만,

하루는 내 자식이 옷이 남루하다고, 학교에서 애들한테 놀림을 받는다...

이럴 때 만약 내가 뚜껑이 열려버렸다면..

그래서 ‘악착같이 수단 방법 가릴 것 없이 돈을 벌어서, 애 옷을 사 입히자’ 한다면

그것도 ‘느낌 싸움’에서 내가 패하는 것입니다.

 

‘세상 느낌’에 지금 내가 지배당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느낌에 지배받으며 살아야 하는데요..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기도로/설교로/찬양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찾고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데도, 그 주의 이름에 대한 느낌이 없는 겁니다.

 

왜요?

이 세상의 곶감을 먹어버렸기 때문에.

그 곶감 맛이 너무 강렬하니까, 다른 느낌이 있을 수가 없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리트릿을 가든지, 금식을 하든지,

혼자 고독의 시간을 가지든지..

이런 ‘세상 느낌’들을 정리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제 아무리 설교/기도/찬양/봉사를 해도

아무 느낌/감동이 없게 됩니다.

누구보다도 내 스스로 그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언젠가 드라마에서 보니까, 음식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기자들이 있어요.

그들이 어느 집에 가서 음식 맛을 볼 때

반찬을 하나씩, 하나씩 먹어볼 때

반찬 하나를 먹고 나서, 물을 마시면서 입안을 씻어요.

 

그 다음에 다른 반찬을 또 먹고, 또 물을 마셔서 씻어내고

그리고 또 다른 반찬을 먹으며.. 그렇게 맛을 감정합니다.

앞서 먹은 그 음식의 맛을 씻어내는 거예요.

그 느낌을 씻어내지 않으면, 그 다음 음식의 맛을 정확히 맛볼 수 없어요.

 

그런데 자식 하나 낳아서 키우다가, 자식의 느낌이 너무 강렬합니다.

자식에게도 '강렬한 느낌'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 다음부터 하나님을 찾을 때는

하나님에 대한 느낌은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무디어지는 것이지요.

 

그리고 언제 찬양이 나오느냐 하면,

아들 일이 잘됐을 때.. 찬양이 나와요.

그건 아들을 찬양하는 거지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게 아니라!

 

▲사도바울도 그 느낌이 뭔지 알았습니다.

사도바울이 베스도총독과 아그립바 왕 앞에서

‘여러분들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얘기했어요.

 

그 말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여러분 우리가 시베리아 평원, 중국의 중앙평원이나 아니면 아르헨티나의 초원,

이런 곳에 가 보면.. ‘광대함’이란 느낌이 팍팍 다가옵니다.

 

그런 ‘광대하심의 느낌’을 시편의 다윗이, 신약의 사도바울이 느낀 거예요.

도대체 그 크시고 광대하신 분을 느끼고 나니까

그 느낌 앞에서는 아그립바 왕이 갖고 있는 모든 부귀영화가

곶감 먹은 뒤의 배pear가 된 것이에요. 그것은 무맛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광대하심’이 내게도 그대로 느껴지겠습니까?

 

주님의 십자가로 다 씻어내세요.

주님의 십자가에, 오늘 내가 죽었음을 고백하고, 확인합시다.

 

돈 느낌을 씻어내세요.

자식느낌을 죽이세요.

성공느낌을 씻어내세요.

 

그러지 않고는 하나님에 대한 느낌을 가질 수가 없게 되요.

하나님의 느낌을 갖는 자만이, 이 세상에서 참 자유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참 자유한 자만이

요셉처럼, 모세처럼, 주님처럼, 바울처럼, 베드로처럼,

당신의 장중에 붙들려, 주님의 뜻대로 하늘나라를 확장시켜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강물처럼 넘치도록 내게 임하는 그 은혜를 느껴보세요.

‘이 일은 이렇게 돼야 되는데, 저 일은 저렇게 돼야 되는데..’ 이런 자기 생각들.. 

이게 다 마귀가 만들어놓은 가짜 느낌들이거든요.

우리를 죽이는 느낌들입니다. 그걸 따라가다 다 죽게 돼있어요.

 

‘남편이 내게 이렇게 해줬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그 모든 느낌의 기대를 다 죽여 버리시고

 

그냥 가만히 있으면서 내게 밀려들어오는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시고

다윗처럼 찬양하고, 칭송하고, 송축(하나님을 축복)하고,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이 세상을 한번 살아가 보십시다.                                                           ▣ 우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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