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과부의 헌금 막12:41~44, 왕상17:8~15 펀 글 정리
구약의 사렙다 과부, 신약의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 본문은 두 과부의 이야기입니다.
이 본문을 오해하면, 아주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악취미를 가지신 하나님’으로 오해하게 됩니다만, 당연히 그게 아니죠.
그럼 그 이유가 무엇인지.. 한 번 묵상해 봅니다.
◑주님은.. 우리 사랑을 받고 싶으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면.. (주기도 하지만) 받고 싶습니다.
사랑은.. 서로가 주고받는 것입니다.
엄마는, 사랑하는 아기에게 젖을 물립니다.
조그만 아기도, 엄마에게 방긋한 웃음을 선물합니다.
산고의 고통을 겪은 어머니의 사랑이 너무 크지만,
그래도 사랑은 ‘주고받는 것’입니다.
아기의 방긋 웃음을 통해서.. 엄마의 사랑은 더욱 여물어 갑니다.
여러분, 발렌타인 데이에 연인에게 초컬릿을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받고 싶기도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주는 것도 사랑 때문이지만, 받는 것도 사랑 때문입니다.
그런데 발렌타인 데이에, 선물을 받고서, 마음에 부담이 꽉 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데, 너무 과분한 선물을 받았을 때.. 그렇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이.. 두 과부의 선물/헌금을 받으시고서, 마음에 부담이 꽉 되셨다면..
그들을 사랑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선물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과부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한인선교사가 아주 가난한 열대지역에서 선교사역하면서
뜨거운 열대의 작열하는 태양 빛 아래서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햇볕이라도 피할 수 있는 간이건물을 하나 짓게 되었습니다.
그곳 사람들이 하루 일당이 미화 1불 밖에 안 되는 가난한 곳이고,
그 1불짜리(천원) 일거리도 쉽게 구할 수 없는 곳이라서
건축을 하는데 현지인들의 헌금을 요구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주로 외부의 도움으로 몇 달에 걸쳐서 건축을 하게 되었고
노동으로 수고한 현지인에게는, 일자리 창출 차원에서 일당이 지급되었습니다.
지붕을 가리고, 벽을 얼기설기 막은, 간이 건물을 드디어 하나 완성하게 되었는데
완공을 며칠 앞두고, 선교사는 혼자 고민에 빠졌습니다.
전적인 외부의 도움으로 99.9% 건물을 짓더라도
현지인 중에, 단 한 명이라도,
자기 집에서 키우는 <화분 1개>라도 갖다 놓기를 바랬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네비우스 선교원칙’에 억지로라도 흉내 내기 때문입니다. *자치, 자전, 자양 등
현지인의 참여가 0.1%라도 반드시 있기를 바랬습니다.
방관자가 아니라, 그들의 '사랑'을 보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어쩌면 사렙다 과부에게, 마지막 남은 최후의 빵을 바치기 원했던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참 믿음의 사람’을 찾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두루 찾으시다가, 찾지 못하시자,
엘리야 선지자를 이방나라 사렙다(지금의 레바논)까지 멀리 보내신 것입니다.
“심봤다!”
하나님은 ‘참 믿음의 사람, 그 한 명’을 드디어 찾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너무 기쁘신 나머지
정말 신기한 기적을 선물로 베풀어 주셨다. 비가 내릴때 까지, 기름과 떡 반죽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다시 선교사 이야기로 돌아가서,
건물의 완공을 며칠 앞두고, 선교사는 매일 저녁마다
혼자서 속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 중에, 단 한 사람만이라도, 화분 한 개라도 주님께 드리게 하소서!’
하나님은 다행히 그 선교사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합니다.
그 건물을 봉헌하는 날,
정말 단 한 명의 마을 사람이, 아주 작은 선물을 하나를 가져와 드렸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물질’을 받고 싶으신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 ‘마음 정성’을 받고 싶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주고받는 것이니까요!
▲시성詩聖 타골이 쓴 책에 나오는.. 한 거지 이야기
“나는 이 집 저 집 문전걸식을 하며, 어떤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그 때 멀리서 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찬란한 빛의 황금마차가 나타났다.
나는 왕중왕이신 분이라고 생각하고 기쁨으로 가득 찼다.
나는 희망에 벅차 있었고, ‘나의 불행한 날들은 이제 다 지나갔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분의 자선(선물)을 기대하면서,
먼지 속 어디에 떨어질지 모르는.. 동전을 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차가 내가 있는 곳에 와서 멈춰 섰다.
그분의 시선이 나에게 와 멈추면서 미소를 지으면서, 그분은 마차에서 내렸다.
나는 내 인생의 행운이 정말 찾아왔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분은 즉시 나에게 오른 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너는 내게 무엇을 줄 수 있겠느냐?’
거지에게, 왕이 동냥을 하다니 될 말인가?
나는 어리둥절하여 얼떨결에..
내가 갖고 있던 식량자루에서 조그만 곡식 한 톨을 꺼내 그분에게 드렸다.
그런데 그날 저녁, 나는 내 자루에 든 얼마 안 되는 곡식들 중에서
금으로 된 작은 쌀 한 톨을 발견하고서 얼마나 놀랬는지 모른다.
나는 비통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왜 나는 모든 것을 그분께 드릴 용기를 갖지 못했었을까?’”(R. 타골).
이 이야기는 ‘쌀 한 톨이 금 한 톨로 바뀌었다’는데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왕중왕이 거지에게 무엇을 요구한다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거지는, 당연히 왕중왕께 뭘 받을 것만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왕중왕은, 왜 거지에게 요구를 했을까요?
아마 ‘사랑의 상호관계’를 원하신 것이 아닐까요? ‘일방적인 관계’보다는...
거지를, 왕중왕의 사랑의 파트너로 인정해 주신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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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프레스코 벽화를 보는 듯한 장면
본문을 묵상하다보면 한 폭의 프레스코(fresco) 그림이 떠오릅니다.
프레스코 화법은, 벽이나 천정에 칠한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수채(水彩)로 그림을 그린다고 합니다.
프레스코는 아주 오래 전에 그려져서, 색도 흐려지고 그림 윤곽도 잘 보이지 않고,
남은 것은 시간에 마모된 흔적들뿐입니다.
그럼에도, 그 그림 속 풍경이 마음에 오래 남는 것은
기억과 추억으로 대상을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본문 사렙다 과부와 마가복음의 가난한 과부가 그렇습니다.
둘 다 까마득한 옛날의 일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마을에, 가난한 사람이 배경이니.. 그 그림이 화려할 수 없습니다. 아니 초라합니다.
그래서 더욱 빛이 다 바래버린, 오래된 프레스코 벽화 그림을 보는 듯 하는데요... (너무 조악하다는 뜻)
▲엘리야는 사렙다 마을의 과부에게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지요.
사렙다(현재 레바논)에서, 어떤 과부가 밀가루 한 줌과 기름 조금으로
마지막 식사를 준비하려 합니다.
과부와, 과부의 아들, 엘리야 선지자.
한 끼 식사로는 너무나 빈약한 밀가루 한 줌으로 구워낸 빵.
이런 광경들이 인물 표정도 잘 나타나지 않는
지극히 단순한 프레스코 화(畵)를 보는 듯합니다.
고개 숙인 채 사렙다 과부가 서있고, 먼저 구워진 작은 빵 하나를 들고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비를 내리실 때까지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놀라운 은총이 주어집니다.
어찌 보면 엄청난 기적이,
성경에는, 화려한 수식어와 장식을 다 떼어낸, 한 폭의 프레스코 그림처럼 보입니다.
너무 단순하고 소박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주인공 세 사람도 모두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배경도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는
국경을 초월하여, 가장 작은 마을의 가장 비천한 여인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찾아가 미칩니다. reached
▲마가복음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가난한 어떤 과부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헌금함에 동전을 넣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예수님께서 바라보고 계십니다.
렙톤 두 닢 - 지금 우리 돈으로 200원이나 될까요?
그런 돈을 넣으면서 자랑스럽고 당당할리는 없겠지요.
본인에게는 그것이 가진 돈 전부이지만
남이 볼까 조심스러워, 과부는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 동전을 넣고 있습니다.
렙톤 두 닢은, 사렙다 과부의 남은 밀가루 한 줌과 같았습니다.
최후로 남은 것이었습니다.
그 돈을 말없이 넣고 있는 과부와, 그 과부를 바라보시는 예수님.
▲성경은 참으로 신비한 책이요, 신비한 그림이라고 봅니다.
요즘 TV연속극을 보면, 한결같이 화려한 부잣집에다, 기업회장 가문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매우 가난한 과부 여인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있습니다.
그 장면을, 마치 프레스코 화처럼, 중요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사진과 동영상이 없던 과거에는, 역사의 중요 장면을 프레스코 화로 남겼습니다.)
역사적으로 교회에서, 항상 부자들이 우대받고, 빈자들이 무시를 받아왔지만,
성경이 비추는 바, ‘주님의 시선과 사랑’은
아주 가난하고 이름 없는 비천한 과부에게 머물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주연배우’라고 소개해 주십니다.
주님은 정말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는군요.
오늘날 우리가 만약에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면..
거기는 ‘하나님 나라’가 아닌, ‘사람의 나라’가 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 이렇게 지극히 가난하면서도,
‘믿음의 사람’으로서 주님의 눈에 뜨이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자기가 가진 아주 적은 것이지만.. 주님을 사랑하므로, 헌신해서 바치는 과부와 같은 사람입니다.
오늘 당신은, 혹시 자기가 가난하다고.. 비관해서, 축 쳐져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은.. 자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지켜보고 계시는 가운데
부자들은 큰 돈을 헌금하고
과부는 동전 두 닢을 헌금합니다. (사렙다 과부도 마찬가집니다)
정말 작은 돈인데
큰 돈을 내는 부자들 가운데서 내는 과부가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저 같으면 그 작은 돈이 부끄러웠고
그렇게 조금밖에 낼 수 없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예 봉헌을 하지 않던지
하더라도 부자들이 다 나가고, 아무도 보는 사람도 없을 때.. 살짝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과부는, 자기의 가난함이란 부끄러움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과부는, 초라한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고
하나님을 가장 허식 없이 만납니다.
과부에게는 바리새인처럼 기다란 예복이 없습니다.
그래서 윗자리에 앉을 수도 없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부러 드러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자기를 숨기지도 않습니다.
자기 자신에 가장 진실하고
자기 자신을 그대로 가장 사랑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고
다른 사람을 허세 없이 사랑하고
작은 사랑이라고.. 자신의 사랑을 스스로 업신여기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헌금에는, 자기를 의식하고 내세우는 불순물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나 진실한 사랑은.. 허식 없이 자기를 드러내 보이게 만듭니다. ▣ 사 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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