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김 빌2:5-11 09.02.15. 인터넷설교 스크랩/편집
(요즘 인기 없는 설교제목인) ‘섬김’을 = 비움+낮춤+복종으로 설명합니다.
▲도입 : 제 인생에 영향을 준 말씀
제 인생 여정에서, 고비 고비마다 저를 붙드시고, 인도해 주신 말씀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마20:25~28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민족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마구 내리 누르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려고 왔다. 마20:25~28
이 말씀은, 남들처럼 유수한 대학을 나와서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겠다던 저희 꿈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물론 그런 꿈도 귀한 것이었습니다만,
이 말씀은 참으로 위대한 삶이 무엇인지를.. 늘 새롭게 또다시 저를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 후로도 이 말씀은, 제게,
‘진정한 인생의 성공’을 새롭게 정의하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섬김의 예
마20:27~28절에서 예수님은 스스로
인자는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왔다고 하셨는데
빌2:5~11절에서 사도 바울은,
섬김의 삶을 살아가신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3가지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것은 비움/ 낮춤/ 복종입니다.
▲1. 비움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빌2:6~7
신학자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과 동등하신 그 분이 어떻게 인간이 되실 수 있었는가?
그것은 ‘비움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모든 영광, 모든 존귀와 위엄을 내려 놓으셨기에, 비우셨기에, 가능했다고 말합니다.
※요즘은 ‘비움’이란 말 대신에, ‘내려놓음’이란 말을 자주 씁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섬김은 비울 때 가능합니다.
비움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나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입니다.
나의 고집을 그리스도 앞에 내려놓고 비울 때, 진정한 섬김이 가능해 집니다.
나의 자존심도 비워야 합니다. 나의 습관도, 나의 Comfort zone도 힘들지만, *comfort zone: 안전지대
비워야 진정한 섬김이 시작됩니다.
섬김에 대한 대가나,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비워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모든 수고 후에도 “주의 종이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고백할 때, 진정한 섬김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관련글 : 자기 묘비문을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쓴 나가이 다카시 박사
▲지도자들 가운데는 ‘비움’을 힘들어하면.. 그 공동체는 갈등을 겪게 됩니다.
목회자든, 평신도 지도자들이든 자신의 생각과 고집을 비우면,
갈등의 고통스러운 시간은
함께 자라가는 놀라운 은총과 성숙의 기회가 될 수 있는데,
이 비움이 참으로 어려운 것 같습니다.
끝까지 자기주장을 내려놓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고슴도치들이 싸우는 것처럼 서로 상처 받고, 아픔이 계속되면서
교회가 어려움 속을 헤맬 때가 있습니다.
진정한 섬김을 위해서는 비워야 합니다.
비울 때 참으로 낮아지고, 섬김의 삶이 가능해 집니다.
▲2. 낮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2:8
예수님의 마음, 그 분의 삶은 바로 낮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을 낮추시고, 낮추셨습니다.
그 분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인간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태어나실 때도 왕궁이나 고급 주택이 아니라,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초라함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나아가 십자가에서 못된 죄수의 신분으로 돌아 가셨습니다.
침 뱉음과 모욕,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의 그 엄청난 고통과 아픔을
기꺼이 감수 하셨습니다. 낮추고, 낮추고, 또 낮추셨습니다.
▲진정한 섬김의 삶은 낮춤에서 시작 됩니다.
스스로 낮추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행하는 섬김은
진정한 섬김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과시일 뿐입니다.
섬김의 삶을 위해서는 내려가야 합니다.
저 낮은 곳, 고통과 아픔의 자리,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고,
아니 손가락질하는 그곳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낮춤’이야말로 위대한 섬김의 삶을 열어주는 열쇠입니다.
▲낮아지지 않으면, 그 아픔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낮아지지 않으면 그 현실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낮아져야, 함께 같은 자리에 서야,
형제와 자매의 아픔을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습니다.
낮아지지 않으면 진정한 섬김이 시작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의 자리에서 낮추고, 낮추셨기에,
우리의 아픔, 우리의 고민, 우리의 방황을 아시고, 섬김의 길을 걸어 가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이 낮춤의 삶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교회 내에서 위원장, 장로, 권사, 집사가
마치 사다리에 오르는 진급 과정처럼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면,
아직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는, 세상 논리에 순종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는 그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직분은 더 낮아지라고, 더 내려가라고 주님께서 맡기시는 것입니다.
▲3. 복종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2:8b
무엇에 대한 복종입니까?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복종입니다.
본문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진정한 섬김은, 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붙들고 끝까지, 죽기까지 순종하는 삶입니다.
여러분, 이 ‘끝까지/죽기까지’가 쉽지 않습니다. 얼마 동안은 가능할지 모릅니다.
마음에 들면 순종하여 섬기고,
마음에 안 들면 순종을 미루는 것은 진정한 섬김이 아닙니다.
내 형편이 평탄할 때는 섬기고,
좀 힘들어 지면 순종을 미루는 것은 진정한 섬김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인정해 주고 박수 칠 때는 순종하지만,
오해와 비난에 휩싸여 마음이 아파올 때,
순종의 삶을 내려놓는 것은.. 진정한 섬김이 아닙니다.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목회자의 길을 걸어오면서, 제 자신이 종종 해이해 질 때가 있습니다.
섬김의 길을 걷기 위해 목사가 되었는데.
사실은 섬김을 받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위하여 목회자의 길을 택했는데, 사랑 받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 하셨습니다.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이 더 복이 있다고.
한국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운 것은
우리 목회자들이 받고 섬김을 받는데 익숙해 져서
‘섬기는 사람이 위대하다’는 주님의 말씀을 잊어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점입니다.
▲이렇게 낮추시고, 비우시고 순종하신 예수님께 대하여
성경은 그 결과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빌2:9~11
여러분, 우리 여정의 종점은 갈보리 언덕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섬기면,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 이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삽니다.
◑적용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언제나 섬김과 희생의 자리로 인도해 갑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직장/선교지/장래의 길의 인도함을 하나님께 묻지만,
결국은 더 높은 자리/더 돈 많이 버는 자리/더 편한 자리를 선택하는데요..
물론 그게 인지상정이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종종 ‘섬김과 희생의 자리로 인도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혹시 하나님이 여러분을 ‘좌천’시키시더라도,
그것을 좌천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인도’로 받아들이세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언제나 ‘섬김과 희생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 길을 가시고 계신 분은,
‘내가 언제 고생이 끝나고 쨍하고 햇볕 들 날 오나?’ 하염없이 기다리지 마시고,
자기가 지금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스스로 확신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본성(무조건 편한자리)을 따르지 말고, 주님 인도(섬김과 희생)를 따라야 합니다.
주님이 인도하시는 ‘섬김과 희생의 자리’가 처음에는 힘들게 보여도,
지나고 나면.. 감사와 감격과 감동의 고백이.. 내 입에서 반드시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강력히 원해서, 지금 내가 무조건 ‘편안한 자리’로 인도되어 갔다면
몇 년 지나고 나중에, 내 입에서 어떤 고백이 나올까요?
▶인간의 불행한 삶의 근거
인간의 모든 고통은 <섬김을 받으려는데> 있고,
반대로 행복은 <섬기는데> 있습니다.
부부간에도 사랑을 못 받는 이유는-이기주의/섬김을 받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친구가 없고 왕따가 된 이유, 즉 내 모든 불행의 근거는
섬김을 받으려는 마음.. 이기주의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행복'은 물론이거니와
'행복에 이르는 길'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모든 건전한 이성과 신앙적 판단력을 마비시키고 말았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예수님이 가지신 인생 목적은.. '섬김'에 있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20:28
모든 사람이 섬김을 받으려 하는 그 와중에서...
예수님은 진정한 행복한 삶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게 복음인데, 우리는 복음을 제쳐 놓고
‘경쟁사회에서 승리/성공/부자되는 원리’.. 이런 것을 전해서는 절대 안 되겠습니다.
▶섬김의 기도
기도가 의미를 갖는 것은.. 섬기는 삶이 동반될 때입니다.
섬기는 삶이 뒤따르지 않고 기도만 드리는 것은
일종의 ‘정중한 서정시’가 되고 맙니다.
화장실 청소하고, 마루 바닥을 닦는 일
- 그것은 하찮은, 아랫사람들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작은 봉사와 섬김의 삶이 동반되는 기도가.. 하나님께 진정 드려지는 기도입니다.
가장은 섬김을 받는 위치가 아니라,
가족을 위한 작은 봉사를 할 때 그것 자체가 기도요,
그런 섬김의 봉사를 동반한 기도를..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것을 깨달읍시다.
▲이 섬김의 길은 사실 오늘 날 세상 속에서도 인정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소규모 사업체이든, 큰 비즈니스이든, 훌륭한 기업은
이윤추구보다, 섬김, 곧 서비스에 초점을 맞춥니다.
식당도 손님들이 즐겨 찾을 수 있는 맛과 서비스에 역점을 두지 않으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소비자는 왕이다”라는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소비자를 왕 같이 섬기지 않는 기업, 사업체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까?
이것은 어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기에 남에게 대접을 받으려면 먼저 남을 대접하라는 주님의 말씀,
이 황금률 (golden rule)은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이 세상, 삶의 현장 속에서도 진리입니다.
▲1996년에 세상을 떠난 Henry Nouwen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목회 신학,
영성 신학자이었습니다.
Harvard와 Yale 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치면서 많은 베스트셀러를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성역 25주년에 즈음해서 교수직을 사임하고,
캐나다의 토론토 근처에 있는 정신 지체아들이 함께 모여 사는
Daybreak Community의 신부로 새로운 섬김의 삶을 시작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놀라움과 충격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Upward mobility, 성공과 영광을 추구하던 삶에서 돌아서서,
Downward mobility 낮은 곳을 향해 내려가는 삶의 길을 걸었습니다.
정신 지체아들의 용변 지도, 행동 교정, 식사, 세면, 옷 입는 훈련을 도와주며 살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높은 지위, 더 큰 성공, 더 많은 영광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깊은 일깨움과 감동을 전해 주었습니다.
늦은 곳에서 만나는 주님의 놀라운 은총을 증거하며 살다가 우리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이 세속에 물든 사고방식은,
이런 헨리 나우웬과 같은 삶을.. 도리어 비정상적이고 기행奇行적인 일로 여깁니다.) ▣ 헌신, 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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