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렙돈 헌금 눅21:1~4 가톨릭 글 스크랩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칭찬)하시니라. 눅21:1~4
좀 난해한 구절입니다. 예수님의 본심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렙돈은 한 데나리온의 1/64(64분의 1)입니다.
한 데나리온이 하루 노동자 품삯이니, 6만원으로 칩시다.
그러면 두 렙돈은 2/64 .. 오늘날의 시세로 대략 2천원입니다.
▲본문이 난해구절인 이유
한 번 생각해봤습니다. 어떤 것이 더 쉬울까요?
천 원 가지고 있는 사람이 천 원을 다 헌금하는 것과
부자가 지갑에 천만 원을 다 헌금하는 것과.. 어떤 것이 더 쉬울까요?
천 원이 가진 것의 전부인 사람이.. 당연히 더 쉬울 것입니다.
아무리 부자라도, 큰 액수를 선뜻 헌금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울 것입니다.
천 원을 가진 사람은 어차피
헌금을 낼 바에는 다 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 쪼개서 5백 원만 내겠습니까?
또 천 원을 가진 사람은 그 천 원이란 것이 있으나 없으나
사실 별 차이가 없기에.. 다 주는 것이 쉽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다 헌금한 과부의 행위가.. 별 거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그걸 칭찬하시는 예수님을..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본문이 난해한 구절이라는 것입니다.
◑1. 가난한 사람은.. 뭐든지 목숨 걸고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무엇을 하기만 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전부를 걸고 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능력 없는 사람이.. 능력이 없어서 안 할 수도 있지만
하기만 한다면 능력이 없기에.. 온 힘을 다 해서 할 것입니다.
돈이 없는 사람이 선물을 하려고 할 때
돈이 없다고 선물 하는 것을 포기할 수도 있지만
선물을 한다면.. 가진 것 다 털어서 선물을 할 것입니다.
저는 저 자신을 반성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능력을 많이 주셨습니다.
그런데 저와 가까이서 일과 삶을 동반하는 한 형제는
저보다 능력이 많지 않습니다. (아마 장애우)
그래서 저는 별로 힘을 안 들이고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는데
그 형제는 별 거 아닌 일 하나를 가지고 끙끙 댑니다.
답답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온 힘을 다해 그 형제가 하는 것임을 알기에
어떤 때는 부럽기도 하고, 어떤 때는 존경스럽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형제를 보며
저는 정성이 부족한 저 자신에 대해
늘 일종의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이것이 가난한 사람의 특전입니다.
하기만 한다면 온 힘을 다 해 하고
주기만 한다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줄 수 있는 것 말입니다.
자기 모든 것을 다 동원하는 것,
이것이 정성을 다 하는 것이 아닙니까?
경제적으로 가난하거나, 신체적으로 가난한 장애우는
무엇을 하든지, 자기 온 정성을 다 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그 정성은 보통 정성이 아닙니다.
이것이 가난한 사람이 주님께 칭찬 받는 이유이고
가난한 사람이 행복한 이유입니다.
◑2. 여인이 “다 넣은 것”을 볼 수 있는 예수님의 눈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사진기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진기의 성능도 매우 좋아져서 사진에 대해 조금만 관심을 갖고 공부해도
보통 사람들도 전문가만큼 사진을 찍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특히나 풍경 사진을 찍는 데 열성인 사람들을 보면
흔히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한 부류는.. 촬영을 하려다가 촬영 대상과 사진기 사이에
어떤 물건이나 대상이 있으면.. 치워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 방해물이 나뭇가지이거나 작은 나무이라면 부러뜨리거나 잘라 버리고,
잡목이거나 어지럽게 난 풀밭이라면 발로 다 짓뭉개서
원하는 그림을 만들어서 사진 촬영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빨리 찍고, 빨리 다른 곳에 가서 또 찍습니다.
다른 한 부류는.. 자신이 찍고 싶은 대상과 사진기 사이에 장애물이 있으면
옆으로 돌아가며 다른 각도를 잡아 사진을 찍기도 하고,
그러다 좋은 구도가 나오지 않으면.. 사진 촬영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런 이들은 대부분 아주 천천히 이동합니다.
마음에 드는 한 장의 사진을 담기 위해서, 대상을 오래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헌금함에 예물을 넣고 있는
사람들의 행렬 앞에 앉아 계셨다고 합니다.
(당시 ‘여인의 뜰’에는 각각 다른 명목의 헌금 궤가 13개나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 말고도, 여러 사람들이
헌금함에 봉헌 드리러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눈에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으로 구분되어 보였을 것이고,
어떤 사람의 눈에는..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어 보였을 것이고,
어떤 사람의 눈에는.. 젊은이와 늙은이로/ 도시인과 농촌인으로 구분되어 보였을 것입니다.
각자가 쓴 안경에 따라.. 사람들이 각기 달리 보였을 것입니다.
그 외에도, 헌금 행렬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은 정말 제각각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옷 모양새를 보는 사람,
얼굴 모양새를 보는 사람,
헌금함에 넣는 동전의 빛깔(금색, 은색, 동색 같은)을 보고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과연 무엇을 보셨을까요?
예수님은 과부가 “다 넣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과부의 주머니 사정을 보셨다는 것인가요?
아니면 집안 경제사정을 보셨다는 것일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다 넣었다.”고 말씀하신 뜻은,
다시 말해 “그 사람의 존재 전부”를 보셨다는 말일 것입니다.
과부의 “인격 전체”를 보셨다는 것이죠.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로 번역하지 않고, '가진 것을 전부 드렸다'로 번역/직역한 경우.
'생활비 전부를 드렸다'는 의역에 가까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두 렙돈 넣은 사람이, 어디 그 과부 한 명뿐이었겠습니까?
아니, 많았을 것입니다. 당시에 가난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예수께서 유독 이 과부만 칭찬하신 것은
그 여인이 두 렙돈과 더불어, 자기 존재 전부를 ‘다 드렸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어떤 사물이나 외적 모습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인격에 달려있다는 것을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의 외적 모습에 집착하게 될 때
우리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 혹은 좋아하는 것만 보기 쉽습니다.
그래서 내가 찍고자 하는 사진 구도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중간의 장애물은
나뭇가지도, 풀밭도.. 방해물이 될 뿐이고, 거추장스러운 것이 될 뿐이죠.
(어쩌면 그 과부를, 오늘 내가, 거추장스런 방해물 취급을 할 수도 있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 피사체가 마음에 안 들면, 각도와 방향을 바꾸어 보듯이
오늘날 우리가 ‘가난한 과부’ 같은 사람을 만날 때,
내가 바라보는 각도와 시각을 살짝 바꾸어보면 어떨까요?
반드시 그의 새로운 면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정말 소중한 것은,, 보여지고 만져지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헬렌켈러가 말하듯 진정 소중한 것은
“보여지는 것도 아니고, 만져지는 것도 아니라.. 느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보시는 눈, 그 느낌을 감지하는 눈이 있었습니다.
그럼 나는요?
◑3. 마음을 담은 선물을 귀하게 받으시는 예수님
▲가장 기억에 남는 선물
이제는 다 커버린 두 아들 녀석들을 바라보며
문득 둘 째 녀석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생각이 납니다.
무뚝뚝한 첫 째 아이와는 달리 잔정이 많은 아이입니다.
제 엄마 생일이라고 동네 백화점에서 양말 두 켤레를 사서 곱게 싸들고
겸연쩍은 듯이 내놓는 손이 얼마나 예쁘고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그 때는 나이가 어린 저학년 시절이라 용돈도 따로 주지 않았을 적입니다.
아마 친척 어른들이 만날 때 마다 학용품 사서 쓰라고 준 돈을 아껴 모아 두었나 봅니다.
집사람은 뜻밖에 막내가 보인 예쁜 짓이 하도 기특해서
남편인 내가 사다준 장미 꽃다발은 안중에도 없더군요.
저는 그 꽃다발은 벽에다 걸어 놓고 말려두어,
그 후 몇 달인가 계속 그 꽃다발을 사다준 것을 제가 생색을 내었습니다.
그러나 집사람은 십년도 지난 지금도 그 양말을 선물 받은 이야기를 자주합니다.
아이 듣는데서 더 말합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때 어버이 날이라고
엄마, 아빠 얼굴 그린 그림과 카네이션을 만들어 달아주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그 첫 선물이 가장 기억에 남는 이유는
아마도 제 용돈을 쓰지 않고 모았다가 사다준 그 행동이 갸륵해서입니다.
그 나이 또래 사내 녀석들 유난히 쑥스러움 많이 탑니다.
제 아이들도 그런 편인데 용기를 내어 선물을 골랐다는 것이 더 대견해서입니다.
아마 집사람이나 저는 이 기억을 자주 떠올릴 것입니다.
혹시라도 아들에게서 섭섭한 마음이 들 때면 그 기억을 떠올리며 삭이겠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일부러 성전 봉헌함을 지켜보신 것입니다.
누가 얼마를 봉헌하는지 지켜본 것이 아닙니다.
이 과부가 자기의 전부를 봉헌하는 갸륵한 마음씨를 칭찬하고,
그 모습을 보시고 당신이 느끼셨을 기쁨과 희망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아무리 사소한 봉헌이라도 자신의 사랑을 담고 있는 행동이라면
그것을 더 기쁘게 받아들이시고 오래 기억하십니다. 제 아내처럼요!
▲피천득님께서 쓰신 <장미>라는 제목의 수필을 같이 읽고 싶어 여기에 올려 봅니다.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사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잠이 깨면 바라다보려고 장미 일곱 송이를 샀다.
거리에 나오니 사람들이 내 꽃을 보고 간다. 여학생들도 내 꽃을 보고 간다.
전차를 기다리고 섰다가 Y를 만났다.
언제나 그는 나를 보면 웃더니, 오늘은 웃지를 않는다.
부인이 달포 째 앓는데, 약 지으러 갈 돈도 떨어졌다고 한다.
나에게도 가진 돈이 없었다.
머뭇거리다가 부인께 갖다 드리라고 장미 두 송이를 주었다.
Y와 헤어져서 동대문 행 전차를 탔다.
나는, 제 품에 안긴 아기가 자나 하고 들여다보는 엄마같이,
종이에 싸인 장미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문득 C의 화병에 시든 꽃이 그냥 꽂혀 있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는 전차가 벌써 종로를 지났으나, 그 화병을 그냥 내버려두고 갈 수는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전차에서 내려 사직동에 있는 C의 하숙을 찾아갔다.
C는 아직 들어오질 않았다. 나는 그의 꽃병에 물을 갈아준 뒤에.
가지고 갔던 꽃 중에서 두 송이를 꽂아놓았다.
그리고 딸을 두고 오는 어머니같이.. 뒤를 돌아보며 그 집을 나왔다.
숭삼동에서 전차를 내려서 남은 세 송이의 장미가 시들세라 빨리 걸어가노라니
누군지 뒤에서 나를 찾는다. K가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애인을 만나러 가는 모양이었다.
K가 내 꽃을 탐내는 듯이 보았다. 나는 남은 꽃송이를 다 주고 말았다.
그는 미안해하지도 않고 받아가지고는 달아난다.
집에 와서 꽃 사가지고 오기를 기다리는 꽃병을 보니 미안하다.
그리고 그 꽃 일곱 송이는 다 내가 주고 싶어서 주었지만,
(나는) 장미 한 송이라도 가져서는 안 되는 것 같아서 서운했다.
▲특히 누가복음서에는 약자들의 대표격인 가난한 과부의 이야기가 많이 다루어집니다.
-2장에, 예수님의 탄생 시 구세주를 기다리던 과부 안나
-4장에, 심한 기근에서 구원받은 사렙다 마을의 과부 이야기가
-7장에, 한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주시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18장에, 공정한 재판을 요구했던 한 과부의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면
-본문 21장에,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가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누가복음서에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배려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여러 번 표현되고 있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들 사건 안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마음을 담은 선물’하면 지금도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잠실 성당에서 보좌신부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성당 마당에서 인사를 마치고 막 떠나려고 하는데
저의 차 창문을 급하게 두드리는 한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할머니는 무엇인가를 담은 까만 비닐 봉투를 차안으로 넣어주며
“신부님, 잘 가세요!” 하고 연신 인사를 하셨습니다.
무심코 받은 봉투는 뜨거웠는데
열어보니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만두였습니다.
시장에서 만두 장사를 하던 할머니가 성당을 떠나는 저에게
뜨끈뜨끈한 만두를 먹게 해 주려고 막 쪄낸 만두를 가지고 뛰어오셨던 것입니다.
가격으로 따지면.. 2~3천원, 두 렙돈 밖에 안 되지만
그 정성으로 따지면.. 가치를 환산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정성과 마음을 담은 선물은 이렇게 큰 감동을 줍니다.
사람도 이럴지언정 하나님께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지요.
◑4. 드리고 싶어서 못 견디는 사람의 정성을 받으시는 예수님
▲중세 시대 때에 자기의 명예를 위해
자기 이름을 넣은 기념 성당을 짓고 싶어 하던 왕이 있었습니다.
왕은 아무에게도 건축헌금을 못하도록 엄하게 명령하였지요.
그래야 이 거대한 성당은 자기가 지은 성당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건축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머릿돌에 자기 이름을 멋지게 새겨 넣었습니다.
그런데 왕은 그날 밤 아주 이상한 꿈을 꾼 것입니다. 꿈에 천사가 나타나더니
자기 이름을 지우고, 그 위에 한 가난한 과부의 이름을 새겨 넣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꿈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꾼 것입니다.
왕은 하도 이상해서 꿈에서 깨어 그 이름의 과부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왕은 그 가난한 과부에게
“성당을 지을 때 도대체 무엇을 했느냐? 나 몰래 건축헌금을 낸 것이 아니냐?”라고
호통을 치면서 물었지요.
그 과부는 벌벌 떨며 겁에 질린 목소리로 대답했다고 합니다.
“임금님, 저는 아무 일도 한 일이 없습니다.
임금님께서 헌금을 못하게 하시는데 어떻게 감히 헌금을 했겠습니까?
또한 교회건축현장에는 접근도 못하게 되어 있는데, 어떻게 헌금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너무나 교회건축에 동참하고 싶어서
벽돌을 나르는 말들에게 건초먹이를 조금 주었을 뿐입니다.”
왕은 건축가를 시켜서, 그 교회의 머릿돌에서 자기 이름을 긁어내고
이 과부의 이름을 기록하게 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당신께 봉헌하고 싶어 몸부림치는 사람을
너무나 기쁘게 받아들이신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가난한 과부 역시
주님께 봉헌을 하고 싶어 몸부림치시는 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었던 것이지요.
물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과부가 봉헌한 렙톤 두 닢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처럼 돈의 많고 적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을 싣는 정성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본당을 지은 신부님의 고백이 문득 떠올려집니다.
이 신부님께서는 본당을 지을 수 있게 된 것은
돈 많은 사람 덕분이라고 생각했답니다.
많은 돈을 가지고 있으니, 그들이 내는 많은 돈으로 인해서
아름다운 성전이 지어졌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본당을 다 지은 뒤에 결산을 하던 중에
신부님께서는 펑펑 울 수밖에 없었다고 해요.
왜냐하면 본당을 지은 사람은 소위 돈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 넉넉하지 않은 사람들 아니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즉, 부자가 낸 헌금의 액수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낸 헌금의 액수가 훨씬 더 많더라는 것입니다.
이 결과를 보고서 신부님께서는 이제까지 착각했었음을 깨달았답니다.
그리고 잘못 판단했던 자기 자신이 밉고,
봉헌한 가난한 신자들에게 죄송해서 미사 중에 펑펑 우셨답니다.
헌금을 많이 내는 사람. 그도 주께서 좋아하시겠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들의 따뜻한 마음을 봉헌하는 사람을 주님께서는 훨씬 더 좋아하시고 사랑하십니다. ▣ 헌신, 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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