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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을 잘 쓰는 지혜 2204

LNCK 2009. 11. 27. 14:45

◈마지막을 잘 쓰는 지혜            왕상17:8~16         09.11.08.설교스크랩



본문은, 엘리야 선지자가 사렙다 과부에게 보내진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1. ‘마지막’을 잘 사용하는 믿음


▲자기의 최후로 남은 것을 바친 과부

엘리야는 처음 보는 사람 아닙니까? 그러나 소문은 들었습니다.

그 주변의 모든 나라가, 엘리야의 영성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 소문만 듣던 하나님의 영적 지도자 엘리야를

지금 이 여인은 1대 1로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지혜로운 생각을 하지요?


‘어차피 죽어야 할 운명에 놓였다면,

밥 한 끼를 더 먹고 죽으나/ 안 먹고 죽으나..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래서 엘리야의 말에 순종합니다. 다른 것은 모르겠는데

이 여인은 엘리야에게, 분명한 고백 하나를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왕상17:12


‘엘리야가 하나님의 종인 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데, 오늘 만나게 되었으므로

내 인생의 마지막 시간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이 사람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

그리고 내 소유의 마지막 물질은, 하나님의 종이 명령하는 대로 내가 한번 해보자..’

이렇게 결심합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서,

그것을 자기와 자기 아들이 먹지 않고.. 엘리야 선지자에게 바쳐 버립니다.


▲간혹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것/ 최후의 것을 내게 바치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어떤 하나의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때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소원을 보면 이상합니다.

하나밖에 없는 그것을 요청하실 때가 많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이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모리아 산에 가서, 그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나라에 아들들이 그렇게 많은데, 하나님이 주신 아들을 왜 희생시키라 합니까?

반드시 이 이삭을 번제로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실 무슨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잔소리 말아라.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


②본문에서도, 밀가루가 넉넉한 집안에 엘리야를 보내면 안 됩니까?

꼭 가난한 그 과부 여인의 집에 가서

그 한 끼 식량 밖에 없는 것을.. 엘리야가 홀라당 먹어 치워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면, 이해가 되는 면이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도,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죽게 만드셨습니다.

‘나도 그랬어. 그래서 나도 요구하는 거야!’


어느 날 예수님은 성전에서 많은 사람이 헌금 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 중에 가장 적은 헌금 두 렙돈을 헌금하는 불쌍한 여인을 보시고

이 여인이 제일 많이 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이유가 뭔가요?

그것이 그의 마지막 소유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최후에 헌신한 사람 중에는,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는, 아마 일평생 나쁜 일만 열심히 해왔는데

이제 죽음 직전 몇 분을 남겨놓고, 자기 생명의 마지막 시간에

예수님을 바라보고 선한 말을 한마디 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인생의 마지막 몇 분의 시간에, 선한 말 한마디 예수님께 요청한 것이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얻어냈잖아요?


우리 인생에 마지막 남은 시간을 어디다 쓸 것인가요?

마지막 남은 나의 건강을 어디다 쓸 것인가요?

마지막 남은 나의 사랑을 어디에 사용해야 하나요?


그러면 언제가 나의 마지막인가요? 성경은 언제나 ‘오늘’이라고 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아무도 내일 일은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내일은 보장이 없습니다.

친절한 말 한마디가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내일은 사랑하는 자가 떠납니다.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면 지금 부르십시오. 해가 저물면 들을 사람이 없습니다.

미소를 짓고 싶거든 지금 웃으십시오. 당신의 친구가 곁에 있을 때!


간혹 중병에 걸리신 분들을 보면, 정말 하루가 ‘인생 최후의 날’인 것처럼

치열하게 전투적으로 사십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은 정말 어마어마한 열매를 거두며 사시더라고요.               *관련글 :  칼을 든 천사



◑2. 여인은 가난했지만, 물질보다 하나님을 우선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물질이 우상일 수 있습니다. 가난하니까요!

성경 곳곳에,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사랑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난한 과부에게 지극한 관심을 가지시고

당대 최고 영적 지도자 엘리야를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다 제치고,

원수의 나라 시돈 땅, 바로 그 빈곤한 여인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백성과 그 여인 가정을 살려내신 것입니다.

그 여인과 아들은, 한 끼 먹은 후 정말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말씀에 비가 올 때까지 계속 먹고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가난한 과부에게도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네 믿음을 한 번 보여줘 봐!’


오늘날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더 움켜쥘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난한데.. 나보고 뭘 어쩌라는 것이야?’

그런 자세는 가난한 가운데서도 ‘물질을 의지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여인의 위대한 믿음은..

가난한 가운데서도, 물질보다, 하나님을 더 우선적으로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최후의 소유를.. 하나님께 아낌없이 바쳐버렸던 것입니다.


▲사렙다 과부와 똑같이,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사렙다 과부와 비슷한 도전입니다.

‘네 마지막 남은 밀가루를 내게 바쳐라.. 그러면 먹고 산다.’는 요청이나,


‘네가 먹을까, 마실까 하는 것보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살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 그 내용은 똑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내가 얼마를 모아야지!’ 하고 살면..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낭비하지 말아야죠. 저축은 좋은 것입니다.

절대로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좋은 것good때문에, 최선best을 선택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얼마를 모아야지!’ 하는 사람보다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사람’을 우대하실 것은.. 당연합니다.


▲재미있는 글을 소개해 드립니다.

(어느 가톨릭 신부님이 쓰신 글입니다)


시골 본당에서의 일입니다.

주일미사에 참석하는 농촌 사람들의 얼굴이 늘 죽어 있었습니다.

강론 때 아무리 웃겨도 웃지 않습니다. 웃으려다가는 쑥 감춥니다.

뭘 시켜도 눈치만 보고 표정들이 항상 어두웠습니다. 처음에는 그 내용을 몰랐습니다.

가난과 일에 찌들어 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일 년 내내 ‘교무금’을 안 냅니다. 

(*교무금 : 교인의 의무헌금? 월정헌금/십일조 같은 것)

성탄절이 되어서야 그때 추곡수매한 돈에서 누구는 3만원,

또 누구는 5만원씩을.. 1년치 교무금이라고 냅니다.


그래서 제가 신자들에게 그 얘기를 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일년 내내 죽어 있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그것은 성당을 줄곧 외상으로 다니기 때문에 표정이 떳떳치 못하고 죽어 있다고.

그러니 매월 첫 주일에, 하루 일당을 맞돈처럼 내놓고 다니라’고 했습니다.                 *맞돈 : 외상의 반대말인듯 

맞돈 내놓고 성당에 다니라고 하니까, 신자들이 모두 웃었습니다.


그런데 이듬해 1월부터 교무금이 수백 퍼센트 인상이 되더니

첫 주일에 그것도 90% 이상이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신자들의 죽은 얼굴에 비로소 생기가 돌고 빛이 생겼습니다.

강론 때 웃기지 않아도, 신나게 웃으며 즐거워했습니다.

이젠 신앙이 즐거우니까 성당만 쳐다봐도 재미있다고 했습니다.

거짓말 같지만 사실입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하나님께 바칠 것을, 자기 양심에 거리낌 없이 바치고 나면,

하나님 뵙기가 훨씬 떳떳하고 자연스러워진다는 것입니다.

제가 직접 경험해 보니까.. 이게 사실이더라고요!



................................................. 더 읽으실 분 ...............................................



▲하나님께서 시돈 땅 사렙다 과부 집으로, 하필이면 그 가난한 이방 여인의 집으로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신 이유는... 또 다른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기근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뜻에서 하셨다는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엘리야의 교육을 위해서’라고 봅니다.


먼저 이 여인은 누구인가? 엘리야와 국적이 다른 시돈의 여인입니다.

엘리야의 마음에 움직일 수 없는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시돈 사람을 미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나라는 시돈에서 이세벨 왕비가 오면서부터

바알 종교가 온통 나라를 뒤집어엎어 정신문화가 다 망가졌고

하나님을 믿는 고상한 아브라함의 후손의 정서는 다 사라졌고

이로 인하여 이 땅이 이렇게 굶어죽는 하나님의 재앙과 심판이 임한 것이니까

원인은 시돈이다. 이세벨 왕비로부터 이런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민족간 종교 전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믿는 바알이 참 신인지 내가 믿는 여호와가 참 신인지

우리 내기를 하자. 이 내기에서 승자는 살고 패자는 죽도록 하자.”


그래서 갈멜산에서 바알 지도자 450명을 처참하게 다 죽여 버리잖아요?

지금 엘리야의 마음속에는 다 죽여 버려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돈이라는 곳은 아예 뿌리부터, 근원부터 없애버려야지

이곳을 그냥 두었다가는 영영 우리나라는 하나님의 재앙과 심판이 끊어지지 않는다.

원인을 제공한 이들을 다 죽여 없애버리자.’

이런 생각이 엘리야에게 가득 찰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엘리야를 시돈으로 보냈는가?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은 바알 종교이지 시돈 백성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도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의 마음을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틀림없이 민족 감정을 위한 종교 전쟁이 끝없이 일어나서

시돈은 피바다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엘리야는 450명 바알 지도자를 다 죽여 버렸잖아요?

그래서 엘리야를 교육시키는 겁니다.


적어도 시돈에 가서 3년 이상 살게 하셨습니다.

또, 이 집에서 얻어먹고 살게 하셨습니다.

원수 같은 국민일지라도 시돈에 혼자 사는 여인 집에서 3년이나 봉사를 받고

얻어먹었으니 시돈 사람을 미워할 수가 있겠습니까?


엘리야가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아!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은 이렇게 불쌍한 시돈의 백성이 아니라 우상 숭배이다.’


저는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일본에 가있는 한국 선교사들은, 일본을 나쁘게 말하는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일본 국민이 세계에서 제일 좋은 사람들이고 정직한 백성이고

우리 대한민국은 그렇게 많이 예수 믿으면서 이루지 못한 정직한 사회를

일본 사람들은 예수 믿지 않고 이미 오래 전에 이루었다. 우리는 오히려 부끄럽다.”


맞습니다. 일본 사람 욕하는 한국 선교사 한 명도 없습니다.

엘리야도 그렇게 된 겁니다.

그 전에는 이 사람들을 다 죽여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거기 가서 3년을 살면서 시돈 사람의 밥을 얻어먹다 보니까 마음이 순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은 바알이지, 시돈 사람들이 아닙니다.

구약에 수없이 나타나고 있는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절대로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바알이라고 하는 우상 숭배가 하나님의 미움을 받은 것이지

백성들이 받은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보면 갈멜 산에서 승리했다고 450명을 처형하는 엘리야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시돈 사람들은 죄 없이 다 죽을 수가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엘리야를 그 여인 집으로 보내지 않으셨다면

처참한 종교 전쟁과 민족 감정에 의한 피바다가 되었을 것이고

이 여인과 아들은 정말 그들이 말한 대로 마지막 식사를 하고 그때 죽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을 그 집에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그 참혹한 민족 감정의 종교 전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하셨고,

기근에 죽어야 될 이 여인과 아들을 살려내시고 시돈 백성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 헌신, 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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