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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되다 2221

LNCK 2009. 12. 8. 23:57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되다                           마5:6                           -인터넷설교 스크랩, 출처-



예수님이 보여주신 복 있는 사람의 첫째 모습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복 있는 사람의 둘째 모습은 "애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복 있는 사람의 셋째 모습은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가난한 사람의 모습이었고,

애통하는 사람의 모습이었고, 온유한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복 있는 사람의 네 번째 모습은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이 또한 주리고 목마른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 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1. (육신적으로)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병행구절 눅6:20절에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라고 말씀했습니다.

'의에 주리고'가 아닌, '그냥 육신적으로 배고픈'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복된 이유는.. 배고픔의 환경을 통해서.. 주님을 더욱 간절히 사모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1960~70년대, 우리 어머니들이, 얼마나 새벽기도 열심히 드렸습니까? 배고팠기 때문입니다. 약2:5참조

     

▲사실 예수님은 한 평생 주리시고 목마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었고 밀밭 사이로 가실 때는

시장해서 이삭을 잘라서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마25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 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느니라. 마25:35


예수님은 한 평생 주리시고 목 마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적으로만 주리고 목 마르셨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주리고 목 마르셨습니다.

즉 언제나 하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갈망하며 주리고 목 마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 있는 자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도 이 세상의 행복론과는 정 반대되는 행복론 입니다.

 

그러나 복의 근원이 되시는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므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일례로 배고픔의 주림을 생각해 봅시다.

배고픔과 목마름은 사실 너무나 힘들고 괴롭고 서글픈 일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고픔과 목마름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생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합니다.


생명의 귀중함과 음식의 귀중함을 알게 합니다.

부모님과 이웃과 하나님의 은혜의 귀중함을 깨닫게 해 줍니다.

낮아지고 겸손하게 해 줍니다.


탕자는 배고픔과 목마름 가운데서 생명의 귀중함과 음식의 귀중함을 알게 되었고

자기 자신의 오만 방자함의 죄를 뉘우치게 되었고

아버지의 은혜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손 들고 아버지의 품으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거지 나사로도 가난과 질병의 고통 가운데서.. 즉 주리고 목마름 가운데서

생명의 귀중함과 음식의 귀중함을 알게 되었고

겸손의 법과 하나님 경외의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결국 천국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6.25 전쟁을 겪은 우리 기성세대는 배고픔과 굶주림의 아픈 경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굶주림의 아픈 경험은,

돌이켜보니 우리들에게 값진 경험이었고 복된 경험이었습니다.

아니 한민족 전체에게 매우 값지고 복된 경험이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6.25한국전쟁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오늘과 같은 번영과, 세계선교의 귀한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지나치게 주리고 목마르면 북한 사람들처럼 죽게도 되지만

적당한 굶주림과 목마름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과 이웃과 하나님을 알게 하는

값지고 복된 경험이 됩니다.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 있는 자입니다.


▲사도바울의 주리고 목마름

더욱이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주리고 목마른 경험을 하는 자는 참으로 복 있는 자입니다.

사도바울은 주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주리고 목마른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11:27


내가 너희를 위하며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1:24


사도 바울은 주님을 위하여 그리고 교회를 위하여 주리고 목말랐습니다.

수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물론 그것이 인간적으로 보면 불행한 일 같이 보이지만

하나님적으로 보면 복 있는 일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님의 삶에 참예하는 복된 일이고

불행한 이웃의 삶에 참예하는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로 하여금 부요한 삶을 살게 하고

승리의 삶을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주리고 목마른 자의 축복’을 이렇게 역설적으로 묘사했습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6:9~10



◐2. ‘주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 있는 자입니다.   (이하 영적인 굶주림)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먹고 마시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몸은 음식과 음료가 없으면 주리고 목마릅니다.

즉 음식과 음료가 없을 때 몸이 주리고 목마른 것은 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은 다행한 일이고 복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은 영혼의 양식인 주님이 없으면 주리고 목마릅니다.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6:55

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살을 먹고 자기의 피를 마시는 자는

지금도 살고 영원히 산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요6:58


우리의 영혼이 주님의 살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시지 않을 때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주님의 생명을 섭취하지 않을 때

우리가 주리고 목마른 것은 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향한 영혼의 주림과 목마름을 가지는 것은

극히 다행한 일이고 복된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5:6


여기 ‘의’라는 말은.. 우리의 의가 되시는 ‘주님’으로 대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이렇게 고쳐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시편 기자는 주님을 향한 그의 갈증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이다. 시42:1~2


주님을 향한 목마름과 갈증이 있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고난에 처한 도 하나님을 찾기에 너무나 갈급했습니다.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그가 왼 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 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욥23:3, 9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 욥19:26~27


예수님도 세상에 계시는 동안 하나님을 갈망하며

하나님을 향한 주림과 목마름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주님을 향한 목마름과 갈증이 있는 사람,

주님을 향한 초급함이 있는 사람은 참으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갈급합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을 만나도 또 만나고 싶고

주님을 먹어도 또 먹고 싶고, 주님을 마셔도 또 마시고 싶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특성입니다.


여러분들 손자 손녀를 보아도 또 보고 싶고

안아도 또 안고 싶고, 만져도 또 만지고 싶지요.

이와 같은 갈증을 주님을 향해서 가진 사람은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에녹이 하나님을 너무 좋아하고 너무 사모하고

항상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니까

하나님이 그만 그를 자기 곁으로 데려가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복 있는 사람입니까?


데이빗 브레이너드가 주님을 너무 좋아하고 사랑하며 주님께 항상 기도하니까

주님께서 그만 그가 29살이었는데도 그를 자기 곁으로 데려가고 말았습니다.

그는, 에녹처럼, 참으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여러분들 지금 무엇에 주리고 목마릅니까? 혹시 세상 우상들 아니십니까?

주님을 향한 갈증으로 주리고 목마른 복이 있는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 있는 자입니다.


여기서 ‘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의(righteousness)라는 말은 ‘바르다’는 말입니다. ‘관계가 바르다’는 말입니다.


죄인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말은

하나님과 잘못된 관계에 있던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멀리 있던 죄인이 회개하고 믿음으로 하나님과 가까워졌고

이제는 ‘아바 아바지’라 부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의라는 말이 의미하는 또 하나의 뜻은

사람들과 잘못된 관계에 있던 원수들이 회개와 믿음으로

사람들과 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웃과 멀리 떨어져 있던 원수들이 회개하고 믿음으로

이웃과 가까워졌고, 이제는 형제자매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는 말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증진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증진하기 위해서 애를 쓴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닮고 싶어서 견딜 수 없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소유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어 한다는 말입니다.


이웃과 선한 관계를 맺고 싶어서 견딜 수 없고

사랑의 관계를 맺고 싶어서 견딜 수 없어 한다는 말입니다.


가정에서 의를 추구하고 교회에서 의를 추구하고

사회에서 의를 추구하며 애를 쓰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먼저 그 의를 구하는 삶이란?

지금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사회 안에는 의가 상실되어 가고

바른 관계가 깨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의를 추구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마6:33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기를 추구하고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걸 맞는 올바른 의로운 관계가

가정과 교회와 사회 안에 이루어지도록 애를 쓰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거룩한 관계를 유지하고

가족과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고

이웃과 선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도록 애를 쓰라는 말씀입니다.


의를 갈망하고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행복이 주어집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행복이 주어지지 않지만

의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행복이 주어집니다. 배부름의 축복이 주어집니다.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가 풍성하게 이루어지고

이웃과의 아름다운 관계가 풍성하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의를 추구하는 자에게 의가 풍성하게 채워집니다. 얼마나 감사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다윗이 의를 추구했을 때, 그에게 의가 채워졌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름답게 회복되었고, 이웃과의 관계도 아름답게 회복되었습니다.

천국에서는 물론이지만, 현세에서부터 의의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갈망하며 의를 추구할 때

나라가 바로 세워지고, 가정이 바로 세워지고, 교회가 바로 세워지고,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세워집니다.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  잠14:34


▲‘의에 대한 갈망’이 무엇입니까?

죄와 불의의 관계를 피하려는 갈망입니다.

하나님과의 거룩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갈망이며

이웃과의 깨끗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갈망입니다.


하나님을 닮고 싶어 하는 갈망이고, 이웃을 사랑하고 싶어 하는 갈망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란 죄와 불의를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갈망은 현세에서는 항상 계속되는 갈망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전한 의가 실현되고 채워질 때까지 항상 계속되는 갈망입니다.


이런 의에 대한 갈망을 가진 자가 복이 있는 자라고 말씀했습니다.

의를 갈망하며 의로 채워지는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의를 갈망하며 의가 되시는 주님께로 가기만 하면 됩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요7:37~38


의를 사모하십시다. 그리고 의가 되시는 주님께로 나아가십시다.

천국에서는 물론 이 땅에서도 의로 가득히 채워지는

풍족한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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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글 / 적 용 


▲내 원수와 좋은 관계(의)를 위하여, 그를 위해 하루 2시간씩 기도 했습니다>

한 ‘특별한’ 신자분의 생활 나눔을 전해 들으면서 얼마나 큰 감동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정말 제 마음에 들지 않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늘 얼굴을 봐야 하는 사람이다 보니 더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하는 행동 하나 하나가 왜 그리도 얄미워 보였는지 모릅니다.

내뱉는 말 한마디 한 마디가 가시처럼 제 가슴에 박혀

단 한 번도 그냥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보기만 봐도 속이 상하기에 가급적 마주치지 않으려고 기를 썼지만,

그럴수록 이상하게 더 자주 마주치더군요.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속이 엄청 상해서, 건강도 나빠졌습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지내다가 어느 순간 ‘내가 이래서는 안 되지’ 하는 생각에

그 사람만을 위해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하루 2시간씩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註. 아마 하루에 5~10번 나누어서 토탈 2시간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2시간이 아니라, 매일 10분씩만 그를 위해 기도해도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욥이 세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했을 때, 비로소 주님이 욥을 회복시키신 것처럼요!)

 

그렇게 몇 달을 기도했더니.. 글쎄 기적이 일어났지 뭡니까?

그 사람이 변하기보다 그 사람을 바라보는 제가 먼저 변하더군요.

그렇게 미워보이던 사람이 이제 그렇게 측은해보이고, 안 되 보였습니다.

불쌍해보였습니다. 그저 한 번 더 끌어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사람에게 그러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도리어 축복해주라는 예수님 말씀,

왼뺨을 치거든 오른 뺨마저 내어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요? 얼마나 큰 인내가 필요한지 모릅니다.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인지 모릅니다.


복음에 충실하려면 세속의 가치관, 세상 사람들이 지니는 보편적인 상식과의

충돌이 불가피합니다. 극도의 자존심 상함, 손해, 바보취급 당함, 박해는 필수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이런 분들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상급은 클 것입니다.


▲학생과 좋은 관계(의)를 이룬 선생님 

어느 시골학교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이 너무나도 소란스러워서

선생님께서는 떠드는 아이들 하나하나를 기억했다가

한꺼번에 교실에서 내쫓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이들을 복도로 내보내놓고 보니

교실에 남은 친구는 단 한명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남아있던 친구는

뒷자리에서 깊이 잠들어 있어서 다른 친구들과 떠들지 못했고,

선생님께서 아이들을 내보냈던 사실조차 몰랐던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을 다시 교실로 불러들이자니, 선생님 자신이 민망하고,

그 잠든 학생을 깨워서 수업을 하자니, 잠든 그 학생이 괘씸하게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은 잠시 고민합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잠시 동안 그 잠든 학생의 표정을 뚫어지게 보다가

아이의 옆 자리에 가서 책상에 엎드려서 잠을 잤습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자신이 잠든 그 자리에서 눈을 떠보니 벌써 어두워졌고,

선생님이 잠든 자리 앞에 자그마한 편지가 적혀져 있었습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저는 새벽에 일찍 일하러 나가시는 어머니를 따라 밭일을 도와드립니다.

그런데 그만 햇살이 너무 따뜻하고, 교실이 너무 편하게 느껴져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선생님께서 제 옆에 잠들어 계신 모습을 보고 말았습니다.


저를 깨워 혼내시지 않고,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부터는 졸지 않고 잠들지 않고, 수업 열심히 잘 듣겠습니다”라고.                            ▣ 믿음론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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