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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친 마리아께서 쓰임 받은 이유

LNCK 2009. 12. 26. 12:56

www.youtube.com/watch?v=u_19VO4CuTw&feature=youtu.be

◈모친 마리아께서 쓰임 받은 이유  눅1:26~38    09/03/02스크랩 

                                                                                                            

*원제목 : 성탄의 예고

 

 

 

◑1.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했기 때문 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 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 하니 눅1:26

 

▲주권적 은혜

마리아의 선택을 생각할 때, 가장 본질적 요인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의 은혜입니다.

토기장이 비유에도 나오듯이,  롬9:21

하나님이 왕을 세우시는 것도, 마리아를 택하신 것도 

오직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입니다.

    누구든지 그분이 원하시는 사람에게 그 나라를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단4:32, 17

 

그런데 이스라엘 땅에 탈무드와 토라로 잘 교육된 랍비의 딸들이

수도인 예루살렘에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 모든 도시의 명문가의 여인들을 택하는 대신에,

이방의 땅처럼 여겨진 갈릴리 지방에 속한 나사렛의            *마4:15 ‘이방의 갈릴리여’

(오죽하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 는 말이 생겼을 마을이었습니다)

평범하고 소박한 시골 처녀를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하나님의 주권>이 정답입니다

그렇지만 너무 ‘신학적 도식/공식’에만 얽매여서, 사고의 폭이 좁아질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을 가만히 보면, ‘하나님의 주권’이 열차의 기관차이지만,

거기에 따르는 ‘마리아의 신앙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은혜를 사모했기에 ‘은혜를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은혜를 사모하지 않아도, 은혜가 강권적으로 주어지는 경우도 간혹 있겠습니다만

은혜를 사모하는 가운데, 은혜가 강권적으로 주어지는 경우는 더 많습니다.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눅1:30

이 문장은 수동태로 보입니다만, 실은 능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영어성경에는 You have found favour (grace)with God.

 

이 말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는 말이지만,

그 속에 ‘그녀가 은혜를 간구했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왕이 행차할 때, 많은 시민들이 길가에서 왕의 은혜 입기를 간구합니다.

그런데 왕이 특별히 행차를 멈추고, 길에 늘어선 시민의 손을 잡아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를 간구하는 사람 중에/손 내미는 사람 중에’ 선택되어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아예 뒷전에 물러나 있는 사람, 기대하지도 않는 사람에게는, 해당이 안 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주권적 은혜/은혜의 주권성’을 너무 강조할 적에,

‘인간 편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너무 약화될 수도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은 ‘주권적 은혜’라고 하지만 (이 말이 맞습니다. 안 주시면 못 받습니다.)

그 속에 감추어진 ‘인간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죠.

 

이미 ‘은혜를 사모함’이 성모 마리아의 마음 안에 있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그녀를 주권적으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느 (김동호)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저는 어릴 적에 학교 사택에 살았습니다.

밤에 교회를 오가려면, 넓은 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야 되는데,

어린 마음에 퍽 무섭고 떨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찬송을 목청껏 부르며 다녔습니다.

 

돌이켜보니, 제가 오늘날 이만큼이라도 은혜와 복을 받은 것도

그때 열심히 부른 찬송 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 은혜 구하는 찬송 부른 것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보셨나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은혜를 구하지 않고, 대신에 물질적인 것을 구합니다.)

 

▲낮아지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가 임합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겸손은,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에게로 모이게 합니다.

 

혹시 ‘작년 연말에는 안 그랬는데, 금년 연말에는 왜 이리 감격이 없지?’

하는 분이 계십니까? 

내 마음에 ‘은혜의 감격’이 메말라 버린 것은.. 내가 그만큼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인류역사상 가장 큰 기적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그녀가 경험한 기적의 배후에 있었던

믿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눅1:34, "어찌 이일이 있으리이까?"  How shall this be?

회의적인 발언처럼 들리지요?

그러나 영어로 why(왜)가 아닌, how(어떻게)로 되어 있음을 보십시오.

 

 

이는 방법론에 대한 진지한 질문 이었던 것입니다.

즉, 동정녀 수태를 이미 자기 마음에 수용한 상태에서, 그 방법론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한글 개역은, 어떤 불가능한 것을, 마리아가 놀라서 의심하며 물어보는 식으로 들립니다.)

 

그래서 다음구절 35절에, 천사는 그 방법론을 대답해 줍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또한 눅1:45절에 보면 마리아가 이것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능력 곧 성령님의 능력을 신뢰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신비주의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신비를 모두 제거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설 자리를 잃어버립니다.

 

삼위일체를.. 어떻게 인간의 이성으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요?

예수의 부활이 과연 이성적인 논리로 다 설명이 가능하겠습니까?

시간과 공간 안에 가시적인 몸으로 다시 오리라고 약속된 그리스도의 재림을

과연 이해 가능한 인간의 이성으로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계시를 떠나서,

신비적 경험만을 추구하는 신비주의는, 우리가 지향할 신앙의 모습이 아니지만,

신비주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성경이 보여주는 신비조차 외면하는 이성주의도.. 우리가 피해야할 극단입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는 무분별한 신비주의의 피해가 넘쳐나지만

신비주의를 경계하기 위해서, 극단적 이성으로 스스로 무장하는 것도,

신비주의와 똑같은 반대쪽 측면의 극단extreme인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신비중의 신비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성육신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 속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성적이 되어야 하지만

때로는 이성을 넘어서서, 신비와 기적을 믿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리아를 쓰신 이유가 바로 

그녀는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기적/신비의 능력을 신뢰한/믿은 까닭이었습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눅1:37~38

 

마리아는 말씀의 능력을 고백하면서, 동시에 말씀에 순종을 고백합니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그러나 이 순종은, 대가를 요구하는 순종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처녀가 임신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즘도 간혹 유대와 가까운 이란이나 사우디에서, ‘명예살인’이 보도되고 있는데,

2천 년 전이야 오죽 했겠습니까?

 

그래서 마리아가 나사렛에서 아기예수를 출산하지 않고

멀리 떨어진 베들레헴에 가서 출산한 것은 (예언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지만)

어쩌면 ‘다행스런 사건이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여행 기간도 상당히 길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마리아는 이때 에스더 같이 ‘죽으면 죽으리이다!’는 결심을 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대가를 기꺼이 치르겠다는 순종’의 결단이

성모 마리아의 남다른 점이라고 생각됩니다.

 

▲믿음은 대가를 치러서 얻는 것입니다.

먼저 순종하는 대가입니다.

아브라함은 고향 아비 집을 떠나는 대가, 아들을 드리기까지 대가를 치렀습니다.

 

또한 거절하는 대가입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바로 궁궐의 모든 부귀영화를 거절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히11:24

거절할 것을 거절하지 않는 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금년에 나는, 무엇을 순종/거절했으며, 그래서 어떤 인정을 하나님께 받았습니까?

금년에 나는, 무엇을 순종/거절하지 못했으며, 그래서 어떤 인정을 놓치고 말았습니까?

(내년에 기회를 놓치지 말기 위해서, 반드시 짚어 보아야 합니다.)

 

금년에 예수 믿어서 손해 본 것(대가 치른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참된 믿음입니다.

손해 본 것 없으면.. 믿음의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군대 갔다가 첫 휴가 온 아들에게,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군대에서 배운 중요한 교훈이 무엇이냐?"

"순종(복종)이지요!"

 

"그건 나도 집에서 가르치지 않았더냐?"

"물론 이십니다. 그러나 군대는 나에게 지금 당장 순종할 것을 가르치지요!" 하더랍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매일 ‘주께서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것’을 민감하게 알아챕니다.

그래서 매일 당장 순종합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는 그렇게 매일/즉각 순종합니다.

 

    이제 왜 어떤 이들은 마리아처럼 쓰임 받는지,

    왜 어떤 이들은 쓰임 받지 못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