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히11:13 01.11.25.설교
*원제목 : 나그네처럼 살아야 하는 우리
◑주변성
프린스턴 대학교의 이상현 박사는
우리 기독교의 특성을 말하는 중에 그 하나가 주변성이라고 했습니다.
‘주변성’이란, 중심에서 쫓겨나고/ 중심에서 밀려난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밀려나서 갈릴리에서 살고,
예루살렘에서 쫓겨나서 사마리아에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강요된 주변성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주역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쉽게 말하면, 먼저 된 자 나중되고, 나중된 자 먼저되는 원리와 같네요.
이렇게 주변에 밀려난 사람이, 나중에 중심에 선다는 말입니다.
그 중심에 섰다가, 또 주변인에게 밀려나게 되겠네요.
그렇다면 중심에 섰을 때에도, 늘 주변인의 자세로 살아야 되겠습니다.)
자발적이든, 강요를 당하든, 고향을 떠나 나그네가 되고
그래서 가난하게 되고, 약하게 된 사람들이
결국은하나님 나라의 중심적인 일꾼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바벨론과 앗수르에 망한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면서, 온 세계로 퍼졌습니다.
그게 흩어진 유대인, 즉 디아스포라입니다.
그 흩어진 유대인들이, 나라 없이 수 천 년을 세계 도처에서 버텨오면서
실제 세계의 역사를 주도해 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1948년 다시 중동의 팔레스타인 땅에 자기 나라를 세운 것이
지금의 이스라엘입니다.
그 선조들의 얘기가 다 ‘나그네’ 이야기입니다.
‘나그네’로서 역사의 중심인물이 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어느 날, 갈대아 우르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내 친척, 본토,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말씀하시고
그를 들어서 이방 땅에 가서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일평생 고향 우르를 떠나,
낯선 가나안 땅에서, 행인과 나그네로 남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요셉은, 가나안을 떠나 애굽에서 나그네 생활을 합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사서 이집트로 팔려가죠?
엄청난 고생을 합니다.
그러나 ‘나그네’로서 애굽의 역사를 다시 쓰는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야곱을 보세요. 가나안에서 하란으로 나그네를 떠납니다.
형에게 죽음을 피해서 하란에 있는 삼촌내로 가서 20년 동안이나 종살이를 합니다.
그러면서 그도 역시 믿음의 조상의 대열에 끼게 됩니다.
그 야곱이 바로 앞에서 왕이 자기 나이를 묻자 그렇게 대답합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130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그렇게 대답합니다. 인생 전체를 ‘나그네’ 길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집니다. 이북에서 내려온 ‘나그네’들이 625후 한국경제를 주도했습니다.
이북에서 피난 온 영락교회가, 한 때 한국교회의 주축을 형성했습니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여년에 청춘만 늙어
부평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가 막혀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모세도 보십시오.
애굽 땅에서 태어났지만, 시내 광야에서 40+40년 동안 ‘나그네’ 되기를 자처합니다.
그러면서 출애굽의 놀라운 시대적/민족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나그네’로서 쫓기면서, 한 군데 머물러 살지 못하고 이리저리 도망 다녔습니다.
나중에는 왕궁에서 살았지만
거기서 계속 머물며 살 때, 그는 오히려 일생에 큰 오점을 남겼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나그네’의 표본이셨습니다.
하늘을 버리고 ‘나그네’로 이 세상에 오십니다.
나실 때 베들레헴 여관집 구유에 나십니다.
왜 예수님께서 여관집에서 나셨습니까?
인생은 모두 다 ‘나그네’요, 지구라는 여관집에 잠시 머무른다는 것을
친히 보여주심이 아닙니까?
그분은 살아계실 때도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
▲미국은, ‘나그네’들이 세운 나라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갔던 사람들이 나라를 세우고 지금의 미국을 세웠습니다.
원래부터 있던 인디언들에 의해서 미국이 미국 된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이 땅에서 ‘나그네’가 되게 하십니다.
철저하게 ‘나그네’라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땅에서 안주하는 자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모든 증거를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너희는 이 세상에서 살 때 ‘나그네’처럼 살아라.
언제나 ‘나그네’가 될 각오를 하고 살아라."
그것입니다.
◑적용
우리는 ‘나그네’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나그네’처럼 사는 것입니까?
▲1. 우선, 하나님은 항상 자녀들을 ‘나그네’로 떠나보내시는 섭리를.. 깨달읍시다.
나그네가 떠나지 않고 머무르려고 하면, 그것은 이미 나그네가 아닙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떠나보내십니까?
떠나봐야만 자기의 실존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떠나봐야만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떠나서 볼 때에 비로소 모든 사실을 제대로 보게 되는 겁니다.
마치 외국에서 살 때, 한국의 실체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같이 떠나보내셨습니다.
고향에 머무르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떠나보낸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입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노장사상에 매료된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 노자의 중심사상 중에서, 중요한 것은
도덕경에 나오는 공성이불거(攻成而不居) 사상입니다.
공을 이룬 후에는 머물지 않는다는 겁니다.
즉, 떠날 때 반드시 떠나라 이겁니다.
그때 떠나지 않으면 그 공은 무위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떠날만할 때에 떠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고요?
즉 나그네가 나그네 되기를 싫어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나님이 강제로 흩으십니다.
직접 하나님께서 손을 들어 빗자루로 쓸어버리듯이 다 흩어 놓습니다.
초대교회를 보세요.
초대교회 예루살렘 교회가 3천명이 모이고 부흥되니까
저들이 모이기를 힘쓰고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런 생각을 하십니다.
'아, 예루살렘 교회가 부흥되기는 하지만 이들이 벌써 땅에 안주하고 있구나!'
드디어 스데반 집사가 설교 중에 유대인들을 비난함으로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스데반을 칩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습니다.
행8:1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스데반이 죽은 후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기독교인들이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으로 흩어졌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기독교의 복음이 세계화되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나그네가 되어야 선교가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핍박과 고난이 따랐고,
그 섭리에 따라 이스라엘은 나그네로서 세계에 흩어져갔던 것입니다.
▲영혼이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하며 삽시다.
떠난다는 것은.. 꼭 몸이 떠나라는 것만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도 이 세상을 떠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언제고 죽음을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죽음을 생각할 때만이 실존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죽음이 오지 않을 것처럼 살면, 언제나 불안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하기도 싫을 터이지만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죽음을 준비하는 그 모습
그것이 나그네의 최우선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우리 모두가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이곳은 영원히 머무를 곳이 아닙니다.
▲2. 떠나는 나그네는 짐이 가벼워야 합니다. 가볍게 삽시다.
아브라함은 어느 곳에 가든지 가는 곳마다,
성을 쌓지 않고, 그곳에 장막을 치고 가볍게 살았습니다.
천막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치기 쉽고, 걷기 쉬운 집입니다.
가인과 그 후예들은 어떻습니까?
가는 곳마다 성을 쌓고 무겁게 살았습니다. *관련글: 346 전쟁과 평화
그러나 아브라함과 그 후예들은, 가는 곳마다 장막을 치고 가볍게 살았습니다.
의식주를 가볍게 하면서 살았다는 말입니다.
나그네는 떠나서 가볍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집착, 고향 집착, 돈 집착에서 떠나 가볍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여행을 할 때 짐을 많이 가지고 다니면 어떻게 됩니까?
여행을 맘대로 할 수 없습니다.
짐이 무거우면 얼마나 힘드는지 모릅니다. 또 짐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짐에 대한 걱정을 하기 때문에.. 여행을 즐길 수도 없습니다.
짐이 가벼우면, 인생의 여행도 즐길 수가 있습니다.
너무 크고 좋은 집을 짓고 살면 모든 관심이 집에 쏠리게 됩니다.
러시아의 어떤 지방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관에 구멍 2개를 뚫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관 밖으로 두 손을 내 놓습니다.
관이 움직일 때마다 두 손이 출렁입니다.
그 동네사람들이야 관습이기 때문에 괜찮지만
방문객들은 그 장례행렬을 보노라면 섬뜩함까지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때 상여꾼들이 노래합니다.
"인생이란 이렇게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나그네라오~"
빈손임을 강조하는 것이 그 지방의 장례풍습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아예 지금부터 가볍게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것이 오늘 베드로 사도가 우리에게 권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그것은 다름 아닌 짐을 가볍게 하라는 것입니다.
소유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뜻도 됩니다.
우리가 나그네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나머지 필요는, 하나님이 다 책임져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아시고 나그네로 사시는 동안, 여러분의 짐을 가볍게 하시기 바랍니다.
▲3. 나그네는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나그네의 설움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누굽니까?
같은 나그네입니다. 고국을 떠나 사는 우리야말로 가장 전형적인 나그네입니다.
그래서 나그네가 나그네를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 나그네에 대한 관심이 성경 도처에 나타나 있습니다.
신10:19에 보면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라”고 했습니다.
마25:35에는“나그네를 영접하라”고 했고,
딤전3:2에는“나그네를 대접하라”고 했습니다.
벧전2:12절에도 나그네들은 "이방인 중에서도 행실을 선하게 가져야”한다고 했습니다.
나그네들은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함께 걸어가는 다른 나그네들을 도우면서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제일 서럽고 화날 때가 언제입니까?
차별대우를 받을 때입니다.
나그네고, 이방인이고, 외국인이라고 깔볼 때 제일 속상합니다.
알고 보면 자기들도 나그네인데, 나그네가 나그네를 못 알아봅니다.
그래서 특별히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에게 친절히 도와줍시다.
▲4. 나그네는 본향을 사모하면서 삽니다.
나그네로 살면서도 소망이 있는 것은 왜입니까?
목적지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나그네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하루 밤 자는 여관과 같습니다.
영원히 머무를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갈 곳은 따로 잇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저 천국이 우리의 영원히 살 곳입니다. 거기가 우리의 고향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곳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돌아갈 본향이 없다면 우리는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사도바울도 고전15장에서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15:19)
왜 그렇습니까?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얼마나 세상 것들을 포기해야 됩니까?
시간들이죠? 돈 들이죠? 봉사해야죠?
거기다가 좋아하는 것 맘대로 하지 못하지요?
그리스도인이라면 일생동안 이런 굴레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살고서도.. 우리의 삶이 이생뿐이면 우리는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있습니다.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처럼 짧지 않습니다. 영원히 사는 겁니다.
우리가 나그네로서 여행하면서 가장 큰 위안은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겁니다.
배낭여행을 한 형제자매들이 이구동성이 뭐냐 하면
첫 1~2주간은 참 좋은데..
한 달이 지나면.. 여행이고 뭐고,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겁니다.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우리도 돌아갈 나라가 있고, 집이 있습니다.
또 나그네로서 살다가 영원히 돌아갈 하늘나라가 있습니다.
나그네는 그 본향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목적지가 분명한 나그네입니다.
그래서 갈 곳 없는 나그네는 나그네일 수밖에 없지만, 우리는 순례자인 것입니다.
목적지가 분명하므로.. 나그네라 그러지 않고, 더 정확하게 순례자인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지가 분명한 이상, 우리는 나그네로 떠돌지 않습니다. 방황하지 않습니다.
..................................... 설교에서 전략된 부분......................................
▲가수 최희준은 일생동안 단 한 곡의 희트곡으로 먹고 살았습니다.
그 노래제목이 <하숙생>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아시는 분이 많을 겁니다.
한 노래가 수십 년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노래는 나름대로 철학이 있는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겁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의 방랑하는 모습과 같다는 겁니다.
그 길의 시작이 어딘지도 모르고, 끝이 어딘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언제나 떠나야 되는 게 인생이라는 거지요.
그러니 어디에 있더라도 정을 깊이 주지 말자는 거예요.
떠나게 되더라도, 미련을 갖지 말고 깨끗하게 떠나자.. 그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2절 가사는 끝까지는 다 모르고 처음만 좀 생각이 나는데
"인생은 벌거숭이 맨 손으로 왔다가 맨 손으로 가는 것.." 그렇게 나갑니다.
너무 세상에 미련갖지 말자, 너무 아등바등 살지 말자..
뭐 그런 내용으로 끝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인생에 관한 탁월한 안목이, 여러 사람의 공감을 산 것 같습니다.
▲저는 ‘나그네’라고 하면, 첫 번째로 떠오르는 인상이
1970년대 영화중에서 <튜니티 시리즈>가 있었습니다.
둘이 형제인데, 총 하나를 차고 황야를 누빕니다.
악당이 있는 곳에 가서, 악당들을 다 물리쳐주고 동네를 평화롭게 한 다음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아쉬워하는데도,
거기서 함께 살자고 해도.. 또 말을 타고 황야 속으로 사라집니다.
참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들인데.. 굉장히 멋있어 보였습니다.
이렇게 나그네라면 낭만적인 인상도 있습니다.
(꼭 이렇게 따라하시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저 멋있었다는 것이죠.)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나그네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하십니다.
①벧전2:11~12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우리가 나그네요, 행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나그네가 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 인생이 나그네라는 사실을 밝혀 주는 것은
여기뿐만이 아니고, 성경의 여러 군데에 나오고 있습니다.
②역대상 29:15에 보면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라고 우리 인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③또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
우리는 주 앞에서 모두 객이요, 거류자라는 말씀이 시편 39편에도 나옵니다.
④또 우리가 믿음장이라고 말하는 히브리서 11:13절에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 삶의 통찰력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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