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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자와 병든 자 2251

LNCK 2010. 1. 6. 22:14

◈건강한 자와 병든 자                      마9:9~13                            07.12.20.설교녹취



◑본문 설명: 세리 마태를 부르시다


예수님이 세관에 앉아 있던 세리 마태를 부르시고 나서,

마태는 (아마 그 날) 자기 집에서, 예수님을 초대해서 잔치를 연다.

아마 마태가 세리의 직업을 퇴직하는 ‘송별회’를 겸한 자리 같다. 마9:10

왜냐하면 그 자리에 제자들은 물론, 여러 세리들도 같이 초대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같은 ‘만인에게 지탄받는 직업’을 가진 자를

자기 제자로 부르시고, 함께 잔치 자리에 앉으신 예수님을 보고서 비난하니까..

예수님이 그들의 비난에 대해 유명한 말씀을 하신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마9:12


 

◑왜 하필 ‘세리’를 부르셨는가?


▲세리를 제자로 선택하신 것은, 상당한 위험risk을 떠안는 것이었다.

세리는, 전 국민이 공인하는 매국노이다.

세리 한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좋겠지만,

그 한 사람 때문에.. 아마 열사람, 백 사람이 등 돌리고 떠날 위험이 있었다.


세리 한 명을 내 편으로 만들어 버리면,

예수님은 사실 만인을 버리신 꼴이 된다.


세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할 때,

그러면, 세리와 원수지간으로 지내고 살아가던 수많은 유대인들...

그들은 자동적으로 예수님과도 원수지간이 되고, 등 돌릴 위험이 있었다.


더욱이 예수님의 지혜는.. 정말 보통 사람이 따라갈 수 없는 경지인데...

그 높은 경지의 지혜로 선택하신 제자가, 고작 ‘세리’라니..

정말 보통 사람의 지혜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이런 위험risk을 고스란히 떠안고, 세리 마태를 부르신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세리도 제자로 선택되었다면, 세상사람 누구나 다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그 어떤 죄인도 용납하신다는.. 그 넓은 사랑을 보여주신demonstrate 것이다.


그러나 저는, 그 보다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어지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마9:12

라는 말씀과 연관지어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어떤 기준이나/사람평가의 틀/가치관 들을

허물기 원하셨던 것이다.> 


▲이런 사실/본문을 오늘 나에게 확대 적용시키면,

오늘 나의 가치관도, 어쩌면 예수님의 가치관과 상당부분 틀릴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 신자들이 많이 기도해도, 기도가 잘 응답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내 가치관이 예수님과 다른 것이다.

예수님 보시기에 무가치한 것들을.. 내가 기도로 열심히 구하니까..

예수님이 그 기도를 무시해 버리신다고.. 저는 생각한다.

예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들을.. 내가 구한다면.. 반드시 주실 것이다.


어쨌든, 예수님이 상당한 위험을 떠안으시면서, 세리를 제자로 삼으신 본심이

이 말씀에 녹아나 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마9:12

예수님의 관심은, ‘스스로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든 자’에게 있다는 것이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다.


오늘날 내가 예수님을 깊이 만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기 스스로 의롭다고 자처하는 소위 ‘건강한 자’는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예수님을 못 만난다.

그 깊은 복음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그 은혜를 깊이 체험하는 사람은

자기를 낮추고, 세리와 같이 자기 스스로를 ‘병든 자’라고 자각하는 사람이다.

이런 ‘병든 자’ 의식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이 찾아와서 만나 주신다.


그래서 남편이 돈도 못 벌어오고 말썽을 피워도,

자녀가 말을 안 듣고 문제를 일으켜도,

자기 건강이 좋지 않아서 염려가 많아도..


그런 저런 이유로라도 ‘자기 심령이 가난하게 되고, 병들게 되면’

오히려 예수님을 만나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반대로, 남편이 돈도 잘 벌고, 자식이 좋은 대학에 들어갔는데,

그런 이유들 때문에, 스스로 의롭게 여기고, 그렇지 못한 이웃을 무시하고,

소위 말해서 스스로 ‘건강한 자’로 자처하다가는..

예수님과 멀어져서 영혼이 늘 메마르게 된다.


우리가 보기에는, 삶에 역경이 많은 사람은.. 버림을 받은 것 같고,

삶에 그저 평탄하고 무난한 사람은.. 은혜가 넘칠 것 같지만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도 내 심령이 메마른데.. 내가 그 이유를 모를 수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스스로 ‘건강한 자’로 자처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심령이 누군가를 판단하고, 그래서 사람들을 아래로 보고, 내가 영적 교만에 빠질 때

신기하게도 예수님은 나를 떠나가신다.

그래서 내 삶에 감격과 은혜가 사라지고.. 내 영혼이 메마르게 된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듯이

예수님은, 자기 영혼이 '병든 자/상한 자'를 찾아가시기 때문이다. 

 

▲참 이상한 딜레마

지금 사업이 쫄딱 망한 사람은..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또 갑자기 중병에 걸린 사람은..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내 죄가 무엇일까?’


그런데 교회생활 무난하게 잘 하고,

은행에 잔고도 좀 넉넉하고,

학력과 재능, 외모라도 좀 남에게 번듯하게 내보일 게 있을 때,

자녀가 잘 나갈 때... 이런 모든 이유들이... (그래서는 안 되는데) ‘나를 스스로 의롭게 만든다.’

 

오늘 내가 이런 상태에 있으면,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다!'는 예수님의 경고를

명심해서 묵상해야 한다.

 

성도는 잘 못 살아서 넘어지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잘 살아서 넘어져버린다.

 

하나님의 복을 받기 전에는, 열심히 믿었는데,

하나님의 복을 받고 나서는, 나태하고, 은혜가 고갈된다. ... 이것이 성도의 딜레마이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축복을 받았더라도 '나는 병든 자'라는 의식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야 의사되신 주님이, 나에게 찾아와 주신다.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마9:12

    사실 우리는 매일 죄를 지으므로, 매일 영혼의 병이 들게 되어 있다.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으시는 주님


예수님은 이 유명한 구절(마9:12)을 긍휼과 연관지어 설명하신다.

즉, 예수님이 세리를 부르셔서 제자 삼으시고,

'건강한 자'보다, '병든 자'를 찾아가시는 이유는.. 예수님의 <긍휼> 때문이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9:13


▲갓 결혼한 새댁이 ‘집들이’ 할 때 보면,                                *집들이 : 친구를 초대해서 신혼집을 공개하는 것

보통은 친정어머니가 사전에 반찬을 다 해 주시고, 상을 다 차려 주시고,

막상 손님이 오기 전에, 친정어머니는 먼저 자리를 피해 주신다.


그러니까 새댁이 훌륭한 만찬식탁을 차렸지만,

사실은 그게 죄다 친정어머니의 공로요, 은혜이다.


그런데 손님들은, 새댁보고 ‘상을 잘 차렸다’고 칭찬을 한다.

이럴 때, 새댁이 얼굴이 빨개지면서 당황하고 미안해하는 마음..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인이 가져야 하는 마음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돈을 잘 벌든지, 명문대를 나오든지

사실은 친정어머니 같은 하나님이 배후에서 다 차려주신 상이다.

내가 그것을 ‘내가 차린 만찬 상 table’처럼 떠벌리고 자랑할 수 없고,

도리어 얼굴 빨개지며 당황하고 미안해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내가 차린 상처럼.. 자기를 자랑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렇지 못한 이웃들을 멸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돈이 좀 있는 사람은.. 한결같이 ‘건강한 자’로 둔갑해 버린다.

아마 ‘내가 그래도 남보다 의로우니까, 이만큼 하나님께 물질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예를 들면, 값비싼 차를 몰고 다니고, 값비싼 점심을 먹는 것을

그럴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다 ‘건강한 자’ 의식에 빠진다.

자기를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것이다. 물질이 그런 의식을 은연중에 준다.

‘돈이 양반이다’는 의식 말이다.


건강한 신앙인은, 위의 새댁의 예처럼,

돈을 많이 벌어서, 값비싼 음식을 먹을 때,

당황해하고, 미안해해야 한다.

사실은 자기가 차린 상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차려주신(돈을 벌게 하신) 상이기 때문이다.


부부가 둘 다 명문대 출신 부부

그들은, 자기 자녀 중에 하나는 공부를 잘 하는데, 하나는 공부를 못할 수 있다.

그러면 공부 못하는 그 아이를.. 부모가 도저히 이해를 못하는 것이다.

그 부모가, 공부 못하는 자기 아이를 쳐다보는 눈길조차.. 차갑다.

이것도 일종의 ‘자기 의’요, ‘스스로 건강한 자’ 의식/착각인 것이다.


여러분, 그렇게 공부 잘 해서 명문대 들어간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공부를 열심히 했다기보다는.. 어쩌다보니 명문대 들어간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좋은 머리/공부 머리’를 주신 것이다.


그러면 공부 못하는 아이를 보면.. 불쌍히 여겨야 하는데,

그런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공부 못하는 아이를 보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은혜(공부 머리)를 다 잊어버리고

<판단>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다.


▲여러분, 우리 선교회 빌딩의 같은 건물에 술집도 들어와 있다.

그래서 새벽에 출근할 때 보면,

술집에서 비틀거리며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가 있다.


밤새도록 그 술집에서 술 마신 사람들,

그들을 볼 때, 긍휼히 여기는 마음 없이,

‘어휴, 저 인간 같지 않은 것들!’ 하며 비판하는 마음만 든다면..

그것은 내가 ‘스스로 건강한 자’ 의식에 빠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내가 술 안 마시는 성도가 된 것은.. 위의 새댁 예화처럼..

친정어머니 같은 하나님께서 다 차려주신 상이다.


그러므로 밤새 술집에서 술 마신 사람을 보면,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이라서, <긍휼>한 마음이 들어야..

내가 참 그리스도인이다. 비판에 앞서..


▲십자가에 달린 나를 보실 때.. 하나님은 긍휼을 느끼신다.

여러분, 부모가 자식이 가장 애처롭고, 긍휼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린 자녀가 병원에 입원해서,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을 볼 때이다.

이때 불쌍한 마음이 안 드는 부모는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실 때는

내가 십자가에 달려서, 애처롭게 피를 흘리고 있을 때이다.

이때 주님은 말씀하신다. <병든 자에게라야 의사가 필요하니라!>


그래서 예수님은, 위험을 무릅쓰고 세리 마태를 제자로 뽑으시고,

한 마리 잃은 양을 구하기 위해서, 99마리 양을 우리에 버려두셨다... (후략)

 

▲'긍휼'이란 말의 헬라어는 '레하임'인데, 그 어근은, 레켐(자궁)이다.

사람이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곳은, 바로 태아가 살던 엄마의 자궁이다.

하나님의 긍휼을 받는 사람은.. 내가 하나님의 자궁 안에 들어있음 같음을 느낀다.

 

여러분, 우리는 늘 자신의 연약함과 죄성을 돌아보며, 스스로 '병든자, 죄인'으로 여겨야 한다.

그 때 의사되신 예수님이 찾아와 주셔서, 긍휼을 주시는데,

그것은, 마치 내가 주님의 자궁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평안함을 느낀다.

 

    바꾸어 말해서, 오늘 내 마음에, 그런 주님의 자궁 안과 같은 평안한 '긍휼'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오늘 내 스스로가 '건강한 자'로 여기고 있고, 동시에 내가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있다는 반증이 된다.  

 

.................................................

 

▲소아암으로 두 눈을 실명한 동진이의 어머니의 간증

 

동진이가 생후 9개월째 되었을 때 안구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두 눈을 다 실명하였습니다.

게다가 남편의 부도로 엄청난 빚을 져야 하는 상황에서 겪었던

절망과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전도를 받아 교회를 나오게 되었답니다.


몸부림치며 기도도 해 보았지만, 어려워져 가기만 하는 형편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 의심하는 마음도 생겼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훈련을 통해 회개의 눈물과 성령 충만의 감격을 경험하였답니다.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고 나니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깨달아지더랍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고통뿐이라고 생각되었던 일들에 대하여도

감사한 조건들이 깨달아져서 많이 울었답니다. 


“지금 저는 세상적으로 볼 때 가진 것이 하나도 없이 보일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앞을 보지 못하는 아들과, 남편, 그리고 아직도 빚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활은 행복 그 자체입니다.


내게는 내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사 내게 주신 특별한 선물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더욱 더 감사하며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죄, 복된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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