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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권에 대한 야곱의 오해

LNCK 2010. 2. 16. 14:06

 ◈장자권에 대한 야곱의 오해       창27:1~10       인터넷설교 스크랩, 정리

                                                      *원제목 : 커피 자동판매기

본문의 야곱은 ..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관심 없고,

장자의 축복을 받기만 하면.. 큰 복을 받을 줄로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해프닝으로 인해, 오히려 고난만 바가지로 받았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하나님은, 야곱을 점점 변화시키시고, 하나님과 관계가 가까운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신 후에

비로소 참 복(언약의 백성됨)을 야곱에게 부어주십니다. 

 

 

▲질문

야곱이 속여서 장자권을 탈취하는 장면을 읽을 때마다,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늙어서 시력도 침침해지고, 감각도 둔해진 아버지 이삭을 속이기 위해서

엄마 리브가와 공모해서

야곱이 염소 털로 자기 몸을 감싸고, 에서의 옷을 가져다 입고 하는데,

마치 사극에 보면, 궁중에서 일어나는 권력다툼을 위한 정말 치졸한 속임수처럼,

거짓이 횡행하는 그런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기는 겁니다.

그렇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고,

무슨 사기극을 벌여서라도 장자권을 탈취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 장자권을 갖고 있는 자에게 정말 ‘큰 복’을 내려주시는가요?

하는 의문이 듭니다.   주1)

 

▲커피자판기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커피 자동판매기는 여러분이 다 아시지요?

200원 집어넣으면 컵이 툭 떨어지고 커피가 주르륵 내려옵니다.

 

이렇게 자동판매기가 커피를 내주는 것은,

그가 누구이든지 불문하고, 무조건 200원만 집어넣고 단추를 누르면 됩니다.

 

사기꾼이 와서 눌러도 마찬가지고

성자, 도덕군자가 와서 눌러도 마찬가지고

방금 살인을 마친 죄인이, 피 뭍은 손으로 200원을 넣고 단추를 눌러도

커피를 주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위에서 제기한 의문이.. ‘장자권은 꼭 커피 자판기 같은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만 받기만 하면

(커피가 나오듯이) 하나님의 축복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입니까?

오토매틱으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그런데 우리 신앙생활에, 사실 <커피자판기 같은 믿음>이 실제로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 우리 생활 속에 무지하게 많아요.

내가 ‘봉사’라는 토큰을 집어넣으면

내가 ‘기도’라는 토큰을 집어넣으면

내가 ‘선행과 구제’라는 그런 200원을 집어넣으면

커피 컵이 덜컹 떨어지듯이.. 하나님은 무조건 복을 주신다... 많이들 이렇게 믿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종종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며 신앙생활 합니다마는,

커피자판기는 그럴지 몰라도,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커피 자판기는 그냥 '기계'이고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신 인격'이시거든요. 하나님은 기계가 아니십니다. (이런 말 자체가 외람되지만)

 

▲복 받기 위해 하는, 기도/봉사/헌금이 무용하다useless는 뜻은 아닙니다.

더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신앙은 일단 ‘하나님과 나와 인격적 교제 관계’ 위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 내가 무지하게 좋아하는데

하나님 자신에 대한 관심은.. 내게 거의 없고,

인격자이신 하나님 자신에 대한 관심은.. 아무것도 없고 (이게 사실은 신앙의 본질인데)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이 너무너무 좋아서

 

마치 하나님이 ‘자동 복 판매기’이신 것처럼

우리가 여러 가지 토큰을 집어넣고, 복 컵이 떨어지기를 무조건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헌금하고, 봉사하고, 전도하고, 성가대 하는 목적이.. 다 토큰이예요.

‘복 자판기’에 넣는 토큰!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해서 봉사해야 하는데,

오직 ‘복 받기 위해서’ 봉사하는 겁니다.

 

똑같은 제비 다리를 고쳐주어도,

흥부는 제비가 불쌍해서/사랑해서 고쳐주었어요. (본질)

그러나 놀부는 복 받겠다는 심보로, 제비를 고쳐주었어요. (목적이 변질)

 

또한 똑같이 두 처녀가 부잣집 남자 만나 결혼을 했는데,

한 사람은 남자를 사랑해서 헌신하고 봉사하는데,

다른 한 사람은 남자에게 뭐 타낼 것만 늘 염두에 두고 있어요.

두 새댁이 같이 식사준비를 하지만.. 두 사람은 천지차이로 다른 것이지요.

 

과거에 그런 설교가 너무 많았던 적이 한 때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그 교제의 기쁨, 감격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복을 남보다 더 많이, 더 쉽게 빼낼 수 있을 것인가?’

 

마치 하나님을 ‘복 자판기’처럼 생각하고,

‘기도, 봉사, 헌금의 토큰을 많이 집어넣어라!’ 라고 가르친 적이 많았다는 것이죠.

(물론 우리 모두가 그 때는 잘 몰라서 그랬습니다만..)

 

과거에 저도 그런 설교를 많이 했어요.

봉사하세요.. 하나님께서 복주십니다.

충성하세요.. 하나님께서 복주십니다.

기도하세요.. 하나님께서 복주십니다.

 

하나님은 (마치 자동판매기처럼)

우리가 입력을 하면, 반드시 출력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이런 투로 설교했던 적이 많아요.

 

그런데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무시하고,

인과응보 적으로, 심은 대로 거두는 식으로

헌금 얼마 했으니, 곱하기 몇 배(사실은 최소 30배) 달라고 요구한 적이 많았죠.

 

▲그런 것을 장려하는 성경구절도.. 성경에 있습니다.

제일 잘 인용되는 구절은 ‘심은 대로 거두리라’ 입니다.

맞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 다는 말씀이 틀리다는 것은 아니고요,

'심은 대로' 와 '거두리라' 사이에  <하나님과 친밀하고 가까운 교제 관계를 가진 가운데서>가 삽입됩니다. 

그걸 줄여서 '심은 대로 거둔다'고 말하는 것이지..   (‘죄’를 심어 ‘벌’을 거두는 경우는 예외)

 

그런 인격적 관계를 일절 무시하고,

무슨 토큰 심으면, 복이 와르르 떨어져서 거두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뻥튀기 기계처럼, 뭐든지 넣기만 하면, 와르르 크게 거두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반드시 거기에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

가 중간에 들어가야 .. 이게 원래 신앙의 원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친밀한/인격적 관계에 들어간 사람은

‘세상 복’을 그렇게 애타게 바라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내게 필요한 것을 주시겠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잔이 넘칩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세상 복’에 갈증내고, 그거에 목숨 걸지 않습니다.

자기 삶에 하나님으로 인한 참 만족과 행복이 있으니까요.

                                                                 

☆관련글 : 배부른 상태에서 봐야 정확하다 rfcdrfcd.tistory.com/15972460

 

해외선교도 마찬가집니다.

'지역교회/성도가 해외선교에 적극 참여하니까.. 복 주시더라..'

이걸 자세히 풀어서 설명하면

'지역교회/성도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고, 그래서 해외선교에 헌신하면.. 복 주시더라'

이렇게 해야 말이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해외선교 열심히 하고도.. 얼마든지 복 못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설정 없이' 어떤 이기적 목적으로 해외선교에 뛰어들 때.. 그렇습니다.

 

해외선교도, 교회봉사도, 국내전도도

얼마든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없이도'.. 자기가 투신하고 뛰어들 수 있습니다.

야곱이 '장자권'을 따 낼 때.. 그랬다는 것입니다. '묻지마'식으로 밀어부쳤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우리 신앙의 문제에요. 성경에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다.’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잘 지키면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가도 복을 받으리라.’

 

‘이렇게 지키면 주리라/받으리라’.. 하는 얘기가 많이 있어요.

이것을 조건인 것처럼 생각(오해)하게 됩니다.

 

이 말씀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생기는..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도..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 언약백성의 관계에 들어가는 겁니다.

율법(언약의 계약조건)을 지킴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었으니..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해주시고, 필요한 복도 주시겠죠.

 

‘복 같은 것은 필요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복 이전에,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게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하나님도 나를 사랑하셔서.. 복/보호/은혜를 내려주시는 것이지요.

(여기서 복도 너무 ‘물질적 복’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걸 논하는 자리가 아니니까, 일단 건너뛰고..)  

아니면 하나님은 ‘복 자판기’와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계(복 자판기)가 아니시고, 인격이십니다.

일단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깊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정말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선입니다.

 

그런 것 없이, 그런 것 강조 없이

give and take식으로.. 토큰/봉투 놓고 복을 뻥 튀겨서 돌려받겠다는 것은

샤머니즘 신앙이 기독교와 혼합(대치)된 것입니다. 혹은 '도박/배팅 심리'와 비슷하네요. 

 

▲본문에 야곱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오해한 것이지요.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장자의 축복만 받으면..

하나님이 복을 자기에게 소나기처럼 부어주실 줄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야곱은, 그 장자의 복을 받자마자, 20년 동안 타국에 가서, 산전수전을 다 겪습니다.

복은 커녕.. 산전수전 다 겪는.. 고난의 삶이 시작됩니다.

아버지 이삭의 재산은 -성경에 자세한 언급이 없지만- 아마 에서가 차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임종도 지켜보지 못했습니다. 외국에 살았으니까요.

정작 축복을 받고 나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은 결과로.. 고생만 실컷 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결국 야곱이 복을 받기는 받지만,

‘자기의 신앙인격이 성숙된 후에’

‘하나님의 축복을 담을 자기 그릇이 만들어진 후에’

점차적으로 야곱이 복을 받아가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형 에서와 아버지를 속인 그대로

레아를 라헬로 오인하여 초야를 치르는, 그런 똑같은 속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속이는 자 야곱을.. 점점 고난을 통해 변화시켜 가셨습니다. 

 

▲소설가의 글자 속에는 소설가의 혼이 들어있습니다.

시인의 글속에는 시인의 정신과 혼, 감동이 들어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영이신 하나님의 존재가 들어계십니다.

 

그러므로 주야로 말씀을 묵상한다고 하는 것은

그 글자 속에 들어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내가 가득히 찬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내 안에 들어오신 인격자이신 하나님과 내가 교제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인격자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이려고 하지는 않고,

‘말씀 지키면 복 받아!’ .. 무조건 이렇게 (잘못) 나가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믿음의 가장 특징적인 측면이었습니다.

십일조를 드리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며, 구제하며.. 다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복을 받아 마땅한 자라고 생각한 그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독사의 자식들아. 회칠한 무덤들아. 외식하는 자들아.”

가장 거룩하게 산다고 하는 그 사람들을 향해서, 극언을 퍼부으셨던 것입니다.

 

이게 그렇게 악한 것이 라는 것이에요.

하나님과 아무 인격적 관계없이 십일조/금식/구제..

온갖 종교적 고상한 행위들을 다 한 것입니다.

아마 모세의 율법대로, 복을 받으려고 했던 모양이죠.

성경에는 ‘사람에게 경건하게 보이기 위해서’ 그랬다고 했습니다. 어쨌든!

 

 

▲마치는 말

어머니 리브가와 야곱의 마음속에는 

그 할아버지/시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대해서 갖고 있었던

끔찍했던, 정말 미쳤다고 생각해도 좋을 정도로

그 하나님의 매력에 빠져들었던 사랑에 대해선 아랑곳하지 않고

 

그 하나님을 사랑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약속해주셨던 복만

야곱의 눈에, 크게 보였습니다. 주2)

 

그래서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그 ‘장자권의 복’만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제 야곱은 온 가정을 풍비박산이 나게 만들어버리고

복은커녕, 험악한 인생살이를 시작하게 됩니다.

(야곱이 바로 왕 앞에서 고백한 말이, ‘자기 일생이 험악한 인생이었다’ 아닙니까!)

 

내가 기도를 열심히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할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복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아니까.. 내가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내가 봉사하는 사람이 되었고

그 은혜에 감격해서.. 내가 충성할 수 있는 자가 된 것이지요. 그 자체가 벌써 복입니다. 

 

충성했기에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복을 쫓아가지 마세요.

세상 복을 너무 추구하지 마세요.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복, 따라오는 복은.. 그거야 받아 누리면 되겠죠.

그러나 하나님 자체가 내게 복이십니다. 돈이 아니라요.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하십니다. 죄인 야곱을.. 만들어서 쓰십니다.

야곱이 예정에도 없는, 자기 죄성을 따라 죄악을 저질렀지만,

그로 인해 큰 환란과 풍비박산이 일어났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예정(리브가 뱃속에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을

꿋꿋이 이루어 가십니다.

이탈된 야곱의 궤도를, 다시 제 궤도에 올려놓으시는데요..

 

그래서 창28장에, 벧엘에서, 형을 피해 도망가는 그를 <은혜로> 만나주십니다.

20년 동안 삼촌 라반의 집에서,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창32장에, 브니엘에서, 삼촌 라반에 쫓겨 오는 그를 <은혜로>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야곱을, 하나님의 장중에서 절대 놓치 않으시고, 그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리고 결국 그를 12지파의 조상으로 굳게 세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작정하신 모든 예언/예정을 다 이루셨고,

아브라함-이삭-야곱에게로 내려오는 언약도 다 이루셨습니다.

‘야곱의 불완전함과 야곱의 실수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만지시고, 그를 고치시고, 그를 연단하셔서

하나님의 사명자로/그릇으로/(신약적 표현으로)제자로.. 결국에는 만들어 쓰셨습니다.

 

▲우리도 야곱과 마찬가집니다.

처음부터, 무슨 고상한 목적으로 입교하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초기의) 야곱처럼, 복 받겠다는 야심으로.. 또는 문제 해결 받겠다는 기대심리로

이렇게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점점 만져서, 하나님의 뜻대로 빚어주십니다.

(중반기 이후의) 야곱처럼 말입니다.

 

 

......................................... 더 읽으실 분 .........................................

 

주1) 본문을 읽을 때, 또 한 가지 의문점은

창세기 25장에 리브가에게 아기가 들어서게 될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입니다.

 

야곱이 발꿈치를 잡고 늦게 태어나서 동생이 되었지만

그 작은 자가, 큰 자 보다 더 위에 있는 장자가 되게 되고

먼저 태어난 에서가, 영적인 상태에서 볼 때 야곱을 섬기게 되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이렇게 태어나기도 전에 

야곱이 장자가 될 것임을 아셨다면

왜 야곱이 동생으로 태어나게 해서

온 집안에 이렇게 장자권 다툼으로 인해서

집안의 꼴이 풍비박산이 되게 만드셨느냐하는 얘기입니다.

 

그냥 순조롭게 야곱이 장자로 태어나게 하고 (몇 분 차이 아닙니까?)

야곱이 원래 장자로 태어나서 갖게 된 장자권을 그대로 받고 태어났으면

에서 같은 경우 팥죽에 장자권을 팔아먹는 그런 일도 없었을 것이고,

또한 야곱이 그 장자권을 탐내어 속이지도 않았을 것이고

에서는 차자로서 그저 사냥하며 자기 길을 잘 살면 되었을 텐데

이거 왜 이렇게 온 집안을 곤죽이 되게 만드셨을까요?

(여기에 대한 대답은 다음 번에 숙제로 남겨둡니다.)

 

 

주2) 아브라함은 복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복 달라고 구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냥 하나님을 좋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계속해서 복을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복도, 물질적인 복/부동산의 복이라기보다는

‘사명의 복’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많아지는 복’이었고,

‘모든 족속이 그를 통해 하나님 백성이 되어지는 (선교의) 복’이었습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은, 살아생전에, 가나안에서 자기 땅 한 평 못 가졌습니다.

아내 사라의 매장지도 없어서, 돈을 주고 헷 족속에게 막벨라 굴을 샀습니다.)

 

‘아브라함의 복’을

무조건 ‘물질적/부동산의 복’으로 이해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나중에 자손들을 통해서 그 땅을 차지하게 되더라도

그것은 ‘재산’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나라, 사명의 땅’이었습니다.                              ▣ 복음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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