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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대신에 섬김을 2313

LNCK 2010. 2. 16. 23:58

◈논쟁 대신에 섬김을                           마5:16                  07.10.14. 쉬미트 목사님 설교  스크랩    


 

한 무슬림 신학자가, 중동에서 사역하고 있는 기독교선교사들에 대하여

그중에 특히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하는 선교사들은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이다.

그들은 우리를 700년 동안 힘들게 하였다. 

우리 무슬림들이 사람들에게 이슬람을 전도할 때에는.. 논리를 가지고 한다.

우리의 특기는 논리, 논쟁이다.


그러나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에게는 그게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와 결코 논쟁하지 않는다.

우리와 토론하는 대신, 그들은 조용히 우리의 도시에서 말없이 일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섬기고 봉사한다.


사람들은 그들의 사심 없는 선행을 보면서, 기독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잠시 후에 보면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되어버린다.

이 프란체스코파들은 논리와 같은 당당한 방법으로는 싸우지 않는다.”



위와 똑같은 문제를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에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프란체스코 수도사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논리로 맞서지 않으시고

그저 사람들을 섬기실 뿐이었습니다.


요5:1~18절에서, 예수님은 38년 동안 마비되어 있던 한 남자를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이 기적적 치유사건으로 당황했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곤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은 안식일도 지키지 않는..

메시야로는 무적격한 자로 드러내는 논증을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아마 논쟁에는 자신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논리를 가지고서도, 예수님에게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하신 모든 일들을 통해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자기를 나타내시고 역사하신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결국 바리새인들도,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시고

자신을 하나님으로 주장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그리하여 바리새인들의 판단으로는, 단순한 2가지 선택밖에 없었습니다.

-바리새인 그들 자신들도 예수를 따르거나

-아니면 예수를 아주 죽여 없애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앞에도, 똑같이 단순한 2가지 선택의 길이 놓여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르던지 

-아니면 예수님을 거절하고, 우리의 삶 가운데서 내쫓든지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의미는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처럼 사람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사심이 없는 진실한 사랑은

예수가 누구신지, 그에게 속한다는 것이 왜 아름다운지

화려한 논증보다 나은 것으로 증명됩니다.


이기적이지 않은 참 사랑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가지고 오신 치유의 능력이 그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섬김을 통하여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예수께서 산상보훈에서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말씀하신 것과 같이  마5:16

사람들은, 비록 무슬림이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 ‘논쟁’ 관련글 정리

 

▲불신 남편 전도법 (위 프란체스코 파의 전도법과 유사합니다.)

1. 논쟁에서는 지고, 생활의 모범에서는 이긴다.

2. 교회 핑계로 가정을 희생시키지 않는다.

3. 자녀 교육 잘 하면, 남편이 감동 받는다.

4. 남편의 흉, 허물을 다른데 가서 말하지 않는다.

 

 

▲논쟁과 논박으로 전도에 실패한 사도바울, 아덴에서.

사도바울은 2차전도여행 중 아덴의 전도경험이 있었다.(행17:16~34)

아덴(아테네)은 4~5세기 전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의 거장들이 활동하던 헬라 철학의 본거지다.

바울이 이곳에 도착하고 보니, 바울의 철학적 끼가 발동한 것이다.


바울은 유대 종교뿐만 아니라, 헬라 철학에도 능통했다.

그래서 전도를 하더라도, 이들에겐 철학적 방법으로 전도를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바울은, 아덴 사람들과, 철학적 논쟁을 하고, 변론을 하기도 했다.


말싸움에서 보기 좋게 승리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제대로 전도를 할 수 없었고, 아덴에서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도 실패했다...


‘논리나 논증이 필요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단, 그것만 갖고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전도는!



▲책에서 얻는 것은 설명이다. 믿음은 안 생긴다. (간증집, 설교집 등은 제외)

사람들이 (신학)책에서 얻는 것은 믿음belief이 아니다.

책에서 얻는 것은 설명explanation이고,

자기 믿음에 관한 정당성을 확증하는 정도의 도움을 얻을 수는 있다.


그러나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봐야 <믿음이 생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논쟁만 생긴다는 뜻이다.

믿음은 그냥 ‘믿음으로’ 생긴다. 공부가 아니다. 

그외 기도로/헌신으로도 믿음이 생길 것이다.

어쨌든 신학적인 책을 읽어서는 믿음이 생기기 어렵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 칭찬 받은 백부장의 믿음,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은..

무슨 공부를 통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믿음을 변증(변호)하는데는 책(지식)이 필요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이성적 설명explanations에 중독 되어있다.

모든 것에 설명을 요구하고, 설명되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다.

그렇게 논리적 설명 좋아하다가는,

실제로 아무 열매도 못 거둘 수 있다.


‘논리/논증/책/지식이 필요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단, 그것만 갖고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믿음은 그런 것으로 안 생긴다!

 

 

▲경지에 오르면 벙어리 된다! (말이 적어진다.)

우리가 어떤 분야에서 정녕 경지에 오르면... 먼저는 입이 닫힌다.

무슨 설명을 장황하게 구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입이 벙어리처럼 무감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성이 깊은 사람들은 보통 묵상깊은 생각에 잠긴다.

말로 장황하게 설명하거나 길게 논쟁하지 않는다.


더구나 지성소는 침묵이 흐르는 곳이다.

지성소(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가는 자는... 침묵한다.


    무조건 침묵이 좋다는 말이 아니라,

    경지에 오른 자는.. 가급적 쓸데없는 말을 안 한다.

    내 지식에서 나온 말로써 설득시키려 하지 않고,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처럼,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사람들을 설득시킨다.



그레고리 보이드 목사의 미국 보수교회에 대한 경고

그는 미국교회는 도덕적 차원의 이슈에 대한 논쟁을 중단해야 하며.., (동성연애, 낙태 등의 이슈)

그 이유는,

-이것이 종종 길고 지루한 소모적인 (결판 안 나는) 논쟁으로 계속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더 중요한 이유는,

-“교회가 세상과 논쟁에서 승리하고 세상을 지배하게 될 때..

교회는 더욱 세속화 되며,

검(힘의 승리)에 대해 신뢰하게 될 때, 십자가를 잃게 된다."는 것이다.


    지루한 논쟁에서는 악착같이 이기고, 진짜 싸움(실천)에서 지는 경우가 많다.

    보이드 목사는 그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논쟁을 길게 끌지 말고, 실제적인 대안을 모색하라는 뜻.

   

    논쟁에서 이겼을 때 우리는, 순간적인 쾌감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상대방의 자존심을 다치게 하고 불쾌감을 안겨주게 됩니다.


    논쟁에서 이겼다고 해서.. 진정한 승복과 신뢰가 따라오지는 않습니다.

    논쟁으로 최대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논쟁을 멈추는 것입니다. <이 단락, 행복 경영                       ▣ 전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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