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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 관하여 (1) 2253

LNCK 2010. 1. 7. 22:35
 

◈기도에 관하여 1                        눅11:1                         09.10.07~08. 가톨릭 글 스크랩


주여...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눅11:1



◑하나님을 무시하는 기도의 태도                 


얼마 전에 기도에 관한 나의 안이한 생각을 뒤엎어주는 책을 만났다. 

안토니 블룸이라는 러시아 정교회의 총대주교가 쓴

「기도의 체험」, 「살아있는 기도」를 읽고 난 충격은

그 동안의 내 게으른 기도생활을 다시 점검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나는 평소에 기도란.. 호흡처럼 숨 쉬듯 가볍고 편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과

건성으로 하는 기도 백 번보다

정성껏 드리는 화살기도 한번이 낫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기도는.. 자세를 단정히 하고 정중히 하는 것만이 기도가 아니라

일 하면서도, 걸어가면서도,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일면 맞지만, 자칫 잘못하면 엄위하신 하나님을 너무 무시하는 처사가 된다.

예를 들면, 높으신 분을 내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 함부로 불러낼 수 있겠는가?)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그 동안 나는, 기도를 너무 ‘나’ 중심적으로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어쩌면 나의 게으름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그렇게 위로해왔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만한 기도는 안 돼!


대학을 졸업한 제자가, 자기 결혼주례를 부탁하려고 스승인 교수를 찾아갔다.

한 시간 동안의 면담 도중에, 스승의 핸드폰이 4번 울렸는데

그때마다 미안하다고 하면서.. 문자를 날리고, 통화를 하는 모양을 보고

제자는 주례를 부탁하려던 마음을 접고, 교수실을 나왔다고 한다. 


인생의 중대사인 결혼의 주례를 청탁하는 자리에서

단 한 시간도 눈을 마주하고 진실한 대화를 할 수 없는 산만한 사람을

도저히 신뢰할 수 없어서라는 것이 이유였다.


혹시 이 사건이, 나와 하나님 사이의 기도에 적용되는 것은 아닐까?

내가 기도하면서, 핸드폰 오면 받고, 문자도 날리고.., 매우 산만한 것이다.

그것은 진지한 대화의 상대로 주님을 모셔놓았더라도,

주님을 무시하는 태도요, 주님은 곧 그 자리를 떠나버리실 것이다.


기도가 참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현존을 깊이 있게 의식하고 나누는 대화라면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자기 볼 일 다 보면서 기도하는 것) 


안토니 블룸은, 기도란, 하나님의 인격적인 실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 계신 하나님 면전에 선다는,

마치 최후의 심판정에 임하는 것처럼 두렵고도 떨리는 자세로

그분을 만나야 한다고 말한다.  


어떻게 매번 그럴 수 있냐고 한숨 쉬기 이전에

하루에 단 한 번, 아니 일주일에 단 한번이라도

그토록 진실하게 주님과 만나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일하면서, 온갖 분심 속에서, 길을 가면서, 아무 때나 틈새에 잠시 불렀다가,

힘들고 바쁘다고 다시 구석으로 밀쳐놓는 분이 소위 나의 <주님>이시다. 


이렇게 소홀히 대하면서도 내가 원할 때 즉각 달려오지 않는다고,

주님을 원망한다.  


사실 너무 쉽고 편한 기도에 대한 나의 생각은

결과적으로 나태한 기도생활로 이어져왔고,

그것 마저 이런 저런 핑계로 변명하다가

다른 활동이나 영적 독서로 기도를 대체시켜버렸던 때도 많았었다. 

그런 가운데 기도생활은 늘 제자리를 답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적독서, 봉사활동이 기도가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적어도 기도를 <안 하면서> 그것을 기도로 핑계 삼을 수는 없다.  


우리는 정말 하루 몇 분을 쪼개어,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그분의 현존과 마주하지 못할 만큼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정말 아무 때나 그분을 불러내고, 아무 때나 그분을 뒤로 물리칠 만큼

하나님을 아무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우리가 불러낼 때마다 대답을 하지 않는다고

그분의 침묵-하나님의 자율권-에 그렇게나 도전할 만큼

그분을 종처럼 취급하고 있지는 않을까? 


우리는 정말 기도를 부담으로 느낄 만큼, 그분과의 관계가 소원한 것은 아닐까?  <옥>



◑기도하는 법이 아니라.. 


기도는 마치 숨과 같아서 숨 쉬지 않는 사람이 존재할 수 없듯이

기도하지 않는 신앙인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기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제가 깨달은 것은

기도하는 (특별한)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마치 연인을 만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해 봅니다.

연인 만나서 무엇을 해야만 한다고 정해진 법은 없습니다.

만나는 것이 중요하고, 정성껏 신실하게만 대하면 됩니다.

그저 말하고 싶으면 말하고, 바라만 봐도 되고, 어깨에 기대어도 됩니다.

기도의 형식보다 중요한 것은, 둘 사이에 사랑입니다.


사랑 하는 사람 둘이 만나면, 무엇을 말하느냐도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둘 사이에 오고가는 사랑의 마음과 정성이 더 중요합니다.

사랑이 곧 기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 제자들이 기도하는 법을 여쭈어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는 법’ 대신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기도하는 법은 특별히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기도’(주기도문)는 ‘기도하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주고 받는 사랑의 내용이라고 .. 저는 생각합니다. <용>



◑북한을 위한 주기도문


북한 복음화를 위해 제가 지은 ‘주님의 기도’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물론 이것은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기도는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기도하면 좋겠다는 뜻으로 소개하는 것입니다.


“북녘의 형제들에게도 아버지이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북녘의 형제들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북녘에도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북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북녘의 형제들에게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 서로 잘못한 것을 저희 서로 용서하게 하시고.

그 용서를 보시고 저희를 용서하시며

그들을 외면하고픈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형제(한국)를 악으로 보는 악에서 저희(북녘)를 구하소서, 아멘.”   <선>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만 주신다.


옛날에 한 임금이 귀한 진주 두 개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그 가치를 아는 백성에게 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하에게 그것을 주면서, 세상에 돌아다니며

그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그것을 주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신하는 먼저 과일가게에 갔습니다.

그 과일가게 주인은, 사과 두 개를 줄 테니, 그것과 바꾸자고 하였습니다.


다음은 야채가게에 갔습니다.

그 주인은, 감자 두 개를 줄 테니, 바꾸자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은 보석상에 갔습니다. 보석상 주인은 너무 놀라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줄 테니, 그것을 줄 수 없겠느냐고 했습니다.

신하는 그것을 보석상에게 거저 주었습니다.


정말 우리가 귀하게 여기고 먼저 청해야 하는 은총은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이 사랑, 평화, 기쁨 등의 온갖 열매를 맺게 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님보다 세상 것들을 더 청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은총을 얻지 못하는데요...

사실은 그 (성령님의) 가치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용>



◑기도 체험 나누기


언젠가 여러 수도자들이 모여

각자 자신들의 기도생활에 대한 체험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는데,

참으로 그 나눔이 풍요로웠습니다.


“기도에 몰입하면 할수록, 묵상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관상에 도달하면 도달할수록, 절실히 느끼는 것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동체 형제들과의 관계에서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상처나 고통의 치유를 위해

가장 효과적인 대처방법은, ‘함께 기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도야말로 공동체 내외부의 다양한 갈등국면을

최대한 빨리 해소시키는 탁월한 처방전임을 확신합니다.”   <국>                                     ▣ 기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