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에 관하여 2 마11:20 모두 스크랩 글/정리
‘활동이 기도를 삼켜 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칫 활동에만 열중하다보면
기도는 점점 하기 싫고 고리타분한 것이 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기도가 없는 삶은 어떤 삶입니까?
그것은 마치 노래를 잃은 카나리아 새와 흡사한 삶입니다.
◑기도자의 손은 능력의 손
나는 하나님의 손(손가락)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눅11:20
왜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표현을 쓰셨는지.. 제가 아직 명쾌한 대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저 상상해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어렸을 때 배앓이를 하면 어머니는 나를 뉘어놓고
‘엄마 손은 약손’을 반복하며 손으로 내 배를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그러면 배앓이가 없어지곤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 배가 아플 때, 제 손으로 저의 배를 쓰다듬곤 합니다.
언젠가 아는 사람이라곤 전혀 없는 타지에서 약 한 달을 지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허리 근육이 잘못되어, 그 자리에서 폭 쓰러졌습니다.
간신히 침대로 기어가 한참 쉰 다음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를 받았습니다.
물리치료사는 정성을 다해 허리 마사지를 해주었습니다.
다음날 허리는 한결 나아졌습니다. 사람의 손은 이렇게 대단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음식 맛은 손맛’이라고 합니다.
손이 빚어서 만드는 음식에.. 놀라운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계가 절대로 못 따라 갑니다.
유명한 최고급 의상이나 구두는 ‘수제품’ hand made입니다.
사람의 손에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를 쫓아내신다’고 하실 때,
아마 손가락으로 그 마귀를 가리키거나, 아니면 안수하신 것으로 예상됩니다.
어쨌든 사람의 손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손은 특히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의 손이,
환자들을 붙들어 주고,
낙심한 사람들을 격려해 줄 때
거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요! <대> ※관련 글 583 터치
◑사람마다 자기 몫이 다르다
1986년 여름, 대학교 3학년 때 경상북도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열리는
'마오로 축제'라는 성소 피정(수련회)을 간 적이 있습니다.
2박 3일의 일정 중에서 둘째 날 밤에
수사님들과 신도들 간의 다과회를 겸해서 만남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수사님들의 수도생활에 대해서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어느 정도 자리가 무르익어 갈 무렵,
수사님들께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물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제가 참 어렵게 말을 꺼냈습니다. 대충 이런 이야기였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천국 같았습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가 지닌 사귐과 섬김과 나눔의 아름다운 전통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내 것 네 것 없이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모습이 너무나도 인상적입니다.
그런데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지금 밖에서는 독재 정권에 맞서 피터지게 싸우고 있는데, (1886년)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려고 온 몸을 바쳐 투쟁하고 있는데,
과연 수사님들께서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수사님들 자신은 아름다운 주님의 공동체 안에서 행복하게 살고 계시지만,
밖에 있는 힘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수행해야 할 사회적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조금은 찬물을 끼얹는 듯한 말이었죠. 전체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지는 듯 했습니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수사님 한 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는 기도를 합니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지만 마음은 함께 합니다.
기도로써 함께 합니다..."
당시 대학생으로서, 교회 청년으로서 나름대로 현실 참여를 하고 있던 저는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곱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말을 이어가면 분위기가 영 엉망이 되겠다싶어 입을 다물었지만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래요. 수사님들은 이곳에서 편안하게 지내면서 기도 열심히 하십시오.
그런다고 뭐가 됩니까? 지금은 함께 어깨 걸고 싸워야 할 때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주님의 일입니다. 저는 열심히 싸울 것입니다.’
몇 마디의 말이 더 오고 갔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가 삼가하면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습니다.
15년이 지나서 (제가 가톨릭 신부가 된) 지금, 그때 수사님의 말씀을 이해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에 수사님의 몫이 있고, 제 몫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각기 고유하게 주어진 주님의 달란트를 가지고 살아가면서
자신의 몫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고 따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몫이 최고인양 저에게 강요할 수 없듯이
저 역시 저의 몫만을 최고로 여기고,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종>
◑기도가 밥 먹여 줍니다.
단, 열심히 기도하다가 탈진할 때쯤 되어서, 밥 먹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밥 먹여 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기도가 ‘줍니다.’
▲‘기도가 밥 먹여 주냐?’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서 많이 듣는 말입니다.
(그런데 가끔 저도 이런 말을 합니다.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신세 편하게 ‘기도만 하는 형제들’을 보면
제 속에서 군지렁거리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기도가 밥 먹여주는 체험’을 몇 차례 했습니다.
저의 무전no money 순례 경험에서
밥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여러 번 체험하였습니다.
무전 순례를 떠나면.. 먹고 자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런데 자는 것은.. 어떻게 노력을 하면, 자리를 찾을 수 있는데
먹는 것은.. 훔쳐 먹지 않는 한, 누가 주어야 먹을 수 있고
따라서 어떻게 해야 얻어먹을 수 있는지.. 연구를 해야 합니다.
하여 많은 망설임과 연구 끝에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지만
대부분 보기 좋게 실패를 합니다.
그러다 ‘오늘은 굶었군!’ 하고 포기를 하는 순간
뜻하지 않게 얻어먹게 됩니다.
▲북한(선교)일을 하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적인 노력과 설득으로 안 되던 것들이
뜻하지 않게, 그리고 전혀 예상치도 않은 방식으로 해결이 되고,
기대하던 도움은 못 받는 대신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도움의 손길이 답지하는 것이 비일비재합니다.
제가 무얼 하려고 아등바등하기보다.. 기도에 매달리는 이유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정말 아무 노력도 안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순위의 문제이겠죠.
▲그러나 진정한 기도는 ‘청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business가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거래 상담이 아니라, 사랑에 머물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요구하면.. 이미 ‘사랑’이 아니고 ‘요구’인 것처럼
기도도 무엇을 요구하여 얻는 것이면.. ‘기도’가 아니라 ‘요구’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요구를 들어주시지만...
기도가 Business가 아니고, 사랑도 Business가 아니지만
사랑은 단지 곁에 머물음만도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 사랑 때문에 무엇을 할 때는
반드시 순서가 있습니다.
기도부터하고, 다음에 일해야 합니다.
▲베네딕도 성인께서 Ora et Labora라고 말씀하셨는데
'기도도 하고 일도 하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기도 먼저 하고 일하라'는 말씀이기도 하십니다.
왜냐하면
기도하지 않고 일하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자기 일을 하기 때문이고
기도하지 않고 일하면
세상일은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아..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고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아.. 일을 하는 사람들이며
하나님께로부터 능력을 받아..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도를 통해 매일/매 시간 받아서..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선>
◑관상觀想한다는 것
관상이란..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내 존재 전체를 맡기는 일입니다.
관상이란.. 내 영혼의 닻을 가장 안전한 포구인 예수님께로 내려놓는 일입니다.
관상이란.. 내 안에 숨겨져 있는 가장 값진 보물인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관상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삶을 극도로 단순화시켜야 합니다.
끊임없는 가지치기로 단순화된 삶을 또 다시 단순화시킵니다.
결국 남는 것은 ‘침묵’과 ‘고요’와 ‘하나님’, 그리고 ‘나’입니다.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런 찬송도 있잖아요!)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그 한 가지만이 나를 충만케 합니다.
그 한 가지(하나님 자신)만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 한 가지만이 나를 하나님의 모상(아마 image)대로 재창조합니다.
결국 그 한 가지만이 나를 구원의 길로 인도합니다.
▲물론 제대로 된 관상기도를 위해서는 분위기가 아주 중요합니다.
아름다운 대자연 속에, 대 침묵 속에 관상기도는 더욱 효과를 발휘하겠지요.
그러나 관상기도를 위해 환경이 꼭 절대적인 요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소란스런 시장 한 가운데서도, 분주한 직장생활 속에서도,
정신없이 돌아가는 삶의 현장 속에서도 관상기도는 가능하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장소를 불문하고 하나님 말씀에 대해 진지하게 몰입할 때,
어디에 서 있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찬미할 때,
어떤 처지에서든 감사하고 기뻐할 때.. 우리는 진정 관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끄러운 세상 한 가운데서 살아가면서 자주 관상하는 습관을 들여야겠습니다.
삐걱거리는 세상 한 가운데를 살아가면서도, 침묵과 고요를 사랑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일의 기도화, 삶의 기도화
... 별로 영양가 없어 보이는 회의들이나 스케줄들이 줄지어 서있습니다.
그 와중에도 신문은 꼭 봐야되고, 아홉 시 뉴스도 봐야 합니다.
축구시합 빅매치는 보지 않고는 밤잠을 못 이루니 또 봐야지요...
솔직히 말해서 기도할 시간이 너무도 부족합니다.
괜히 바쁜 척 하며 돌아다니며 제대로 기도시간을 내지도 못하는 제가
속보이게도 신자들에게 ‘이런 기도가 진짜다. 기도는 이렇게 해야 된다’고 외쳐대니
참으로 한심스럽기만 합니다.
활동과 기도의 조화, 그것은 제게 있어 하나의 숙제입니다.
그래서 성인의 삶을 본받아 ‘일이 곧 기도’가 되게 하려 합니다.
후원자들을 만날 때나,
강의를 할 때나,
뭔가에 몰두해서 열심히 일할 때에나..,
언제나 기도와 함께 그 모든 것을 행하면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그것을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아, 지금 내가 만나는 저 분이, 자기 속으로 기도하고 계시는구나!' 라고 느낀답니다. <국>
◑기도길, 생명길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를 선교잡지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산골 작은 마을에 복음이 들어와
마을사람 거의모두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선교사가 가르쳐준 그대로, 기도의 삶을 생활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을 신자들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숲속에 각각의 자기 기도처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루에 두 번 이상 정기적으로 그 기도처를 찾아가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마을에서 그 기도처에 이르는 곳까지, 여러 개의 기도길이 생겼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 길을 각자의 기도길(prayer path)
혹은 '나의 생명길'(My life way)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기도를 게을리 하고, 기도처를 찾지 않으면, 길에 풀이 자라납니다.
그러면 신앙의 친구가 조용히 찾아가 이렇게 말해준다고 합니다.
"형제님, ‘생명 길’에 풀이 많이 자랐어요."
그래도 변화가 없으면, 그의 친구 몇 사람이 함께 대신
그의 기도처를 찾아 가서 기도해준 다음
그들의 친구를 다시 찾아와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형제님, 우리가 형제님의 ‘생명 길’을 닦아놓았어요.
주님이 거기서 형제님을 기다리시는데, 저희가 함께 가드리겠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며칠간 그 형제와 함께 그 길을 동행하며, 기도의 회복을 도왔다고 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 입니까! ▣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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