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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스 신앙의 실패의 교훈 2305

LNCK 2010. 2. 11. 12:18

◈요아스 신앙의 실패의 교훈                      왕하12:1~21                  인터넷 설교 스크랩, 정리



요아스는 성전을 수리하는 일종의 종교개혁적 업적을 남기면서도 (외형적)

참된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라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내면적)

오늘날 나도, (외형적으로) 열심히 교회에 쫓아다니지만,

(내면적으로)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으므로.. 나 자신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여자가 화장을 하는 이유를 몇 가지 들어보면

①자기만족과 자기표현이라는 이유를 댑니다.

‘남자들에게 예쁘게 보이려고 화장을 한다’

그래서 그동안 광고 컨셉을 그쪽으로 맞춰왔는데, 요즘은 그게 아니랍니다.


여자의 자기표현.. 그러니까 여자가 화장을 하면서

정말 자기 자신의 가치를 느낄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장품 광고를 할 때,

‘아 나는 진짜 이 회사의 화장품으로 화장을 하면

누가 뭐래도 나는 정말 왕궁 깊은 곳에서 세상의 때 하나도 안 묻고

백옥 같은 피부를 가진 아름다운 그런 여자다.’ 라는

자기만족과 자기표현에 맞춰서 광고했는데.. 아주 큰 성공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②‘코스메틱 저널’이라는 잡지는, 여자가 화장을 하는 이유로.. 힘 말합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는 말이 있는데, ‘화장 빨이 힘이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화장을 안 하고 나가고, 거기다가 면바지 걸치고 나갔을 때와,

그래도 신경을 써서 화장을 하고, 정장을 입고 나가면,

사람들이 자기를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내 내면의 힘과는 아무 상관없이

실제로 내 능력, 내 자질과는 아무 상관없이

화장을 했다는 그 이유하나 때문에.. 힘이 발휘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남자들이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면서, 스스로 힘을 과시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루는 제가 동네를 산책하다가, 교인중의 학부모 여자 한 분이

아주 화장을 잘 하고, 잘 차려입고 어디를 가고 있었습니다.

‘어디 가시느냐’고 물어봤더니.. 아이의 학교선생님이 불러서 간다고 합니다.


보통 교회에 오실 때는, 그렇게 꾸미지 않는데,

학교에 불려 가실 때는, 그렇게 잘 꾸미고 가시더라고요.


아이가 수업을 너무 많이 빼먹었다든지, 수업 태도가 나쁘다든지,

학교에서 무슨 문제를 일으킨 모양이지요?

그런데 잘 ‘그리고’, 잘 차려입고 가야.. 무시를 당하지 않고,

그래도 정중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화장이 힘이다.’ 라는 말입니다.


③그 외 물론, 남자에게 잘 보이려고, 화장을 하는 경우도 반드시 있겠죠.

평소에 남자처럼, 잘 꾸미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해서 다니던 여학생이

갑자기 변신을 해서, 화장을 하고, 치마를 입고, 뾰족구두를 신고 다니면,

십중팔구는 남자친구가 생긴 거예요.


그러다가 얼마 지나서, 다시 옛날 자기 모습으로 돌아갔어요.

그 이유를 알아보니, 그 남자친구가 군대에 갔다고 합니다.

화장할 이유가 당분간 없어진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가 교회를 다니는 것이, 마치 여자가 화장하듯이

     -자기만족을 위해서

     -자기 힘을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또는 친구 만나기 위해서, 로터리 클럽 다니듯이.. 교회 다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자 화장처럼, 외형적 신앙은 있는데, 사실은 내면적 신앙이 없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정황

요아스왕이 장성해가면서 하나님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으나

산당은 제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요아스가 제사장 여호야다의 교훈을 받을 동안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되,

오직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였더라.  왕하12:2~3


▲산당이란?

산당은.. 우상숭배로 이용이 되긴 했지만

드러내놓고 우상숭배의 이름을 걸고 종교행위가 진행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예루살렘성전 한군데서만 드려지게 되니까

여러 가지로 불편한 게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사는 집 가까운 곳에 산당을 지어놓고

여호와께 제사를 드린다.. 라는 순수한 마음이 나중에 점점 변질되는 거예요.


진짜로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고,

그 산당에서 모인 신앙이.. 자기만족을 위한 화장처럼 변해버렸다는 이야기예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배를 드리는 일이

산당에서 이루어졌지만,

정통 제사나 예배가 되지 못하고,

자기만족적이고 자기표현의 한 수단이 되어버렸다는 겁니다.(라고 추측합니다.)


‘산당’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만,

처음에 솔로몬이 1천 번제를 드릴 때까지만 해도, 산당은 성경에 긍정적으로 소개됩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산당’은, 오늘 본문을 포함해서, 부정적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산당을 과감히 없애지 못한 것을 보면,

거기에 ‘여호와께 제사’하는 기본적 형식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산당이, 예루살렘 성전의 예배와 다른 것은 뭡니까?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엄격한 절차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아녜요.


제물을 갖고 오고, 제사장들이 드리는 제사를 통하여..

사죄를 받기도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기도 하는데..


산당예배는 그냥 여호와의 이름하나를 기억하고 부르면서

나머지는 죄다 ‘내가 하고(믿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이 산당예배가 결국 어떻게 됩니까?

점점 혼합주의적 형태를 띠게 된 것이지요.


▲오늘날의 산당/혼합주의적 기독교

우리가 물질과, 형통과, 현세적 축복을 마음 놓고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시간에 외치는 이유가 뭡니까?


실질적인 하나님과의 만남, 교제, 사귐..

이런 신앙의 본질적 요소들은 도외시하고,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축복이다’라는 이야기를

즉, 자기가 믿고 싶은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긴다면

이것은 ‘혼합주의적 기독교’ 입니다. 옛날식으로 말하면 ‘산당 제사’이죠.


물론 물질적/세상적 축복을 혐오하거나 터부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 추구는.. 주님과 교제, 예배, 사귐, 관계입니다.

물질적/세상적 축복은 따라올 수도 있고, 따라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아브라함의 복’은

기본적으로 ‘영생이며, 영원한 복’입니다.

성경의 복을 모조리 ‘물질적 복’처럼 해석하는 것은 (그것을 포함하더라도)

명백한 해석적 오류입니다. (한국적 복 개념으로 성경을 보면 안 됩니다.)


그리고 지난 2천년 교회 역사에,

정통 기독교가 ‘물질적/세상적 축복’을 추구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정통 기독교는 물질적/세상적 축복을 오히려

천국 가는 길에 장애요, 버려야 할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칼빈부터, 물질은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사명으로 점점 해석했습니다만

그러나 오늘날 일부에서 인식하는 ‘하나님의 축복=물질적 축복’ 으로 보는 개념은

정통 기독교가, 토속종교와 혼합된 가운데서 파생된 산물이라 봅니다. 


▲요아스는 성전을 수리한 왕입니다. 어떻게 보면 종교개혁을 일으켰다고도 볼 수 있는데요.

성전을 수리했으니까.. 우리 생각에 ‘요아스가 참 믿음이 좋았다’ 라고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왕하12:5


그런데 아람왕 하사엘이 쳐들어왔을 때, 요아스는

성전의 금을 다 하사엘에게 줍니다.  왕하12:18


뭘 말하는 겁니까?

정말 성전이 천지를 주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고 믿었다면

요아스가, 다른 왕들처럼, 그곳에 와서

하사엘의 침범을 두고 ‘하나님 어찌하면 좋으리까’ 하고 기도해야 되었을 터인데,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이라는 생각자체가 아예 없는 거예요.

그런 하나님과 만남/교제/관계.. 이런 것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문제가 터지니까.. 돈을 써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이게 ‘혼합주의’라는 것입니다.

교회도 다니고, 하나님도 믿지만,

문제가 생기면, 처리하는 방식은.. 세상적 힘으로/돈의 힘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친밀한 만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1)


▲오늘날의 잘못된 자기 나름대로/산당 신앙

①혼합주의적 산당 신앙

‘기독교 신앙=물질적 축복’으로 보는 것은

정통 기독교가 한국 토속종교와 혼합되어서 나타난 현상입니다.


물론 정통 기독교 신앙에도, 물질적 축복을 도외시하거나 터부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치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또한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하나님과의 교제/친밀한 관계를 거의 강조하지 않고,

오직 물질적 축복만 우선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또한 물질적 축복을 못 받는 것을, 신앙이 부족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혼합주의입니다.


②자기만족을 위한 신앙   

또는 여자가 자기만족을 위해서 화장하듯이

좀 더 고상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고상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③자기 나름대로 교회를 조직하는 산당 신앙

앞서 사사기 17장에도, 산당 신앙과 비슷한 형태가 나옵니다.

미가가 자기 집에 신상을 만들고,

한 레위인을 거기에 제사장으로 세우고,

단 지파는, 그 레위인을 단 지파의 제사장으로 세웁니다.

성경은 그것을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한 것이라고 혹평합니다.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17:6


④보상심리적 신앙 

여러분,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친밀한 교제/서로 사랑하고 좋아하는 교통’에 있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도외시 해 버리고,

‘보상을 바라는 심리’로.. 오늘날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일주일 내내 세상 속에 섞여가지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그렇게 살아가다가

주일에 교회 와가지고 예배드리고 봉사하면

뭔가 복을 받아서, 자기가 하는 사업/직장 일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자기가 스스로 규정한 신앙입니다. 아니, 인간의 본성적 신앙이죠.   (후략)

 

................................


주1)

성전이 그저 인격적인 만남이 있는 그런 예배의 장소가 아니고,

여자가 자기만족적이고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화장을 하듯이

자기 신앙은 ‘폼을 잡고, 고상한 멋을 내는’ 그런 형태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에 가서, 수리하고, 제사하고 그랬겠지요.


그러니까 산당이나, 성전이나 별 차이가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종교’ (모든 원시종교의 공통적 특징)를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전을 수리했다는 얘기도,

원래 십일조를 내서 레위인들이 십일조를 받으면

그 다음에 레위인들이 받은 십일조에서 또 십일조를 떼서 성전에 드리고

그럼 거기 제사장들이 먹고, 그리고 그걸 성전수리 비용으로 충당했던 겁니다.


그런데 여기 은을 드렸다는 말이 자꾸 나와요.  왕하12:14

성경에 보면, 모세율법 가운데 은으로 십일조를 드리란 말이 없어요.

그러니까 점점 십일조의 의미가 퇴색했다는 겁니다. 잘 준행되지 않았다는 얘기예요.

그 결과, 은을 걷어서, 성전을 수리해야 했습니다.                                                                                       ▣ 우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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