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하는 공동체 골4:7~18 -설교스크랩, 출처-
◑도입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공동체적 문화
우리 한국인들을 향해서 단점을 지적하면서 이런 말을 많이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은 참 강하고 뛰어난데, 한국인들은 잘 단결하지 못한다.
지나치게 개인주의 적이다.’ 이런 얘기를 하죠?
그런데 저는 그것이 우리 한국인들의 전통적인 특성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우리 한국이 산업화되는 과정에 있어서,
이것은 변질된 한국인의 특성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본래, 우리 한국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보면,
이 공동체 의식이 매우 투철한 그런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주1)
저는 기독교 신앙이, 오늘 이렇게 변질되어 가는 한국 문화 속에 기여할 수 있는
중요한 공헌 가운데 하나는, ‘공동체 정신의 회복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초대교회의 세계복음화 성공은 공동체 정신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초대 교회 인구는, 그 당시 세계 인구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매우 적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당대의 세계를 바꾸었습니다.
‘세계 복음화에 성공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다 예수 믿게 했다는 말이 아니라,
적어도 그 당시 전 세계 사람들에게 복음을 들려주고,
그 복음이 그 당시 세계의 문화와 가치관을 바꾸는 일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는 말입니다.
그 원인이 뭐냐? 그 이유 중에 하나는, ‘기독교가 가진 공동체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모습을 잘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말씀이, 행4:32절입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자가 하나도 없더라.”
물론 이것은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강요된 그런 삶의 모습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스스로, 나눔의 공동체, 나눔의 사회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죠.
이런 공동체 정신을, 본문의 골로새 교회에도 잘 볼 수 있습니다.
◑골로새 교회의 공동체적 성격
▶많은 이름이 열거된 골로새서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회를 향해서 보내는 편지,
소위 골로새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합니다.
오늘 성경을 같이 읽으시면서, 생소하고 발음이 어려운 이름들 때문에, 힘드셨을 것입니다.
이 마지막 부분에 아주 많은 이름들이 등장하지 않습니까?
바울의 의도가 어디 있어요?
이렇게 많은 동역자들의 이름을 열거하는 그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복음의 사역이란 나 혼자서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함께 하고 있는 공동체의 사역, 이것이 바로 복음의 사역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강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는 특별히 공동체적 헌신에 투철했던 몇 명의 동역자들의 예를 듭니다.
그런데 이 바울이 말하고 있는 동역자들 몇 사람, 그들을 설명하는 말들이 흥미롭습니다. (아래에 설명)
▶함께
“두기고가 내 사정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니, 그는 사랑을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안에서 함께 된 종이라” 골4:7
여기서 ‘함께 된 종’에 주목하세요.
10절에도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 그랬습니다.
11절에도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희는 할례당이라
이들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여러분!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시대를 깨우고, 또 이 시대를 구원하고,
또 건강한 교회를 세워 나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공동체적 정신의 회복입니다. 바울이 말한 '함께' 정신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는 이 공동체적 정신을 회복할 수가 있을까요? ←문제 제기
▶1. 첫째로, 중요한 것은 함께 섬기는 것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 두기고
함께 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모본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두기고 라는 사람의 예입니다.
이 두기고는 신약에 약 5번 정도 나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설교했다는 말도 없고요, 기적을 행했다는 말도 없고,
또 어떤 위대한 사건을 일으킨 적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세상의 시각으로 본다면, 이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주 하찮은 일을 한 사람입니다. 아주 작은 일을 한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행20:4절에, 바울과 함께 아시아를 향해서 가고 있었던
일곱 사람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한사람이 두기고였습니다.
성경학자들은, 그때 아마도 두기고의 역할과 책임은, 에베소 교회에서 헌금해서
예루살렘에 전달하는 그 헌금을 관리하고 있었을 것이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본문 골4:7절에 보세요.
“두기고가 내 사정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니, 그는 사랑을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다.”
그러니까 지금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었던 바울의 형편과 소식을
골로새 교회의 두기고가 알리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편지를 썼을 때,
그 편지를 가지고 골로새 까지 가는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이 바로 두기고였습니다.
두기고가 바로 그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자 여기 골4:15~16절에 보시면요.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 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편지(골로새서)를 가지고 먼저 골로새로 갔다가,
그 편지를 가지고 다시 라오디게아로 갔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 편지를 또 다른 곳에 전달하는 책임을
이 두기고가 감당했던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골4:7
그런가 하면 에베소서 6장에 보시면,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가는 편지도 두기고의 손길을 통해서 전달됩니다.
쉽게 말하면, 두기고는 바울 사도의 심부름 한 것이에요.
어떤 사람이 와서 이렇게 두기고를 충동질 할 수가 있습니다.
‘당신은 그래 겨우 바울의 심부름이나 하고 다니느냐?’
그러나 만약 두기고의 손길을 통해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이 편지가 전달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늘 우리가 어떻게 이 골로새서를 볼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 바울 사도의 위대한 옥중 서신, 에베소서와 골로새서가 전달되지 못했었더라면,
그 교회들은 바울의 적절한 위로와 가르침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중요한 바울 사도의 편지를 전하는 중대한 사역을, 두기고가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 자신은 그 일을 하면서도,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몰랐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찮은 일이고, 작은 일 같았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참 소중하고 귀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끊임없이 큰일과 작은 일을 나누는 습관이 있습니다.
‘남에게 보여주는 일, 생색나는 일, 사람 앞에 드러날 수 있는 일,’
이런 일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일, 이름이 없는 일. 자기가 나타나지 않는 일.’
그 일을 자원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두기고라는 사람을 생각할 때, 얼마나 귀한 사람이예요.
섬김의 가치라는 것은,
‘이 작은 일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느냐?’ 거기에 달려 있습니다.
달란트의 비유의 예기도 그런 예기가 아니겠어요.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를 받았습니다.
다섯, 둘, 하나, 숫자가 나오니까 매우 적은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 당시 금 한 달란트면, 20년을 살수가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면 어마어마한 액수예요.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얼마 남겼어요?
또 다섯 달란트. 굉장한 것이죠?
그러나 주인이 칭찬할 때, ‘장한 일을 했다.’ 이렇게 칭찬한 것이 아니고,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라고 칭찬합니다.
사람들이 굉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주 작은 일에 불과합니다.
문제는 ‘큰 것이냐 작은 것이냐, 큰일이냐 작은 일이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나에게 맡기신 그 일 앞에 우리는 얼마나 성실할 수가 있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죠?
우리 한국 사람들은 왜 그렇게 큰 것만 좋아하는지 몰라요.
큰일에만 매달리고, 큰일에만 앞장서려고 합니다.
그러나 작은 일에 대한 성실성, 그것에 대한 취약점.
이것이 바로 결정적인 한국 사회의 문제를 일으키는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 작은 일에 대한 성실성을 통해서 이루어져 갑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라는 공동체를 세워 가는 비밀은
이 작은 일을 통해서 서로를 섬길 줄 아는 사람.
‘그것이 얼마나 큰일이냐?’에 개의치 않고,
주께서 맡기신 그 일이 귀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 일 앞에 성실할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갈 때,
주님의 몸된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는 견고하게 세워져 갈 줄로 믿습니다.
▶2. 둘째로, 함께 고난을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 아리스다고
저는 그 대표적인 사람이 아리스다고의 예라고 생각합니다.
골4:10절에, “나와 함께 갇힌자 아리스다고”가 나옵니다.
이 아리스다고도 본문을 빼놓고는 꼭 3번 나옵니다.
다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그런데 그가 설교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기적을 했하였다는 말도 없습니다. 또 위대한 사건을 연출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꼭 3번 나오는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울이 고생할 때 아리스다고는 항상 옆에 있어요.
①행19장에 보면, 에베소에서 바울이 폭도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하여
목숨을 잃어버릴 뻔했던 그 고통의 현장에, 바울 곁에 아리스다고가 있었습니다.
②행20장에도, 로마를 향해서 배를 타고 가는 바울의 배가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부딪쳐서 배가 흔들리고 깨어지려는 위험의 고난의 한 복판에
바울 곁에 아리스다고가 있었어요.
③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시면,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 말합니다.
지금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는데요. (가택연금 상태)
아리스다고가 함께 감옥에 붙잡혔던 것이 아니라,
로마의 감옥에 바울이 갇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그대로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자원해서 로마까지 온 것이예요. 스스로 이 감옥 속에 들어와서 바울을 돕고,
섬기면서, 함께 감옥 안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모색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사람들의 동역자들을 생각하면서 본문에 이런 고백을 합니다.
골4:11절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이해가 되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기독교의 기초를 세운 작은 거인입니다.
1세기에 바울이 남긴 업적은 절대로 과소평가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장차 천국에서 바울 사도를 만나서
“그렇게 위대한 과제를 성취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다면, 바울 사도는 분명히 이렇게 대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사실은 복음 사역 도중 포기하고 싶었던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만두고 싶었고, 할 수만 있다면, 이 일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고통의 현장에서 눈물을 흘리고 가슴 아파할 때,
내 곁에서 나를 위로해 준 형제가 있었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 형제는 다름아닌 아리스다고 입니다.
이 형제가 준 위로 덕분에, 복음을 전하고 세계를 바꾸는 일에
나 자신을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고난을 함께하는 이런 사람들,
이것이 초대 교회 바울의 선교팀의 위대한 저력이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고통을 나누면서 뜨거운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모습,
이것이 초대 교회가 세계를 바꾸고 있었던 교회 공동체가 지닌 진짜 힘이었습니다.
소아시아의 비두니아 지방에 총독으로 있었던 ‘플라니’는
당시 로마의 황제였던 트라이안 황제에게 보낸 편지가 지금도 보관되어 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이 편지의 내용을 불 때, 트라이안 황제가 그 당시 소아시아 지경의
크리스천들의 활동과 상황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이 총독에게 내렸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총독의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황제시여, 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제 부하 중 몇 사람을 완전한 크리스천으로 만들었습니다.
교회 공동체에 들어가서 침례도 받게 하였고,
오랫동안 그리스도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하게 살펴보게도 했습니다.
부하들의 보고에 따르면, 그들은 밤이건 낮이건 모일 때마다
그들의 신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노래한다고 합니다.
또 많은 양을 소비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자주 빵을 떼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황제시여, 그들은 로마의 관리들을 위해
그리고 황제 폐하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숫자적으로는 적었지만,
초대교회가 그 당시 세계 속에 충격을 주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비밀이
무엇인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숨이 지내던 어느 카타콤의 벽에서는
이런 글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함으로 천국을 경험합니다.’
땅 속의 지하 무덤 카타콤에서, 햇빛을 볼 수 없는 지하의 어두운 동굴 속에서도
그들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함으로 천국을 경험합니다.’라고 말입니다.
‘자 함께 받은 고난 속에서
진정한 고난을 함께 나누고 있었던 나눔의 공동체.’
오늘 우리가 이 시대속에서 이런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다면
오늘 우리의 역사는 얼마만큼 달라질까요?
어떻게 우리는 이런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가 있습니까?
▶3. 세 번째는, 함께 사역할 줄 알아야 합니다. - 유스도, 마가, 에바브라, 누가
①“유스도라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희는 할례당이라”
이 사람의 이름이 예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하고 구별하기 위해서 ‘유스도 예수’라고 썼습니다.
할례당은 유대인이라는 말입니다.
“이들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라.” 4:11
함께 역사했다... 함께 사역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한 마음으로 함께 사역하는 일이 가능할 수가 있을까요?
우리가 다 다른 사람들인데, 성격도 다루고, 개성도 다르고,
출신 환경과 자라난 배경도 다루고, 은사도 다릅니다.
여러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서 한 교회를 만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한 마음으로 함께 역사할 수가 있어요?
저는 그 비밀은 하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공동의 목표를 지향할 수가 있다면, 공동의 목표,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공동의 목표, 이 목표만 분명하다면
우리는 함께 할 수가 있습니다.
자 여기서 바울 사도는 그들이 추구하고 있었던, 초대 교회에,
이 선교의 공동체가 추구하고 있었던 분명한 목표를 고백합니다.
그 목표가 바로 뭐였어요?
11절에 가장 중요한 단어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할 수가 있다면,
예수님께서 부탁하신 그대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나님의 나라, 이것이 나의 최대의 관심, 우리의 교회의 최고의 관심이 될 수가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이따금씩 이 땅의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는 원인 중에
하나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이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나라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나라에만 관심이 많아요.
자기의 왕국을 만들려고 합니다. 자기의 나라.
의도적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자기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사람들을 자기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하나님의 나라는 그 영광을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각자의 다른 개성과 성격과 모든 것을 뛰어 넘어서
정말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헌신할 수 있다면,
얼마큼 교회는 영향력을 미칠 수가 있을까요?
여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을 쭉 계속 소개하죠?
②그 중에는 마가라는 사람도 끼어 있습니다.
“바나바의 생질 마가” :10
오늘 본문에도 그랬죠. 괄호하고
“이 마가에 대해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어떻게 해요? 영접하라.” :10
잘 받아주라고 했어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모두 동역하는 것이죠.
③12절에 보시면 또 에바브라라는 사람도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아마도 중보 기도의 은사가 있었던 같아요.
본래 골로새 출신의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도 로마까지 왔었던 같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이 사람은 늘 성도들을 위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뜻안에 완전하고 확신 있는 성도로 설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④4:14절에 보시면, 누가도 등장하죠
누가의 직업은 의사였습니다.
그는 아마도 전도 여행을 하면서도, 의술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은사, 다양한 기술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다양한 사역에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이에요. 목표는 하나예요.
목표는 뭘까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⑤이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통해서 바울은 한 가지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거예요.
‘제가 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한 것입니다.
이 일이 모두 주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헌신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주의 사역에 자리에 설 수가 있다면,
하나님 나라의 일은 얼마나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요? 주2)
초대 교회의 공동체, 그들의 작은 공동체,
그러나 세계를 바꿀 수 있었던 그 능력의 이유를 우리는 알 듯 합니다.
주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공동체의 꿈을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주1) 한국인의 공동체적 문화 전통
예를 들어서 우리의 ‘한솥밥 문화’라든지, 한 솥에서 같이 식사를 하는,
된장찌개를 끓여 가지고 와서 한 솥에서 같이 나누어 먹고,
이것은 외국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문화죠?
또 우리의 ‘마당놀이 문화’ .. 한 마당에서 같이 어우러져서 함께 기쁨을,
또 슬픔은 같이 나누는, 이런 공동체의 문화적 배경을 우리가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언어도 그렇습니다.
한국인의 언어를 보면, 서양 사람들과 다루죠?
서양 사람들은, 개인주의적 가치관의 영향으로서, ‘내 집, 나의 가정, 내 어머니,
내 학교, 나의 나라’ 이런 표현을 많이 쓰지만,
우리들은 항상 ‘우리 집, 우리 어머니, 우리 학교, 우리 나라’
심지어는 ‘우리 마누라’ 그래요.
주2)
저 유명한 작곡자 하이든이 말이죠. 영국의 런던에서 자기가 작곡한
오라트리오 ‘천지 창조’를 공연하게 되었습니다. 공연이 끝났어요.
사람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지휘자와 성가 대원들에게 보냈다고 합니다.
그때 갑자기 그 성가대의 지휘자가 박수를 받다 말고
이층의 발코니를 향해서 계속 소리쳤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이상해서 생각해서 그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니까
거기 하이든이 있었어요. 작곡자가 있었어요.
그는 영광을 하이든에게 돌리고 싶었던 거예요.
‘나는 하이든의 곡을 지휘한 것에 불과합니다. 하이든입니다 하이든.’
하고 소리쳤던 거예요.
그러자 청중들은 벌떡 일어나서 그 하이든을 향해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하이든이 아주 이상한 제스처를 취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제스추어가 워낙 감동적이어서
한동안 영국 교회는 이 제스처가 유행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박수를 받으면서 하이든이 벌떡 일어나더니,
저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높이 쳐들고,
이어서 찬양 대원을 향해 두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의 제스처는 두 가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한 것입니다.
성가 대원 여러분이 당신들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셨고, 여러분이 한 것입니다.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셨고, 당신이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정신이 아니예요? 십자가는 바로 자기 부인의 정신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이웃들을 섬기기 위해서.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일을 한 것입니다.’ ▣ 교회론
'분류 없음 > 연도 알 수 없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도를 향한 바울의 기도 2575 (0) | 2010.07.30 |
---|---|
위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라 2570 (0) | 2010.07.27 |
제 삼의 길 2396 (0) | 2010.04.10 |
요아스 신앙의 실패의 교훈 2305 (0) | 2010.02.11 |
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296 (0) | 2010.0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