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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삼의 길 2396

LNCK 2010. 4. 10. 14:15

◈제 삼의 길                                  인터넷 설교 대강 정리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마22:21



▲당시 세금은 아주 민감한 문제

2천 년 전 유대 사회가 원래 가난한 사회였는데,

로마 제국이 군대 유지 등을 이유로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자 (소출의 30%이상)

유대인들의 세금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다.

이것은 세금징수원인 세리들에 대한 큰 멸시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마22:17

라고 질문한 것은,

명백하게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15


그러니까 단순히 수사학적이나/논리학적인 함정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가장 극도로 분노하고 있는 ‘뜨거운 감자’를 들고 나온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예수님이 대답을 까딱 잘못 하면, 유대인들의 폭동이 일어날 것이고,

그렇다고 세금을 바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 로마 당국에 고소될 입장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제 삼의 길이 있다!’


예수님이 양자 간에 선택을 강요받으신 것처럼,

비슷하게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도,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하고,

내가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상대편에게 책잡히게 되어있는데..

예수님처럼, 신비한 지혜로, 우리도 ‘제 삼의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좌우로 나누어져 있다.

사회적으로 진보(좌파)가 있는가 하면.. 보수(우파)가 있다.

‘중앙집권’을 선호하는 부류가 있고.. ‘지방자치’를 강조하는 부류도 있다.

 

그런데, 제도의 본질이 ‘사람들이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어 주는 데’ 있다면,

둘 중에 어느 것이 좋은지, 논쟁과 토론이 필요하고, 좌우의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지만,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완벽/완전한 제도는.. 없다. 제각기 장단점이 있다.


즉 사람들이 신뢰받고 살맛나는 편안한 세상이라는.. 어떤 본질을 향해 나아갈 때,

중앙집권/지방분권의 논쟁보다 더 중요한 어떤 ‘제 삼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길을 찾는 데는, 상당한 기도와 성령의 인도하심이 요구된다. 쉽지는 않다.

맨 마지막에 사례1로 설명함)


▲비슷한 예로, 학교에서도 단체를 중시해서 교복을 입히자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개인을 중시해서 자율복을 입히자는 주장도 있다.


    교복과 자율복.. 둘 다 장단점이 있다.

    그러나 뭘 입든지.. 그것이 학교교육의 큰 본질은 아니라고 본다.

    옷을 뭘 입는가에 따라서.. 어느 정도 영향은 받겠지만..

    그것이 학교 교육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양편 주장의 줄다리기보다 더 본질적인 ‘제 삼의 길이 있다’는 것이다.

    정말 학교를 학교답게 만드는 것은, 사실은 교복/자율복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데 있다.)


▲세상은 ‘평면적인 사고구조’로 진행되고 있다.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자율과 통제, 전체와 개성

이 모든 것은 ‘평면적인 사고구조’로 이분법적으로 나눈 것이다.

우리는 모두 땅바닥에 발을 딛고서, 좌우 평면밖에 보지 못한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은 ‘입체적인 사고구조’를 갖고 계신다.

주님은 좌우평면 가운데서, 위로 하늘을 쳐다보신다. 하늘 보좌에서 수직적으로/아래로 바라보신다.


이 평면적인 사고구조를 쉽게 설명하면, ‘미로 속을 헤매는 삶’이다.

그러나 입체적인 사고구조는, 천정(하늘)이 뚫려 있으니, 천정으로 활로를 찾는다.

미로 속을 사방으로 헤매지 않는다.


▲한 동안 <블루 오션 전략>이 유행했던 때가 있었다.

레드 오션(근해)에서 막히면, 블루 오션(먼 바다)으로 나아가면 된다는 것이다.

경쟁이 심한 곳에서 빠져나와서, 경쟁이 없는 넓은 바다로 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넓은 바다로 가서, 더 많은 물고기를 잡을지 몰라도,

여러분, 그 ‘블루 오션 전략’도.. 결국 ‘평면적 사고방식’이다.

 

많은 경영실적을 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게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재화창출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인생을 정말 가치 있고 행복하게 하는 결정적 요인은 아니다.

그것이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는 것도 아니요, 영생을 주는 것도 아니다.


참된 인간 존엄성의 회복,

인간의 무거운 짐, 죄에서 구원,

영원한 영생의 보장을 갖고 사는 데는.. ‘공간적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레드 오션이든지, 블루 오션이든지.. 인생은 ‘제 삼의 길’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제 삼의 길, 공간적 사고구조’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인간인지라 ‘평면적 사고구조’를 갖고 있었다.

자기들이 원하는 것은 ‘유대의 로마로부터 독립’이었다.

 

지금 민중의 지지를 얻고 있는 예수를 통해, 그들이 내다보는 미래는

‘로마 군대를 몰아내고 독립하느냐?’ 아니면 ‘로마에 패해서 무위에 그치느냐?’

그 2개의 가능성만을 점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엉뚱한 방식,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

즉 ‘제 삼의 길’을 택하시고, 보여주셨다.

그것은 메시아가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었다.


사느냐/죽느냐, 이기느냐/지느냐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자신이 죽음으로써 사람들을 살리는(구원하는)..

자신이 짐으로써 이기신..

‘공간적 사고방식’이요, ‘제 삼의 길’이었다.


    만약에 예수님이 ‘평면적 사고방식’, ‘이기거나 지는 방식’을 선택하셨더라면,

    당신의 군대(천사)를 동원하셔서

    당신의 대적자들을 단칼에 처리해 버리셨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죽일까/살릴까의 선택이 아니라, 자신이 대가를 치르는 선택을 하셨다.



◑나에게도 ‘제 삼의 길’이 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구원의 길이 있다.

우리가 간절히 얻기 원하는 ‘하나님의 응답’은

내 삶의 정황 속에서 종종 ‘제 삼의 길’로 감춰져 있다.


여러분이 인생이, 평면적으로 볼 때는, 사방에 가로막혀 있을 수 있다.

좌우 사방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도저히 빠져나갈 길이 없다.

부부사이의 관계,

자녀와의 관계,

직장에서의 문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옴짝달싹 못할 수 있다.


여러분, 진퇴양난의 어려움 가운데서

제 삼의 길을 찾게 되시기 바란다.

그 길은 위로 뚫려있다. 위로는 길이 언제나 뚫려있다.


▲사례1.

어떤 형제가 <긴급>이란 제목의 메일을 제게 보냈는데,

자기 회사 사장이 자기에게

‘사주(점 보는) 사이트’에 자기회사 홍보 광고를 올리라는 지시였다.


이 형제는 크리스천으로서, 굉장히 고민을 하게 되었다.

사장의 지시를 무조건 들을 수도 없고, (사주 사이트와 합작하는 것은 신앙양심상..)

그렇다고 사장의 지시를 거부하면, 심한 경우 사표를 쓸 수도 있는데..


제가 메일로 답장을 보내야 하는데,

저도 뭔가 뾰족한 답이 보이지 않았다. 진퇴양난이었다.

그렇다고 ‘그런 회사에는 무조건 사표를 던져라’ .. 이것도 답이 아닌 것 같았다.

왜냐하면 크리스천이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야지, 무조건 뛰쳐나오는 것은 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가 처음에는 ‘형제가 기도하고 알아서 결정하세요!’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답장을 보냈는데, 

형제는, 제 답장에 만족하지 않고, 재차 메일을 보내서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 저도, 그 형제의 문제를 갖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로 간구했다.

'제 삼의 길‘을 찾은 것 같았다. 그래서 이렇게 메일을 보냈다.


형제님, 회사 사장님께 가서 이렇게 말씀 드리세요.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사주 사이트’에 우리 회사 광고를 싣는 것은,

당장은 매출에 반짝 효과가 있을지 모르나,

장기적 안목으로 볼 때, <회사 이미지>에 상당한 마이너스가 될 것입니다.”


그래도 사장이 강행하면, 형제님이 그 지시에 순종하십시오.

형제님은, 크리스천으로서 자기 도리를 다 한 것이라서

주님도 이해하실 것입니다.

 

다행히, 그 형제의 건의가 채택되어

사장은 <사주 사이트>에 회사광고를 제휴하는 것을.. 포기했다고 한다.


이것이 ‘제 삼의 길’의 일례다.

사주 사이트와 제휴할 것인가/아니면 회사에 사표를 던질 것인가

그 양자택일의 갈등 가운데서, 문제의 해답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해결한 것이다.


▲사례2

간호조무사로 근무하는 자매가 하루는 이런 질문을 했다.

자기와 같이 일하는 상급자 간호사가

일산에 있는 어떤 병원에 스카우트 되어 옮기는데,

간호조무사인 자기를 꼭 같이 데리고 가기 원한다는 것이다.


아마 간호조무사가 아주 일을 잘 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간호조무사의 대우가 그리 썩 좋지 못한데,

일산에 개업하는 새 병원에서

상당히 좋은 ‘대우’salary 를 해 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는, 그 병원 재단이 원불교인가?..

기독교인이 마음 놓고 다니기에는 좀 거림직하다는 것이다.

또 어떻게 보면, 그런 식으로 종교차별을 해서는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간호조무사 자매는, 목사인 제게 뭔가 답을 요구하고 있었는데,

제가 ‘Yes, 문제될 것 없다!’ 라는 답을 해주기를 원하는 눈치였다.

자기도 더 좋은 대우를 해 주는, 새 병원으로 옮겨가고 싶다는 것이다.

 

저는 잠시 마음으로 기도한 후에, 이렇게 대답해 드렸다.

‘가라/가지 말라’ 라고 딱 잘라서 선택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자매님이 간절히 기도해서, 하나님께 응답을 받으십시오.

내가 그 병원에 가서, 사람들을 전도해서 인도할 수 있을 것 같으면.. 가시고,

내가 그 병원에 가서, 신앙생활도 제대로 못할 것 같으면.. 가지 마십시오.                    ▣ 삶의 통찰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