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의 갈망, 영의 갈망 (2) 갈5:16~17 -정원 목사님 글 스크랩/축약/출처-
◑3-2. 감정 이라는 자아를 갈망함
▲내적 치유가 영적 충만과 전혀 별개일 수 있습니다.
마음의 치유, 상처의 치유, 내적치유는.. 상처 입은 자아를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자아가 건강해진다고 회복된다고 해서
영적 갈망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분야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이는, 자아에 아픔이 있는데, 그것을 통해 영적인 갈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초췌해보이고 아름답지 않으며 매력이 없어 보이는데
속에서는 깊은 갈망과 은혜가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이는, 자아가 아주 매력적이고 건강하고 아름다운데
주님 자신에 대한 굶주림이 전혀 없고, 자기 영혼이 병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겉은 아름답고 멋진데 속은 텅 비어 있습니다.
이처럼 영혼과 자아의 상태는 전혀 다른 분야입니다. (내적치유 무용론은 아님)
그리고 육신과 자아의 상태는 겉에서 쉽게 보이지만,
영의 상태는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사람의 폐부를 살피시는 주님 밖에는
누가 믿음이 좋은지/아닌지를.. 알기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의 무서운 한 가지는
신앙을 통해.. 자기 육신적 욕망을 이룰 수 있다고 부추기며,
신앙을 통해.. 자기 정서적 자아를 오히려 만족시켜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많은 사역이, 세상적인 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어서
신자들의 육신과 자아를 강하고 충만하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게 된 초기에는 어느 정도 은혜를 누리지만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육신과 자아가 강화되면서 영적으로는 오히려 병들고 약해집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는 죽어 있고
주님 자신에 대한 간절한 열망은 점점 더 잃어져가고 있는데
자신의 그러한 비극적인 상태에 대해서 잘 모르며
그것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잘 모릅니다.
육체 문제가 해결되고, 환경의 문제가 해결되고, 자기 마음(자아)이 치유되면
천국이 오는 줄 압니다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육신'의 필요와 '자아'의 필요는 하늘에서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땅에 속한 것이며 썩을 것입니다.
오직 '영'적인 갈망만이, 즉 주님 자신에 대한 갈망만이
천국을 불러오며, 영원한 것을 우리 안에 형성합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을 극단적으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영적인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이고, 육신적인 것은 무조건 나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올바른 신앙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올바른/사랑의 관계를 형성한 후에
그 결과/열매는
우리 육신을 통해서 또는 자아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실제 일은 육신과 자아가 하는 것입니다. 영혼 혼자서는 실제 일은 못 합니다.)
즉, 나의 육신과 자아가 온전히 영혼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셋이 온전한 한 인격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과 자아가
내 욕망을 따르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고, 복종되는 것입니다. /주.
▲하나님께 기도만 하면, 자기가 영적인 사람이라는 착각
오늘날 주님께 나아가면서도, 천국에 속한 영광의 것들을 구하지 않고
세상이 썩을 것들만을 구하는 안타까운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영이 죽어있거나 거의 감각이 없어서
무엇이 참된 것인지를 구별하지 못하며, 참된 굶주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 시대의 비극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갈망(◑1)과, 육적인 욕망(◑2)과, 자아의 갈망(◑3)..
이 셋의 차이점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 때
자기 안에 있는 갈망이 육적인 것인지, 자아의 것인지, 영적인 것인지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영의 갈망, 주님 자신에 대한 깊은 갈망을 가진 신자를 보기 어려운 것은
육신의 갈망과 자아의 갈망을.. 영의 갈망으로 착각하고 있는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 육신적인 것(광범위하게 쓰면 ‘자아’를 포함함)을 갈망하면서,
그것을 채워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봉사/헌신하면서..
그것을 영적인 것이요, 신앙적인 것이요,
자신이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께'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아시겠지만,
사실 이런 사람은, ‘정욕적이고 자아중심적인 사람’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3-3. 기질 이라는 자아를 갈망함
▲감정적인 경험을 가지고.. 영의 은혜와 임재로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들은 기도 중에 몸이 짜릿한 느낌이나/ 뜨거운 느낌이나/ 전율이나
감미로운 감각이 임하면.. 그것을 영적인 것으로 생각하며
그것을 즐기는 것을.. 영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혼동)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육체에 임하는 짜릿한 감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육체의 감각을 즐기는 것이며, 영에 속한 것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 체험을 계속 하더라도, 영적인 체험이 아닐 수 있습니다.
(성격을 연구하다 보면, 자기 성격적으로 남보다
순간적으로 쨘 하고 마음의 감동을 남들보다 더 빨리 잘 느끼는 사람도 있고,
감정적으로 남보다 눈물이 많은 사람도 있고,
반대로 성격적으로 냉정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하다가, 찬양을 드리다가.. 자기가 울고 감동을 받으면
그것이 아주 영적인 것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감각적인 것이지, 인격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은 기질에 가까운 것입니다. 생리적인 것에 가깝습니다.
집회 시간에 찬송을 드리고 기도하면서 울지만
바깥에 나가면 여전히 육신적이고 자아적인 삶을 사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경우, 눈물이란.. 바람이 불어서 재채기를 한 것과 그리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말씀/기도/찬양을 통해
눈물의 홍수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그리 대단하고 신령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한 순간의 감정의 카타르시스 이상의 은혜가 되려면
그것은 우리 표면의 육체와 겉사람에서만 아니라
우리 안의 좀 더 깊은 곳에 은혜가 역사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삶의 중심 철학과 가치관이 주님 중심으로 온전히 바뀌고
속사람이 충만케 되는 것이며,
그래서 일상의 삶에서 그 효력과 증거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저 한 순간의 어떤 느낌이나 상태는.. 그리 대수로운 것이 아닙니다.
▲자아에는 개인적인 개성이 있지만 그것은 다 아담에 속한 것이며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빠른 것이 좋다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느린 것이 좋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성이 뛰어난 사람이 있고, 감성이 뛰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다 각자가 받은 개성입니다.
그러므로 유식한 자가 무식한 자를 판단할 수 없으며
거칠은 자가 고상한 자를 판단할 수 없으며
고상한 자가 거칠은 자를 판단할 수 없고
급한 자가 느린 자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다 아담으로부터 운 개성입니다.
그 개성은 근본적으로 상호보완적인 것입니다. (완벽하지 않다는 뜻)
급한 사람이나/ 느린 사람이나
감성적인 사람이나/ 이성적인 사람이나
어느 쪽이 우월하고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 개성과 기질에 따라, 동정심이 많아서 구제를 남보다 많이 한다고..
그것이 꼭 영적인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안 믿는 타종교인들도 구제를 많이 합니다.
자기 기질적인 것을, 영적인 것으로 오해/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의 영으로 충만해 진 후에, 자기 기질과 은사를 통해 주님을 더 잘 섬기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선한 일을 하면서, 교만해지고, 우월의식을 느끼고, 그렇지 못한 타인을 무시한다면
이것은 '영적인 인도함'을 받기 보다는, '자기 기질적 인도함'을 받아서 하는 일이라는 증거입니다.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영적인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절대 남을 무시하지 않고, 늘 겸손히 부인합니다.
▲자기 개성에 따라서.. 성령의 역사를 판단하면 안 됩니다.
이성적인 사람은.. 성령의 역동적인 역사를 싫어하고
말씀을 통한 지적인 깨달음에 대해서만 좋아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반면에 감성적인 사람은.. 성령의 역동적인 역사를 좋아하지만
말씀을 통한 지적인 깨달음에 대해서는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성적이든지/감정적이든지
육체적/자아 중심적인 사람은
은혜를 많이 받든지/신기한 경험은 많이 하든지
이렇게 자아중심적인 사람은, 자기 기질에 따라 살지..
자기 삶이나 의식의 변화가 별로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자기 기질과 성향으로 인해,
그 반대 기질과 성향의 사람을 판단하고, 공격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인도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기질이라는 자아'의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자기 기질대로 믿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그러나 그 기질(자아)이 원하는 대로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 감정적 기질을.. 성령의 역사로 오해해서도 안 되며,
반대로 그 이성적 기질로.. 성령의 역사를 비방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자기 기질(자아)을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주장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예수의 영이, 성령이 나를 주장하고,
내 ‘기질적 자아’는 그것에 온전히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복종된 기질’로.. 우리는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주1)
◑1-2. 영적인 갈망
다시 올바른 갈망으로 돌아와서..
▲당신은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을 일으키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회중을 잠시 감정적으로 감동시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과 생명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그것들은 죄를 끊게 하지 못하며, 성결한 삶을 살도록 하지 못하고,
거룩한 천국의 사람이 되도록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저 종교적인 사람들을 양산할 뿐입니다.
여전히 육신적이며, 여전히 자존심과 자아사랑에 충만한,
세상을 사랑하는 그러한 사람들을 만들 뿐입니다.
거기에는 세상과의 구별됨이 없습니다.
(즉, 세상에 나가서 승리하는 사람이.. 영적인/그리스도의 갈망을 가진 사람입니다.)
▲영의 생명이 있을 때 영의 갈망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갈망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곳에는 생명의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나타납니다.
그는 환경의 풍랑에 대해서 그다지 요동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물질과 육신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하든/부하든 그것이 그리 관심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프든/안 아프든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칭찬을 하던/미워하던 별로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자아의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그리스도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는 십자가를 갈구하며 보혈을 양식으로 삼게 될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그리워하고 앙망하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하고
주님이 슬퍼하시는 것을 슬퍼할 것입니다.
영의 생명이 있을 때 거기에는 영의 감각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자아를 느끼는 감각이 있듯이,
나의 영은 주님을 느끼는 감각이 있습니다.
그 감각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혼에는 민감하지만 영의 감각이 없는 이들은
훼방하는 말을 함부로 해도, 아무런 고통의 느낌이 없기 때문에 담대해지게 됩니다.
▲세상에 대한 목마름이 없습니다.
주님은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물을 길러 온 여인에게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지 않을 것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으로부터 온 것, 혼으로부터 온 것에는 다시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의 세계, 영의 갈망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오늘날의 피상적인 신자들은
항상 주리고 목마릅니다. 그리고 세상의 것들을 계속 추구합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온 것에는 진정한 채워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마름을 온전히 사라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다시 세상의 즐거움을 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의 오락을 찾고 티비와 게임과 오락과 채팅을 찾아서 방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독되지 않는다는 뜻)
생수를 마신 이들은, 다시는 썩은 물을 마시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주님께 매혹되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주님이 얼마나 놀라우신 분인지,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
그 영광스러운 교제를 위하여 굶주리고 헐떡거리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실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실제가 부족한 것은 갈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갈망이 많아서 참 갈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에 대한 갈망이 있는 곳에.. 주님이 오십니다.
주님은 임하시기 전에 먼저 배고픔을 주십니다.
주님 자신을 향한 죽음보다 더한 갈증과 고통스러운 갈망을 주십니다.
어떤 이가 주님이 그리워서 아침에도 바라고, 점심에도 바라고
깊은 밤에도 주님이 그리워서 갈망한다면
그는 주님의 임재가 가까운 것입니다.
그것은 왕이 오시기 전에, 먼저 갈망을 예비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오늘날 주를 향한 갈망은 찾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신자들이 주님을 알기는 알지만 멀리서 보고 압니다.
백성들이 모세에게 말하기를, 하나님과 교통은 당신이나 하라고, 우리는 무섭다고..
그 후에 당신이 들은 것을 우리에게 전달해달라고..
마찬가지로 오늘날 신자들은, 그러한 피상적인 관계에서 만족하려 합니다.
▲영적인 갈망이 없는 사람, 영이 죽은 사람은.. 영생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육체는 얼마 있으면 소멸되는 것이며
육이 죽으면 (자아도 같이) 모든 육적인 기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것들은 모두 이 땅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이 살아있지 않고(영적인 예수님의 갈망이 없는 사람)
육신과 자아(혼)으로만 살던 이들은
영원한 곳에서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못 들어 갑니다.)
이들은 기독교에 대한, 말씀에 대한 많은 개념을 가지고 있고
주님의 소문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지만
실제적이고 개인적인 주님과의 교제를 거의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비극적인 삶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다니면서도
육신의 만족과 자아의 만족을 구하는 이들은
실제적으로 천국을 구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천국으로부터 오는 하늘의 신령한 것을 원치 않고, 구하지 않으며
이 땅의 것으로 만족하며 이 땅에 대해서 준비되어 있을 뿐
천국의 삶에 대해서는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못 들어갈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의 천국 창고는 텅텅 비어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곳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비참한 삶입니다.
▲부디 영적인 갈망/예수님을 갈망함을 구하십시오.
영의 갈망을 갉아먹는 육의 욕망과 자아의 욕망을 내려놓으십시오.
육의 욕망을 높이고, 자아의 욕망을 높이고 있어서는
아무도 영의 갈망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의 영적 상태가 이렇게 비참한 이유는
오늘날 유행하는 많은 사역들이 육신을 만족시키고
자아를 만족시키는 것을 신앙의 목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추구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주님을 사랑하면서, 자신의 자아를 동시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이들은 자기를 포기하고.. 주님을 누리거나
주님을 포기하고.. 자기를 누립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추구하던지
아니면 주님을 부인하고.. 자기를 추구하게 됩니다.
누구나 이 선택에 의하여 천국에 속한 사람이 되거나/ 지옥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오늘날 세상은 자기를 긍정하라고 가르치고
그것이 사람의 본능에는 옳아 보이고 즐겁게 느껴지지만
바로 그 본능으로 인하여 세상에 무한 경쟁이 있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있으며, 상처가 있고, 증오가 있으며
지옥(같은 삶)과 재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갈망이 귀한 것은
우는 아이에게 엄마가 긍휼을 가지고 가까이 가듯이
주님은 주님을 알고 싶어서 울고 탄식하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당신이 주를 향한 어느 정도의, 혹은 깊은 갈망이 있다면
그 정도만큼 당신의 영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이 살아 있는 사람은.. 반드시 주님을 갈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육신과 자아의 갈망을 버리고 영의 갈망을 구하십시오.
주님 자신에 대한 갈망을 일으켜 달라고 구하십시오.
주님 자신을 구하십시오. 주님과의 개인적인 교제를 구하십시오..
간절히, 간절하게 주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남의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나의 하나님을 구하십시오. 찾으십시오.
삶이 어렵고 힘들 때 주를 부르다가.. 삶이 편해지면 주님을 잊어버린다면
당신은 주님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지.. 사랑하거나 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혼이 죽은 삶입니다.
살아있으면 갈망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갈망을 구하십시오. 갈망을 증가시켜 달라고 구하십시오.
당신의 작은 갈망이 점점 더 많아지고 증가되도록 구하십시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자신이 먹다가 남은 썩은 음식을 주님께 던져 주고
자신의 헌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역을 하되, 분변해서 하십시오.
주님은 천국의 중심이며 보화입니다.
주님 외에 도대체 이 세상에서 무엇을 구할 것이 있습니까?
우리가 썩을 것을 위하여 많은 시간과 관심을 가진다면
영원한 것을 위하여 언제 심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이들은 주님을 위하여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영원을 심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주를 위하여 일하는 것과.. 주를 갈망하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주님을 부르십시오. 주님의 지배를 받으십시오.
주님이 시키시는 만큼 일하십시오.
오늘날의 사역 가운데는 주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인간적인 행사가 너무 많습니다.
▲복 받은 사람
당신 안에 갈망이 있다면, 주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주를 알고 싶은 갈망이 있다면..
주님께 감사하십시오. 당신은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당신이 돈이 없어도, 학벌이 없어도 용모가 아름답지 않아도,
건강이 허약해도, 유능하거나 영리하지 않더라도,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당신은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당신은 빛을 받은 사람입니다.
주님이 주시지 않으면, 천국에서 받지 않으면
아무도 주님을 진정으로 갈망할 수 없습니다.
그 갈망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주님은 임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임하셔서 천국의 영광을 당신의 안에 심어주십니다.
갈망이 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주님이 오시고 천국이 옵니다.
그는 천국을 누리게 됩니다. 갈망이 있는 곳에 주님은 오십니다. 오셔서 채우십니다.
그 천국을 누릴 때 당신은 탕자처럼 쥐엄 열매를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따르고 구하는 것을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허무한 유행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너무나 행복해서, 너무나 행복해서..
오직 주님을 구하며 다시는 세상의 썩은 것들을 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아침에도 오후에도 밤에도 당신은 오직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구하기 위하여 더욱 더 갈망하는 사람이 되어갈 것입니다.
정원 목사님 글 스크랩, 정리.
..................................
주1)
오늘날 성령의 역사나 나타남에 대한 여러 논쟁들도 진리적인 다툼이 라기 보다는
기질적인 다툼에 가까운 측면이 많이 있습니다.
그 영의 근원에 대한 본질적인 분별보다
지적인 기질과/ 정서적인 기질과/ 활동적인 기질의 사람들이
서로 자신의 성향에 맞는 것을 주장하는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론에 대해서요.
지적인 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소란하고 천박하다고 비난하며
정서적인 이들은 지적인 이들을 답답하고 따분하고 차갑다고 비난하는 식입니다.
지적이고 세련된 신자들은.. 요란하고 역동적인 역사를 보면
성령의 역사가 저렇게 천박할 것인가, 저게 성령의 역사가 맞나.. 하고 의문을 가집니다.
정서적인 신자들은.. 냉냉한 사람들을 보고.. 저들이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다면
저렇게 싸늘하고 딱딱한 것일까..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싸늘하지만 성령의 역사도 있습니다.)
단순하고 행동적인 신자들은.. 조용한 사람들을 보고.. 성령의 역사가 있다는데
저렇게 활동적이지 않고 조용히 있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한 판단들은 다들 자기 기질적 자아의 취향에 속한 것이며
영에 속한 판단이나 분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은
각자 성경 구절을 나열하면서 자기의 옳음을 주장하지만,
그리고 자기의 판단이 기질적인 것이 아니며 성경적이라고 주장하지만..
말씀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자기의 경험과 기질과 성향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 성령론
'분류 없음 > 2010'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곤경 탈출의 해법 2322 (0) | 2010.02.22 |
---|---|
지혜롭게 살기 (0) | 2010.02.19 |
육신의 갈망, 영의 갈망 P1 / 정원 (0) | 2010.02.18 |
하나님과 바른 관계 회복하기 (0) | 2010.02.17 |
순례자의 삶의 진솔한 이야기 2311 (0) | 2010.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