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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0

육신의 갈망, 영의 갈망 P1 / 정원

LNCK 2010. 2. 18. 11:07

◈육신의 갈망, 영의 갈망 (1)                   갈5:16~17            -정원 목사님 글 스크랩/축약/출처-



◑1-1 영적인 갈망/ 그리스도를 갈망하기


▲제/설교자의 삶과 사역의 목적

그리스도를 가까이 알아가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놀라운 일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한편으로는 제 스스로 그리스도를 더 가까이 알아가기를 힘쓰며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 하여,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간절한 갈망을 나처럼 갖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중독 되기를 원하며, 이를 위하여 사역합니다.

그것이 내 삶의 이유입니다.

나는 은사운동을 목적하지 않습니다.

신비체험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신비적인 역사가 많다고 들었음/주)


나는.. 사람들이 현실적인 성공이나 출세를 할 수 있도록 돕고 싶은 마음이 없으며

        (실제로 이런 목적으로 교회 다니며, 이런 목적을 도와주려는 교회가 많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에게 속하고 사로잡힌 사람들을 일으키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를 갈망하는 것..

그것은 살아있는, 영이 살아있는 신자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입니다.


그 영이 살아있는 신자는.. 자연히 그리스도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영이 죽어있는/병들어 있는 신자는.. 그리스도를 갈망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죽어있는 것이며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영혼은 시체와 같은 상태인 것입니다.

그들은 외적으로 살아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죽어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외모는 아름다울 수 있고, 그들의 성품은 매력적일 수도 있으며,

사회적 지위도 뛰어날 수도 있지만.. 그들은 실제로 영혼이 죽어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갈망하지 않는 것..

그것은 너무나 비참하고 끔찍한 상태입니다.

이것은 사업이 파산한 것이나, 자녀가 사고를 당한 것이나,

중한 질병에 걸린 것보다.. 훨씬 더 비참하고 끔찍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영적인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정말 두려운 재앙 앞에서 태연하며 별 것이 아닌 일에는 온갖 호들갑을 떱니다.


그것은 복음과 영적인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썩어질 것(육신)의 상태가 아니고, 영원히 계속될 것(영혼)의 상태입니다.


▲영혼이 살아있는 사람의 특징.. 그리스도를 갈망함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음식 먹고 영양 취해서 생명을 유지하라고..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먹지 않으면 누구나 배고픔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밤에 수면을 취하지 않으면

피곤해서 생명을 유지하기 어려우니.. 밤에는 잠을 자라고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잠을 자지 않으면, 누구나 피곤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이 살아있는 이들은.. 당연히 영적인 갈망, 배고픔, 안식을 추구합니다.

즉,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갖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에게 아침에 일찍 일어나 ‘큐티를 해라,

자주 시간을 내어서 기도를 드려라..’ 이런 식으로 계속 가르쳐야 한다면

그는 영혼이 병들었거나 살아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누가 강요하고 가르치지 않아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다른 이들의 강요와 권유로 인하여 음식을 먹고 사는 이들이 없는 것처럼

영적으로 살아있는 이들은.. 자연적으로 그 생명의 감각을 따라

영의 양식을 스스로 취하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 없습니다.


▲아직 신앙생활이 의무적이십니까? 

오늘날 그 영이 살아있고 충만한 이들은 많이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이들은 그 생명의 감각을 따라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의무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에게 있어서 예배 참석과 기도와 말씀 읽기는.. 의무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생명이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충만하게 살아있다기 보다는

그저 기계적인 프로그램이 많이 입력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지만.. 살아있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생명이 있는 이들은 생명의 특성을 나타내며,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죽은 나무와 살아있는 나무는 겉보기에는 비슷합니다. 그러나 열매의 차이가 있습니다.

죽은 나무는 꽃을 피우지 않지만 살아있는 나무는 꽃을 피웁니다.


    그러므로, 자기 신앙이 의무적/율법적이라 생각되는 사람은

    개인적으로 더 깊이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과 개인적/인격적 만남을 깊이 가지도록 소원해야 합니다.

    보통은, 야곱의 얍복강 체험처럼, 한 번 깊은 은혜의 체험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 그 영의 생명이 살아있는 신자를 보기가 어렵습니다.

(아마 과거에 많이들 살아있으나, 오래 동안 병들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를 갈망하는 이들을 찾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들은 무엇인가 갈망하기는 하지만.. 그리스도를 갈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대다수의 신자들이 갈망하고 있는 것은.. 육신적인 것이며 자아적인 것입니다.

자신의 안에 갈망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주님께 대한 갈망’이 아니라, ‘육신적인 갈망들’입니다.


    오늘날 교회마저도 ‘주님께 대한 갈망’보다는

    신자의 ‘육신적인 갈망’을 채워주려고 안달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육신적 갈망을 채울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주님을 이용하는 기복적 갈망’이, ‘주님을 사랑하는 갈망’을 대치하고 있습니다.

    둘 다 ‘주님’이 들어가니까.. 비슷한 것 같지만.. 둘은 절대 같지 않습니다. /주  

 


◑2. 육신의 갈망


육신의 욕망, 육체의 몸이 원하는 욕망

먹는 것, 마시는 것, 자는 것, 입는 것.. 이러한 육체의 필요에 대한 욕망을 말합니다.

성적인 욕망도 육체의 욕망에 포함될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 자체가 악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몸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선악과를 먹고 타락하면서

이 먹는 문제, 육체의 욕망에 대한 문제가

단순히 몸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사람의 주도적인 욕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육체의 욕망이 사람의 주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서 세상에 속한 것을 이야기할 때

제일 먼저 나오는 증상이 ‘육신의 정욕’입니다.

그 다음에 안목의 정욕, 그 다음에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제는 타락으로 인하여 육신의 정욕이

단순히 육체 기능의 유지와 보존을 위한 것이 아니라, 쾌락적인 것이 되었고

삶의 기쁨을 누리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영을 표현하는 도구로서의 육체가.. 오히려 인간의 주인이 되고

삶의 주목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무서운 비극인데

오늘날 사람들은 이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육신의 갈망을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기도드릴 때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하는 육체의 필요에 대해서

이는 다 이방인들이나 구하는 것이니 그리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뜻과 주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것은 저절로 오는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육체적 필요를, 영적인 필요보다 더 대단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육체를 높이고 대단하게 여깁니다.

육체의 본능적인 욕망을 다스리려고 하지 않고 당당하게 주장합니다.

오늘날 육체의 욕망은 사람들의 우상입니다. 삶의 중심에 있습니다.


▲육체가 자기 주인인 현대인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이 배가 고프면 짜증을 냅니다.

식당에 가서 음식이 늦게 나오면 불쾌감을 느끼면서

그것이 사망에 속한 삶인 줄을 모릅니다. 이것이 무슨 삶일까요?

바로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힌 삶인 것입니다.


그는 육체의 조건과 상태가 그의 마음의 평화에 영향을 줍니다.

그는 영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며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주인은 육체이며.. 영혼은 그 하수인일 뿐입니다.


이렇게 오늘날 육체가 주인된 삶, 육체의 조건을 따라 사는 삶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상은 광범위하게 퍼져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경쟁에 힘쓰며, 학벌을 중시하고, 돈을 우상시하는 것도

육체를 편안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육체 중심의 삶은 동물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동물보다 못한 삶입니다.

동물은 적어도, 육체의 즐거움을 위해서 욕심을 부리거나

마음의 평화를 잃거나, 죄를 짓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육체의 만족을 위한 삶이

그리스도인의 풍성한 삶’이라고 여기는 오해하는 이들은 아주 많이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돈 문제를 해결하고 환경의 문제를 해결하며

자녀를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유명한 대학에 진학시킬까, 애쓰는 이들은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이기는 하겠지만, 아직 육체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3-1. 자아의 갈망


‘자아의 갈망’을 육신적 갈망에 포함시킬 수 있지만,

육신적 갈망이.. 육체적인 것에 반해

자아의 갈망은.. 정신적인 갈망입니다. 자기 기분과 감정입니다.



자아의 갈망은 쉽게 말하면, 자존심이나 기분 같은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를 칭찬해주면 좋아합니다. 비웃거나 조롱하면 싫어합니다.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이상형이 있습니다.

그것이 자아의 애정입니다. 영의 애정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주여, 그리 마옵소서.. 십자가를 지지 마옵소서 하고 주님을 만류했다가

주님께 심하게 야단을 맞은 적이 있습니다.  마16:23

그것은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아의 애정으로 사랑하며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저 인간적인 마음’으로 주님께 죽지 마시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주님은 즉시로 베드로를 꾸중하시면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목숨을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으며 주님을 따라 올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16:24~25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란 '자아의 부인'이며, 

자기 애정, 인간적인 애정, 혈연적인 애정, 기질적인 애정,

그러한 것들은 '자기 목숨'처럼 소중하며, 다른 표현으로 '자아의 애정'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면, 아무도 주를 따를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오늘날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기분과 감정을 따라 사는 것이 죄인지도 모릅니다.

누가 자기를 칭찬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누가 자기를 건드리면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 죄인지도 모릅니다.

이 자아의 자기 기분, 자존심이 십자가에 못 박혀야

주님과 실제적인 교류가 이루어진다는 것 자체도 잘 모릅니다.


모르기 때문에 자기 자아의 자존심을 세우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주님이 죽이라고 하신 것을.. 도리어 살리려고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많은 신자들은 천국을 향하여 가는 길을

아주 정확하게 거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에서 천국의 기쁨과 향취를 모르며

이방인들처럼 자기중심적이 되고, 자기애에 사로잡혀서

지옥 같은 삶을 매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자존심과 체면을 버리지 않으면.. 그것을 통해 역사하는 마귀에게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자아의 욕망, 자기 기분, 자기 감정이.. 버려야 할 것임을 모르고,

도리어 자기 자아의 만족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슬픈 현실입니다.


자녀 사랑, 가족 사랑도, 지나치면 자아 사랑의 연장선이 됩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자아의 애정이 십자가에 드려져야 한다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자녀들에 대한 인간적 애정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도 모릅니다.


주님이 나를 따르라고 권했을 때 어떤 이는 대답했습니다.

주님을 따르겠지만, 먼저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이는 이 소박한 요청에 대하여 주님은 거절하셨습니다.


어떤 이는 주님께 대답하기를 주님을 따르겠지만, 먼저 가족들과 작별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사람의 안에 있는 ‘자아적인 애정’이 미련을 가지고

뒤를 돌아보는 것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마치 멸망해가고 있는 도시를 뒤돌아보는 롯의 아내처럼 말입니다.


자신이 주님을 갈망한다고 여기는 많은 이들이 있지만,

적지 않은 경우 그것은 육체의 욕망에 대한 갈망이며, 자아의 갈망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흔히 믿음이 좋다고 인정받는 이들은

대체로 자아의 갈망이 많은 것이지 (자아로 봉사하고, 돌보고, 구제하고 섬깁니다.)

주님 자신을 갈망하는 영의 갈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드뭅니다.


활동적인 기질 자체가 영의 갈망은 아닙니다.

활발하게 열심히 봉사를 하지만

자기 뜻대로 되지 않거나 오해를 받거나 인정을 받지 못할 때는 분노하며

상처를 받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자아의 감정을 따라 봉사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적지 않은 교회 활동이나 봉사가

주님의 성령으로부터 오지 않고

사람의 감정이나 사람의 동기에서 시작됩니다. 그것은 생명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사소한 일로 자존심을 상하며 사소한 일로 크게 상처를 받습니다.

이것은 그가 자기 자아와 자존심에 속한 사람이며, 혼에 속한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아(자존심)가 아직 십자가에 못 박히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를 갈망하는데, 방해가 됩니다. 자아의 욕구를 갈망하니까요)



◑정리하면..


육에 속한 사람은 육체의 필요와 몸의 요구에 민감합니다.

자아(혼)에 속한 사람은 자기 입장과 체면에 대하여 아주 예민합니다.

이들은 명예를 중시하며 남의 시선을 두려워하고 눈치를 봅니다.

사람의 평가나 칭찬이나 비난에 대하여 아주 예민합니다.


그러면 영의 갈망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 자신에 대한 갈망입니다.

주님을 알고 싶은 갈망입니다.


육의 갈망과 혼의 갈망을 가진 사람들은 기도하러 주님께 나아오기는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나오는 것이지

주님 자신을 알고 싶어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평신도들은 많은 경우 자기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주님을 찾습니다.

많은 경우에 교회에서 인정을 받고 싶어서 여러 봉사에 애를 씁니다.

교회에서 인정받는 것이, 곧 천국에서 주님이 인정하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역자들은 자기가 사역에 사람들이 많아지고, 교회가 커지기를 원합니다.

그것을 부흥이라고,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명한 사역자가 되고 건물을 크게 짓고 이름을 날리고 싶어 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육에 속한 욕망, 자아의 욕망일 수 있습니다.  안 그런 분도 있습니다만.

그러한 육신적 욕망들이 주님께 드려지고 주님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성공이 아닙니다.


영의 갈망이란 주님 자신에 대한 미칠 것 같은 갈망입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 자신을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어떤 것이 아니라

주님을 알고 싶고 주님을 얻기 원하는 간절한 애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의 갈망이란 주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어떤 선물이나 조건이나 응답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그리워서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육신적 욕망, 자아(혼)의 욕망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본능적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기도를 드립니다.

그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 없이 우리가 신선처럼 구름 위를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적당히 절제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더욱이 그것들을 방치해서 강해지면.. 그것은 영적인 소욕을 제한합니다.


그러므로 갈5:16~17절은 말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육체의 욕망, 자아의 갈망은 이처럼 영의 갈망과 충돌하는 면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너무 배가 부르면 그는 주님을 갈망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너무 명품만 좋아하고, 사치로 자신을 치장하는 데만 골몰한다면

주님을 향한 갈망이 자연히 식어집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 성령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