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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0

하나님과 바른 관계 회복하기

LNCK 2010. 2. 17. 21:52

www.youtube.com/watch?v=aLIfBn-9Jf4

◈하나님과 바른 관계 회복하기                          계2:1~7               정리, 출처

 마이클 브라운

         

기독교 신앙은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 기초하고 있는데,  롬1:17

‘의’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즉, 기독교 신앙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1. 실족하는 사람의 마음에 나타나는 어떤 증상들

 

▲1. 예수님을 향한 당신의 개인적 예배시간이 줄어들지 않았는가?

아마 당신은 주님과의 친밀하고 개인적인 시간,

특별히 기도와 경배를 향한 당신의 열정이 쇠퇴했을 지도 모른다.

 

한때 갈급했던 말씀을 향한 굶주림과 열정이

언제부터인가.. 이제는 거의 다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존 G. 레이크는 실족하는 모든 사람의 첫 징후는

말씀을 향한 열정이 식어 가는 것이라고 말했고,

레오나드 레이븐힐은 실족이란 기도의 실족에서 시작한다고 자주 이야기한다.  

 

▲2. 하나님 안에서 당신이 누리는 만족감/은혜에 감사가 줄어든 것은 아닌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은혜의 물줄기가 줄어들수록,

우리는 세상에서 성취/성공하지 못한 자신이 비참하게 여겨지면서

그것을 탈피하려고 발버둥치게 된다. 그 결과,

 

우리는 세상적 성취감을 얻기 위해

하나님만 갖고는 안 되고, 다른 어떤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끼게 된다.

 

우리는 점점 더 세상 사람들에게

더욱 더 인정받고, 더욱 더 수용되기를 바라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말한다.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막4:19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여전히 당신을 만족하게 하는가?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 못하고, 자꾸 돈이 없다/지위가 없다.. 불만을 갖게 된다면,

사실은 그것이 ‘나와 주님과의 관계가 멀어졌다/내가 실족해 있다’는 증거가 된다.

 

▲3. 구령에 대한 열정이 식어버리지 않았는가?

 

국내 전도든 국외 선교든.. 잃은 자를 위한 부담이 줄어든 것,

부흥과 임재에 대한 열망이 줄어든 것

(이것들은 흔히 훌륭한 교회 프로그램 및 세미나들로 대치된다),

열정적인 것보다는, 예의를 더 찾는 것 등은.. 당신에게 열정이 식었다는 증거다.

 

얼마나 자주 당신은 당신의 간증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가?

당신은 한때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때는 간증이 자연스럽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당신은 거의 간증을 피한다.

당신은 자신이 영적으로 무감각하다는 것을 발견하는가?  

 

▲4. 거룩에 대한 기준이 낮아지지 않았는가?

 

아마 당신은 당신 자신, 가족 또는 당신 회중의 삶 속에

당신이 뜨거운 불 속에 있을 때는 생각조차 할 수 없던 일들을

지금 허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혹시 오래 동안 ‘거룩한 슬픔’을 잊어버리고 살지는 않았는가?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겔9:4

 

하나님과 관계가 올바른 사람은.. ‘거룩한 슬픔’이 늘 떠나지 않는다.

‘거룩한 슬픔’이 있는 곳에.. 은혜 또한 넘치게 된다.                         주1)

 

▲5. 당신은 느리게 서서히 실족하고 있지 아니한가?

 

어떤 사람이 실족하는데 20년이 걸릴 수도 있다.

20년 동안, 신앙이 서서히 식어가는 것이다.

너무 천천히 식으니까.. 그 차이를 쉽게 분별하지 못하지만,

나중에 20년 후에 보면, 주님으로부터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게 된다.

 

이것은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이야기이다.

당신은 나이가 먹는 것과 비례하여 점차로 실족해갈 수 있다.

 

당신이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당신의 전 인생이 끝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히4:7

 

지금 주님에게 온전히 대답하라.

당신의 마음을 그에게 쏟아 놓으라. 철저히 기도하라.

성령이 자유롭게 역사 하시도록 하라.

 

주님은 당신을 완전히 회복하실 수 있으시며 또 그렇게 하실 것이다.

주님이 당신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순종하라.

지금부터 시작해서 새로운 삶의 패턴을 정하라.

그러면 매일 매일 주님께 한발자국씩 가까이 다가갈 것이다. 

 

 

◑2. 어떤 것도 ‘나와 주님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설교도/ 목회도/ 사역도.. 이것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그 어떤 것도..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1. 그러나 죄는.. 본질적으로 바로 이 부분을 공격한다.

이 때문에 죄는.. 우리의 삶에서 뿌리째 뽑혀져야 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죄를 미워하고 거절해야 한다.

 

죄가 있는 사람은.. 주님과의 관계가 멀어진다.

죄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도둑질한다.

죄의 목적은.. 우리를 구세주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떼어놓으려는 것이다.

죄로 하여금 이 일에 성공하게 내버려두지 말라!

 

▲2. 우리는 친구를 잃고도.. 축복을 받을 수 있다.

우리는 가진 재산을 잃고도.. 여전히 부요할 수 있다.

우리는 건강을 잃고서도.. 여전히 풍성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예수님과의 관계를 잃는다면,

만일 우리가 주님과의 교제를 잃는다면,

그 때는 이 세상에서의 모든 친구도/ 모든 소유도/ 모든 육체적 건강도/

우리에게 한 순간의 기쁨도.. 내게 참된 만족을 갖다 주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뿌리에서부터 말라질 것이다.

우리는 생명샘을 버렸기 때문이다.  

 

▲3. 그때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우리의 최고의 목표는 무엇이 되어야 하며,

인생의 가장 첫 번째는 무엇이 되어야 하나?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되찾아야 한다.

 

주님을 알고, 주님과 함께 걷는 것이.. 우리의 최고의 목표,

우리의 첫 번째 소중한 것이 되어야 하며,

우리의 힘과 관심의 초점이 되어야 한다.

 

(복을 갈망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며,

기복적 소원을 갖는 것이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예수님에 대한 갈망’을 빼앗아가 버리고,

‘예수님 자리’에 ‘기복적 갈망’이 대치해서 터를 잡고 앉아버리니까..

이런 경우, 기독교 신앙이 뿌리째 흔들거리며, 심한 경우.. 기독교가 아닌 게 되죠.)

 

▲4. 모든 사역과 영적인 활동, 모든 은사와 능력도

우리와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를 대신하는 것이 될 수 없다.

 

실제로, 사역/ 헌신 /봉사는

만일 그것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동행에서부터 흘러나오지 않는다면

단순한 행위나, 과시나, 그저 선행일 뿐이다.

 

그래서 밴스 하브너는                                    *Vance Havner

‘선교사의 첫 번째 자격은 우리가 흔히 듣듯이 영혼을 위한 사랑이기에 앞서

주님을 향한 사랑이다.’ 라고 날카롭게 지적했던 것이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기도, 공부, 영혼구원, 제자훈련, 예배, 설교, 교육,

영적 자녀를 돌보는 것, 봉사, 구제 등―은 하나님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와야 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원천이 되셔야 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동기가 되셔야 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기반이 되셔야 한다.

 

 

◑3.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실패한 에베소 교회

 

▲1. 계시록 2장에서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꾸짖으신 것을 생각해 보시라.

그들은 뛰어난 교인들이었다.

 

그 교회는 열심히 일했으며, 잘못된 가르침을 미워하는 교인들의 모임이었다.

또한 그들은 인내한 무리들이었다. 

    내가 네 행위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2:2

 

여러 면에서 그들은 모범이 되는 교회였으며, 선한 행위를 많이 하고,

그들의 영적인 아버지였던 바울의 경고에 귀를 기울였고 행20:28~31

예수님을 위해 고통도 기꺼이 참아내었다.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계2:3

 

그리고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지치지 않고 행했다. 게으르지 아니한.. 

 

더 이상 주님이 무엇을 원하실 수 있겠는가?

에베소 교인들은 분명 우리 모두를 능가하는 사람들이었다.

 

▲2.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계2:4~5

 

이 얼마나 엄한 책망인가!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희생도 충분하지 않았다.

교리적 순수성도 충분하지 않았다.

 

좋은 목회적 돌봄도 충분하지 않았다.

고통 중에서의 인내도 충분하지 않았다.

 

이 교회의 한 가지 잘못.. 즉, 그들이 첫사랑을 버린 잘못

앞서 대여섯 가지의 잘한 것보다 더 중대한 잘못이었다.

 

그래서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이것은 집단을 향한 명령이다 ―

주님께서 실제로 그들을 그 장소에서 제하겠다고 하신다.

에베소 교회가 없어질 것이라는 말이다!  

 

▲3. 우리가 첫 사랑/주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주님 앞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여기서 볼 수 있지 않는가?

 

하나님의 보상이나 축복, 또는 무슨 은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우리 신앙의 일차적 추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들 각자는, 그분과의 관계를 늘 개발해 나가야 한다.

 

    그런데 교회 생활을, 내 육신적으로 바쁘게 할 수 있다.

    자기가 일주일에 몇 차례씩 교회에 늘 출입하니까..

    자기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착각할 수 있다. 에베소 교회가 그랬다는 것이다.

 

    내가 네 행위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게으르지 아니한 것과...  2:2~3

    주님을 사랑함 없이도, 얼마든지 교회에 열심히 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주님과의 관계’라는 것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고

    그 본질을 ‘교회에서 직분 맡는 것’, ‘교회에서 인정받는 것’

    ‘교회에서 가내안전, 사업번창을 기도로 비는 것’ 등의 잘못된 개념을 갖고 있을 때..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에베소 교회처럼 심하게 책망하실 것이다.     

 

▲4. ‘교회 봉사’라는 덫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렇게 많은 시간을

주님을 사랑함이 식은 채로 나 자신의 힘과 지혜로 일하는데 보내는가?

 

왜 우리는 기도로 더 많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예배로 더 많은 시간을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보내고,

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더 많이 주님과 교제하지 않는가? 왜 그런가?

 

불행하게도 우리는.. 주님과의 가슴 설레는 관계가 없이도

기독교적 봉사라는 모든 외면적인 덫에 걸려들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약 신학자인 로버트 마운스는

‘에베소 교인들은 이단에 대처하고 신앙과 관련된 일들에 광범위하게 참여하다보니

하나님과의 신선한 사랑의 불이 흐려지게 되었다’ 라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선한 일이.. 최선의 일에 방해가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진리 수호, 교회 봉사 열심’을 외치다가,

본질인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사랑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말이다.  

 

챨스 피니도 이에 대해 언급하기를,

‘비록 마음속으로는 신앙에 실족한 사람일지라도

외적으로 열심히 봉사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찰스 피니는 ‘신앙생활의 실족’을 다음의 3가지로 규정한다.

-참된 회심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헌신과 봉사

-신자가 첫 사랑을 떠나는 것.

-아예 모든 헌신, 봉사로부터 뒷걸음질 쳐서

오직 자기만을 기쁘게 하는 옛 삶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것.          /마이클 브라운 글 정리, 출처 상단 우편에. 

 

 

주1)
누가복음19:41에 예수님이 "성을 보시고 우시며"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시며"의 헬라어는 에클라우센(eklausen)이다.

엉엉 소리내어 우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요한복음 11:35에 나타난 "눈물을 흘리다"(에다크루센, edakrusen)라는 동사와는

의미가 전혀 다른 단어이다. 이것은 단순히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예수님이 환영 인파와 함께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다가 갑자기 목놓아 우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도망갈 때도 실망하지 않았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리지 않으셨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는,

그토록 강한, 가슴을 찢는 비탄과 슬픔으로 통곡하며 우셨다.

 

이는 비관주의적 슬픔이 아니라

하나님과 단절된 예루살렘 성이 살육과 약탈과 겁탈을 당하며

아비규환 속에 멸망당할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단절된 수많은 사람들 앞에 놓여 있는

끔찍한 심판의 전조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지금은 노래할 때가 아니다.

잠자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각성과 교회의 영광스러운 회복을 위하여

곡하며 기도할 때이다.

 

춤추던 시대에 흐느껴 울고, 노래하던 시대에 통곡하던 선지자들처럼

불경한 세상과 복음을 거부하는 이 도시 속에서

하나님이 이 땅을 버리지 않도록 하늘을 향해 절규해야할 때이다.

 

위대한 부흥이 있기 전 역사의 어두움은 더욱 짙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소수는 아침의 개벽을 기다리며 흐느끼는 기도로 밤을 지새웠다.

 

 

 

우리는 부흥의 새벽을 기다리며 하나님께 자비를 구해 울부짖는

각성된 소수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때때로 우리가 추구하는 부흥은.. 마음을 온전히 쏟아 붓고 생사를 건 위기감 속에서

오랜 세월을 끈질기게 기도하는 가운데 이루진다.   (이 단락 펀글)                                                             ▣ 복음 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