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능력의 비결 마4:23~25 10.02.21.설교스크랩/축약
◑전인적으로 치유하신 예수님 *전인치료 holistic healing
▲제/설교자가 복음서를 읽으면, 가장 주눅 드는 장면
제가 만약 2천 년 전에 팔레스틴에 살았더라면,
바로 본문 마4:24절의 장면을, 제 눈으로 가장 똑똑히 목격하고 싶습니다.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 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마4:24
저는 조용히 신앙생활 하는 성향입니다.
남들처럼 금식기도.. 이런 것도 잘 못하고,
그래서인지 신유기도, 축사exorcism도 잘 못합니다.
기도도 조용조용하게 하는 편입니다.
그런 조용한 성향의 신자들에게는,
오늘 본문 마4:24절, ‘예수께서 모든 병자들을 다 고치시더라’는 말씀은
크나큰 도전이요,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제가 목회하면서, 여러분을 통해 가장 보이고 싶은 모습이 이런 장면입니다.
신학용어로 ‘능력 전도power evangelism’라는 말을 쓰기도 하지요.
(성령의 능력power을 동원해서,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는 것)
그래서 은사주의 계통의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신 분이, 저희 교회에 오시면,
기도도 약하고, 영성도 약한 것 같다고,
좀 더 뜨겁게 간구하면서, 축복과 기적을 누리는 생활을 체험해야 한다고
그러시면서 교회를 떠난 분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좋아하는 말씀이 있지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겐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막9:23
저도 이 말씀 무척 좋아합니다. 저도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또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약4:2 이런 말씀도 강조합니다.)
▲정말 뜨겁게만 기도하면.. 그러면 다 될까요?
그들 일부 사람들은.. 뜨겁게 기도하고 간절히 부르짖지 아니하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 축복도 오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열정적으로 뜨겁게 기도하면
능력도 생기고, 치유가 나타나고, 축복과 기적이 다 나타날까요?
물론 간절히 뜨겁게 부르짖어서.. 그런 능력을 받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간절히 뜨겁게 부르짖어도.. 능력을 못 받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뜨겁게 간절히 부르짖지 않아서일까요?)
오늘 제 고민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마4:24절의 말씀을, 현대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가능한/ 현실적인 방법론을 찾자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고침+정신적인 고침=전인적인 고침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신다는 소문이 이웃 나라 수리아까지 퍼졌습니다.
그러니 인근 지방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해서 온갖 병든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모여든 겁니다.
온갖 잡병 환자와 귀신들린 자, 간질 하는 자, 중풍병자까지 다 모여들었는데
예수님이 그들을 모두 고쳐주셨다는 겁니다.
정말 우리 삶 속에도 이런 능력이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 마4:24절 말씀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우리가 성경을 볼 때는 언제나 표면에 나타난 얘기 외에
그 이면의 뜻까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단순히 육체의 질병을 고침 받는 것에만 무게를 두지 않았습니다.
마4: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 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예수님이 당시 사람들에게 하신 일, 마4:24절은,
사실은 전인적인 고침, 즉 육체 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완전히 고치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마4:24절은 ‘모든 병자들을 고치셨다’는 관점과는 약간 다른.. ‘제2의 관점’입니다.)
사실 사람에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어느 한 부분이든 회복되지 않으면.. 그게 무슨 복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 나아 온 사람은
그 모든 부분에서 완전히 건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상황을 묶어서 쓸 수 있는 말이 뭐냐?
치유(육체적 질병)와 회복(정신적 질병)입니다.
오늘 예수님께 나아온 자는 그의 생애에 있어서 회복이 일어났고
모든 인생의 문제에서 치유되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해서 오늘 마4:24의 말씀을 한 줄로 정리하면
‘주님께 나아와 육체적으로 치유되고, 정신적으로 회복돼서
우리 인생길 내내 전인적인 평안을 누리게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육체의 질병, 정신적 고통.. 이거 사실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 알고 보면, (육체적)치유와 (정신적)회복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얼마나 삶의 멍에가 무거운지, 당장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단순히 물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천근 만근의 무게로 누르는 육체와 정신적 문제는
마치 ‘두더쥐 잡기 놀이’처럼 망치로 때려잡고 또 잡아도
끊임없이 여기저기서 우후죽순처럼 튀어 나와서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러니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치유와 회복’이 어찌 작은 복이라 하겠으며,
목회하는 제가, 여러분을 통해 가장 보고 싶은 장면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예배드리는 이 순간에도, 육체적/정신적 질병으로 신음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그 복을 무시하고 살 수 있겠습니까?
뜨겁게 기도해서 그 복을 받을 수 있다면.. 뜨겁게 기도해야 하며,
금식하며 부르짖어서 받을 수 있다면.. 금식하고 부르짖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가능한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데,
제가 생각하는 해결책을..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전인치유 능력의 비결
그 해결책을 알기 위해서는, 즉 육체적/정신적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앞서 나오는 마3장과 마4장에 나오는 사건(문맥)을 돌아봐야 합니다.
거기에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님의 ‘치유와 회복의 비결’이 숨어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예수님의 방법은.. 말만 앞세우지 않으시고,
먼저 행하시고, 그 다음에 가르치셨습니다.
3장과 4장의 사건을 통해서도, 그 사실은 여실히 증명되고 있습니다. 살펴보면,
▲1. 겸손
마1장에서 예수님의 족보를, 2장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3장에는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의 기사가 나오고,
바로 이어서 예수님께서 처음 공생에로 등장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처음 대중들 앞에 나타나서 하신 일이 뭐냐 하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사건이 오늘 본문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그는 근본이 하나님의 본체(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빌2:6
그런데 그런 분이 신성을 스스로 버리고 자기를 비워
스스로 종의 형체로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 모습이 우리가 치유 받고 회복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낮아짐, 비움, 겸손이 그것입니다.
그 분은 늘 먼저 행하시고 나서, 가르치셨다고 했지요?
마3장에서, 세례를 받으시는 겸손을 먼저 보이시고, (행하시고)
마4:24절에서, 무수한 병자를, 육체적+정신적/전인적으로 고치신 것입니다. (치유를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 가운데 마4:24절의 전인적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려면,
저와 여러분이 먼저 예수님처럼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겸손한 자에게 능력이 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낮아지지 못하는 마음과, 비우지 못하는 욕심 때문에.. 병이 나는 것을 아십니까?
내 마음속에 부아가 치밀어 오르고, 그래서 힘들어 하고,
어렵고 괴로운 온갖 종류의 고통이.. 거기서 교만에서 나온다는 것을 아세요?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고개 숙여 세례를 받으시면서
당신의 마음속으로 다짐하셨을 각오를 한 번 생각해 보시지요.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세례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와 광야를 통과하는 것과 같다고 설명했습니다.
홍해 바다를 건넌 이상 이제는 더 이상
자기들이 살았던 이집트로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광야를 통과하면서, 바다 저편에서 썼던 것들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면서, 그 과정을 거치셨을 겁니다.
이제 더 이상, 신God으로서 누리는 권리는 이제는 없습니다. 물 건너 갔습니다.
이제부터는 인간으로서 배곯아야 하고, 아무 데나 엎어져 주무셔야 하고,
인간들도 성가신 생리현상에 다급해 하셔야 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그런 천박한 삶을 사실 수 있습니까?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당연히 그분을 본받아 겸손히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마3장에서 겸손하신 예수님이, 4장에서 능력을 나타내었다는 것입니다.
▲신구약가운데, 가장 많이 강조하는 것도 바로 낮아지라는 말씀입니다.
그 동안 새벽기도 때 쭉 읽어나갔던 잠언, 사무엘서, 고린도서도 읽어 보면
끊임없이 낮아질 것을 강권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낮아지고, 비우고, 섬기지 않는 한
치유니 회복이니 평안이니.. 그 어떤 능력도/은총도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다른 성품은 무섭지가 않은데
겸손하지 않은 인간을 향해 던지시는 주님의 시선은.. 너무나 무섭고 소름 끼칩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세요.
하나님은 겸손하지 않은 것을 가장 무섭게 다루십니다.
비도덕적인 죄보다.. 더 가혹하게 다루시는 게 '교만'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병이.. 겸손하지 않는 까닭에 온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병마 뿐 아니라.. 인간 대부분의 정신적 문제 포함해서 문제는 바로 거기서 옵니다.
▲여러분! 저는 이 부분에 있어서 세상 사람들이 쓰는 속어로
다시 한 번 여러분께 경고하고 싶습니다. (부디 이해하시고 들어 주십시오!)
여러분! 혹시 여러분이 잘난 게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뭔가 됐다고, 뭔가 손에 가진 게 있고, 이만하면 됐지 싶은 게 있으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까불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그야말로 ‘가오’잡지 마세요! (일본말로 ‘얼굴’, 근엄한 얼굴)
바짝 엎드리고 주인의 처분만 기다리는 종이 되십시오!
왜 그래야 됩니까?
단순히 교만한 것에 대한 벌이 무서워서 그렇습니까?
그게 아니라, 그렇게 낮아지고 비울 때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치유와 회복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열등감이든 우월감이든 생기지 않고
나를 괴롭히는 비교의식도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감사의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을 가지고 언제나 낮아지고 비우고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실 여러분!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우리의 삶은 어떤지 아세요?
▲겸손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개죽음 당했습니다.
나관중의「삼국지」에 보면 여러 장수가 나옵니다.
장수의 명예란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죽는 것입니다.
①그런데 엉뚱하게 죽는 장수가 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이 <장비>입니다.
부하들에게 포악하게 굴다가.. 잠든 사이에 그들에게 목이 베여서 죽습니다.
개죽음도 이런 개죽음이 없지요.
②또 한 사람이 오 나라의 대장군 주유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35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합니다. 홧병으로 죽는데,
그 이유는, 평생의 라이벌인 촉나라의 제갈공명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치명적인 울화가 생긴 것입니다.
사실 주유는 능력이 출중한 장수입니다.
그 사람 하나 때문에 오나라가 버틸 만큼, 힘/능력/지략을 모두 갖춘 장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제갈공명을 이기지 못하는 것 때문에, 울화를 견디지 못했습니다.
충분히 만족해도 되는데, 충분히 자기가 가진 것을 누리면서 살아도
여한 없는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갔습니다.
그런 그가 죽을 때, 이런 얘기를 남깁니다.
“왜 하늘이 나를 이 시대에/ 이 땅에 보내놓고, 제갈공명도 함께 보냈는고?”
그 막강한 권세를 두고 주유는, 한 사람을 이기지 못해
한참 창창한 35의 나이에 울화병으로 죽습니다.
참 미련하지 않습니까? 참 바보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가만히 정직하게 생각해 보면, ‘최목사나 주유나 다 거기서 거기지..’ 하는 탄식이 나옵니다.
우리도 경쟁하면서, 그리고 쓸 데 없는 비교의식 때문에
그걸 이기지 못해 화가 나고, 병이 나는 게.. 우리의 솔직한 모습이 아닐까요?
▲2. 기적이 아니라, (평범한) 말씀으로!
4:24절의 전인치유의 능력이 나오기 전에,
4장 초입에 보면, 예수님이 사탄에게 시험을 당하는 모습이 나오지요?
그 유혹을 한 마디로 말하면 어떤 시험입니까?
마술적/기적적인 것들을 주겠다(또는 사용하라)는 겁니다.
하루아침에 변화되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혹 우리 신앙의 목적이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단번에 확 뒤집을 수 있는데요!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금방 대박 한번 터뜨릴 수 있는데요!’
그게 우리의 마음일 수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인들 왜 그런 방식으로 못하시겠습니까?
‘세상을 구원하기만 하면 됐지, 방법이야 아무렴 어때?
왜 하필 그 처참하고 구질구질한 십자가야?’
이게 사탄의 유혹이고 전술입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다!
우리 모두는 십자가의 고통을 벗어나서
하루아침에 확 편안한 삶을 살게 되는 게 복이라고 생각하지만
주님은 무언(無言)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무능하고 평범한 보통 인간으로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능력의 삶이고 축복된 삶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그 시험을 다 이기셨습니다.
기적적 능력이 아니라, 보통 사람으로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전인적 치유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주님 곁에 나온다고.. 무조건 치유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요란하게 기도하고 극성스럽게 믿음생활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백날 금식 해도 말씀으로 살지 못하면.. 능력은 결코 나타나지 않습니다.
조용히 믿음생활 해도, 겸손한 마음과/ 말씀을 좇아 살려고 하면.. 능력은 반드시 나타납니다.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고 평안해집니다.
눈에 확 뜨이는 기적이 없어도.. ‘조용한 기적’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주1)
(눈에 확 뜨이는 기적이 처음에는 순수하다가.. 나중에 변질되기 쉽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과 질병을 담당해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얼마든지 그 모든 것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겸손하기만 하다면, 우리가 말씀을 좇아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감당하려고만 한다면,
우리의 생 가운데도 치유와 기적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신 주님은
지금도 그 평안을 충분히 선사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저 역시도 목회를 하면서 여러분에게 가장 보고 싶은 장면이 이런 모습입니다.
물론 여러분이 콩쿨에 입상하고,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고, 사업이 번창해서
십일조를 십만 유로 내시는 장면도 너무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께 가장 보고 싶은 장면은 그렇게 극적인 게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의 평범하고 지루하기까지 한 일상의 삶 속에서
보고 싶은 모습이 있습니다. (위에서 설명했습니다.)
▲지난 금요 기도회 때 했던 다윗의 이야기로 말씀을 닫겠습니다.
다윗은 모세나 여호수아, 엘리야, 엘리사 선지자 등 그 누구와 견주어도
위대함이 부족하지 않은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생애엔, 남들이 다 있는 한 가지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기적이었습니다.
성경에 그렇게 많이 나오는데도.. 그의 생애엔 ‘기적’이란 게 없었습니다.
바위를 쳤더니 물이 터져 나오고, 태양에게 명령했더니 태양이 멈춰서고,
기도했더니 호수가 쫙 갈라지는 그런 일이.. 그에겐 도무지 없었다는 겁니다.
굳이 있다면 골리앗의 머리에 돌을 박은 건데,
그것은 기적이라기보다는 기술에 가깝습니다.
왜 기적이 없었을까요?
기적 자체가 별 필요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상 가운데 늘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에 그에겐 엄청난 능력이 임했던 것입니다.
늘 하나님을 향해 시를 쓰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사무엘부터 나오는 그의 전기를 읽어 보십시오!
매번 나오는 말씀이 뭐든가요? 늘 똑같습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다윗이 묻자와 가로대”
“다윗이 하나님께 아뢰되”
무슨 사건, 무슨 문제가 터질 때 마다.. 이 말씀은 약속처럼 따라 다닙니다.
그러니 하나님 보시기에는, 다윗이 너무나 사랑스러운 겁니다.
미리 다 손을 안 써 놓을 수 없었던 겁니다.
단조롭고 권태롭고 지루하기만 한 일상 가운데도
그는 말씀을 붙들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할 줄 알았던 겁니다.
이게 바로 다윗의 강점입니다.
아울러 바로 이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장 보고 싶은 최고의 장면이 아니겠습니까?
일상생활 가운데, 겸손하고, 말씀 좇아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거기서 오는 치유와 회복과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주1)
IMF와 또 몇 번의 경제여파로 우리나라엔 이혼율이 급등했습니다.
그 와중에 어떤 부부에게 있었던 일입니다.
여러 돌아가는 사정이 너무나 나빠져서, 결국 부부가 이혼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들 주변에서 어떤 분이 마지막으로 부부 세미나에 참석하고
그들의 이혼여부를 결정할 것을 권했습니다.
해서 부부가 세미나에 참석을 했습니다.
세미나 기간 중에 그 부부는 조금씩 마음이 열리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시간에 부부가 서로에게 편지를 써서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거기서 아내가 남편에게 쓴 편지의 일부분입니다.
“매일 매일 가계부를 보면서 미안해 하며 안타까워하는 당신에게!
늘 돈이 없다고 당신을 원망했고, 무능하다고 당신을 원망했지만
이제 보니 우리 가정에 중요한 수입이 빠진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이들 때문에 얻는 보람의 값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가족이 서로 사랑함으로 얻는 행복의 값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건강하게 살므로 얻는 평안의 값이 있었습니다.
그 어떤 것보다 더 비싼, 그 어떤 것보다 값이 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던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 가정은 회복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그것을 보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 주님만이 그런 치유와 회복을 주십니다.
기적은 바로 이런 게 기적이 아닐까요?
하나님이 우리들에게서 진정으로 보시고 싶은 장면은 이런 모습 아니겠습니까? ▣ 신유,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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