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사람 마7:28~29, 눅5:1~11 스크랩
◑맑음, 따뜻함, 편안함, 부드러움.. 권세자의 증거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7:28~29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악령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악령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먼저 갖춰야할 조건이 있습니다.
영을 보기 위해서, 영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에 앞서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영적인 사람은 영이 ‘맑은 사람’입니다. 삶이 영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도 강조하신 바처럼 어린이들입니다.
또는 비록 나이가 들었어도 어린이들이 지닌 맑음, 영혼의 순수성을 지닌 사람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영적으로 변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눈빛은 더욱 맑아집니다. 인품이 더욱 고결해져만 갑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매는 점점 따뜻해져만 갑니다.
주변 사람들을 아주 편안하게 해줍니다.
지극히 겸손해서 적당한 때 물러날 줄 압니다.
결국 따지고 보니 이 시대 최고의 권위는 순수함입니다. 맑음입니다. 정직함입니다.
겸손함입니다. 따뜻함입니다. 부드러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에 놀랍니다.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권위는 세상 사람들이 권위와는 철저하게도 그 맥을 달리 합니다.
그분의 권위는 경직, 뻣뻣함, 강요, 힘, 법에 의한 권위가 절대 아니었습니다.
친절과 온유, 겸손과 인내, 긍휼히 여기는 마음,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배경으로 한 권위입니다.
이런 사랑의 권위였기에.. 악령조차도 예수님 앞에서 고개를 숙였던 것입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힘 눅5:1~11
사람이 무슨 일을 도모하든지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을 움직이는 일입니다.
회사나 단체들,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그를 존중하는 것이 기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왕이든 사장이든 가장이든 신앙 공동체의 지도자이든
사람을 움직이지 못하는 이는
외적인 제도나 규율에 의존하게 되고, 사람을 압박하여 움직이고자 합니다.
눅5장은, 사람을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깊은 곳에 그물을 친다’는 것과 눅5:4
‘사람 낚는 어부’라는 말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눅5:11
내가 만나는 사람의 아주 깊은 곳을 느끼지 못하고
겉도는 인간관계만이 내가 맺는 관계의 전부일 때,
다른 사람을 내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거나,
내 삶의 들러리 정도로만 여길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움직이게 할 수 없습니다.
그가 느끼는 슬픔, 그가 느끼는 한계,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
그가 느끼는 기쁨을 함께 공감할 수 있을 때,
즉,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 그의 존재를 들어올리고,
진정으로 그를 만나고 함께할 때,
비로소 우리는 사람을 얻게 될 것입니다.
어떤 분이 중년에 이태리 피렌체 근교에 있는 어느 기독교 공동체로 연수를 떠나셨답니다. 그곳에는 세계 각국으로부터 온 성직자, 신학생, 일반인들이 함께 생활하면서 공부도 하고 작업도 하였습니다. 이런 곳에 가면 노동도 신앙 수련의 하나로 보고, 여러가지 일을 나눠서 하게 되는데요, 이 분은 세탁소를 배정 받아서 거기서 작업을 하게 되셨는데, 당시의 체험을 아래와 같이 적으셨습니다. “저와 같이 일하게 된 파트너는 엣띤 예비신학생이었습니다. 너무 어려서 마치 아들과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도메니코라는 예비신학생은 슬로바키아에서 왔습니다. 그는 순하고 착했습니다. 그리고 저와 100% 협력을 해주었습니다. 그런 공동체 생활에서 쉽게 발생할 수 있는 불협화음, 긴장, 스트레스, 균열이 그와는 전혀 없었습니다. 제가 세탁소에 맡겨진 흙 묻은 옷들을 손빨래하자고 하면, 그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기계로 빨래하자고 하면, 그는 그렇게 했습니다. 또 빨래를 밖에다 널자고 하면, 그는 두말하지 않고 OK하였습니다. 날씨가 좋지 않으니 실내에 빨래를 널자고 하면, 역시 동의하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완전히 하나 되었습니다. 그렇게 몇 주간이 흘렀습니다. 도메니코와 하는 세탁소 일은 평온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하나됨도 굳건해 보였습니다. 그 '하나됨'은 성숙한 신앙인의 표지이지요, 만약 둘 사이에 다툼과 균열이 생긴다면, 그건 아직 미숙한 신앙인의 증거가 되지요. 그런데 날이 갈수록 저와 도메니코와의 일치가 솔직히 말하면 진정한 하나됨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제 의견을 중심으로 일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거의 대부분 제가 의견을 말하면, 도메니코는 제 뜻을 따라주는 형식이었습니다. 그(상대방)를 중심으로 하나 되어야 함을 깨닫게 된 저는 그의 의견을 먼저 물어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의견을 먼저 물어보던 날, 도메니코는 무척 수줍어하였습니다. 그러나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모기만한 소리로 자기 의견을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날부터 저는, 도메니코의 뜻을 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제 뜻을 중심으로 일하다가, 상대방의 뜻을 중심으로 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날 이후, 도메니코의 얼굴은 더욱 밝아졌고, 더 적극적으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물어보지도 않는 자기 집안 이야기와, 자기가 받은 소명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둘 사이의 하나됨과 형제 사랑이 깊어지고 있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됨
◑자연스러움에 대하여
아주 가끔씩 무슨 협의회나 위원회 등에서
간담회니 시상식이니 하는 명목으로 제가 초대 받을 때가 있습니다.
관공서 체질이 아닌 저는 행사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런 행사 특유의 "왕썰렁"한 분위기 때문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곤 합니다.
지독하게도 경직된 분위기, 틀에 박힌 가식적인 의례들, 그 뻣뻣함,
그 어색함이 너무도 싫어 가능하면 그런 장소를 피하곤 하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여러 가지 모습 중에서
제게 가장 긍정적인 모습은 철저하게도 자연스런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지상생활은 지극히 인간적인 삶이었습니다.
가장 인간다운 인간, 너무도 소박하고 정겨운 인간중의 인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이게 진정한 영성이요, 능력의 종이 아닐까요?
복음서에서도 강조하듯이
예수님은 먹음직스런 음식을 눈앞에 두고 절대로 체면 차리지 않으셨습니다.
잔치 집에 가시면 포도주도 한잔 드시고 흥얼거리시면서
잔치분위기에 어울릴 줄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과 한 마음이 되어 축제를 즐기셨습니다.
반대로 초상집에 가서는 복받치는 슬픔을 주체하지 못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펑펑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너무도 잘 어울리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렸습니다.
예수님을 확인한 어린아이들은 멀리서부터 달려와 예수님을 껴안았습니다.
병자들이나 가난한 사람들, 고통 중에 죽어 가는 사람들마저
너나 할 것 없이 예수님을 향해 몰려들었기에
결국 "군중들을 해산시키는 일"이 제자들의 주된 임무가 되고 말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잔치에 오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답다는 말은, 예수님을 닮아 자연스럽다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보다 자연스러울 필요가 있습니다.
따뜻한 인간미를 풍기는 사람, 정겨운 시선으로 이웃을 바라볼 줄 아는 포근한 사람,
그가 바로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은 한없는 자연스러움, 끝없는 부드러움 그 자체이신 분이기에
"완고함", "경직성", "형식주의", "겉치레", "자기 과시" 등을 근본적으로 거부하십니다.
한 공동체의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면, 딱딱하다면, 썰렁하다면,
서로 눈치를 살핀다면, 서로 손해 보지 않기 위해 잔머리만 굴린다면
그 공동체는 결코 그리스도교적인 공동체라고 할 수 없겠습니다.
◑들을 수 있는 귀
‘생텍쥐페리’(1900-1944)의 「어린왕자」에는
어른들의 계산적인 사고방식을 이야기하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옵니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어른들에게 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를 하면,
그분들은 제일 중요한 것은 도무지 묻지 않는다.
그분들은 ‘그 친구의 목소리가 어떠냐? 무슨 장난을 제일 좋아하느냐?
나비를 수집하느냐?’ .. 이렇게 묻는 일은 절대로 없다.
대신에 ‘나이가 몇이냐? 형제가 몇이냐? 몸무게가 얼마냐?
그 애 아버지가 얼마나 버느냐?’ .. 하는 것이 그분들이 묻는 말이다.
그제야 그 친구를 아는 줄로 생각한다.
만약 어른들에게 ‘창틀에는 제라늄이 피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들이 놀고 있는,
고운 붉은 벽돌집을 보았다…’고 말하면,
그분들은 이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생각해 내지 못한다.
대신에 ‘십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다’고 해야 한다.
그러면 ‘야, 참 훌륭하구나!’하고 부르짖는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온갖 잡다한 생각과 근심 중에 살아가느라
우리에게 참된 진리의 삶을 살아갈 방법을 일러주는
많은 예언자들의 외침에 귀를 막았습니다.
여러 방법과 기회 등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도
귀를 열줄 몰랐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귀 먹고 말 더듬는 이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이는 그 옛날 예수님 시대에 해당되는 기적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행하시는 기적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듣지 못하는 귀를 열어 달라고 주님께 청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계산에만 이치가 밝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이치에는 어두운 우리의 들을 수 없는 귀를
주님께서 들을 수 있도록 열어 주셔야 합니다.
주님의 한 말씀, “열려라(에바다)”가 바로 나에게 외쳐질 수 있어야 합니다. 막7:34
계산적으로만 생각하는, 내 귀와 눈이 열려서.. 진리를 듣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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