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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0

냉수한그릇 - 일상의 성령충만 2342

LNCK 2010. 3. 6. 21:02

◈일상의 성령충만                          행10:26                            펀 글 모음



◑성령충만한 보통 사람


▲보통 사람 헨리 나우웬 (1932~1996.09.21) 

「헨리 나웬의 마지막 일기」라는 책을 절반 정도 읽어 보았습니다.             *원제목 : Our Second Birth

세계적인 영성신학자 헨리 나우웬이 (원래 발음은 나윈nawin에 제일 가깝다고 하네요)

64세의 나이로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기 전,

1995년9월~1996년8월까지 1년 동안의 안식년동안의 개인적인 일기를.. 책으로 펴낸 것입니다.


읽어보니, ‘세계적인 영성신학자가 뭐 이래?’ 라고 할 정도로

별로 밑줄 그을 만한 특별한 통찰력insight도 없었고.,

특별하게 하루에 기도를 4시간씩 했다는 기록도 없었고..

그냥 보통 사람의 일상과 똑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록은 있었습니다.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자기 전에 기도를 1분만 하고 잤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바로 그 점이 은혜가 되었습니다.

‘세계적인 영성신학자가.. 어린아이와 같고..

우리와 성정이 똑같은 사람이고..

그냥 겸손한 보통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슈퍼맨이 아니라!

(물론 나우웬이 우리와 다른 점은, 일상에서 주님과 친밀하고 깊게 늘 교제/동행하며 살았습니다.)

 

그게 바로 헨리 나우웬의 특별한extraordinary 능력(?)이었습니다.

그 분야에 세계적인 권위자이지만, 자기를 높이지 않고, 과대포장 하지 않는 것.. 말입니다.  

비약하면 어쩌면 보통 사람인 우리들도.. 잘 하면.. 세계적인 영성신학자도 될 수 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한번 제 최근 생각을 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성령의 은사(능력)와 성령의 열매(인격)는

마치 철로처럼, 서로가 전혀 만나지 않는 평행선을 이제까지 달려 왔습니다.


성령님은 한 분이신데,

성령을 받은 사람은, 신기하게도, 2부류로 다르게 나타났던 것입니다.

-외적 성령의 은사를 받아서, 병을 고치고, 능력을 행하는 사람과

-내적 성령의 열매를 맺어서,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 의 2부류입니다.


그런데 원리적으로 보면, ‘둘은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외적은사’가 강하게 나타나는 사람은..

인격적으로 더 사랑스럽고, 더 겸손한..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죠. 헨리 나우웬처럼!


    그런데 이 대목에서, 제가 과거에 오해를 일으킨 것은,

    사설 기도원 같은데 가서 보면,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마치 무슨 도사나, 신령한 도인이 된 것처럼 자신을 스스로 신격화하고,

    일반 사람들과는 완전히 차원이 틀린 신비한 사람으로, 그렇게 자기를 높이며 행세했고,

    또한 샤머니즘적 전통에서 자랐던 신도들도.. 그렇게 그들을 도사로 떠받들며 추종했습니다.


    그 결과, 성령의 은사는 ‘특별히 대단한 사람만 받는다’는 공식 같은 것이 생겨버렸습니다.

    그 결과,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인격’이 서로 만나야 되는데..

    만나지 못하고.. 서로 평행선을 달리고 말았습니다.      

 

    ☆관련글   보통 사람의 자리로 늘 되돌아가야...       보통 사람 예수님

                    예수의 잃어버린 30년 세월

 

   물론 나같은 보통 사람이, 신비한 성령의 기적을 일으키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구별된 삶을 순종해서 살다가, 기적이 꼭 필요한 상황이 되면, 기적을 주실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신비한 기적이 몇 년 동안 전혀 한 번도 안 일어나는 것도.. 신기한 일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거지요. 혹은 기적이 필요한 다급한 상황이 안 닥친 것입니다.

    아니면 그런 은사를 덜 받은 것이기도 하겠지요.

    혹은, 기적이 일어나더라도, 자기 스스로 인정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연이라고!)

 

지금 우리나라에서, 은사운동은, 오순절교단을 떠나서, 초교파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기가 은사에 익숙하거나, 그것을 좋아하는 분들은.. 은사주의적 교회로 몰리고 있습니다.

은사에 대해서 함부로 판단하려는 태도는.. 대단히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은사주의자들이 '보통 사람의 자리를 떠나는 순간부터'.. 그 성령운동은 변질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인격’이 만난 예가 나옵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에서 수많은 기적을 나타내 보였던 사도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자, 그 가속들이 나와서, 베드로 앞에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즉시로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행10:26 라고 말하면서

자기를 신격화하려는 사람들로부터, 즉시 ‘보통 사람의 자리’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다른 예도 여럿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단락, 편집자 씀

 


◑일상을 사는 성령에 감동된 크리스천 (사례 모음)


▲내 이름은 ‘크리스천’(기독교인)

미국 남북전쟁 때 ‘프레드릭스버그 대전투’라는 유명한 싸움이 있었습니다.

육탄전까지 치르고는 수많은 부상병들을 중간에 남겨 놓은 채

양쪽 다 후퇴해서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북군 병사 하나가 물통을 들고 달려 나갔습니다.

그를 본 남군에서 사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곧 이 병사가 뛰쳐나간 이유가,

부상자들에게 물을 주기 위해서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목숨을 걸고, 남군/북군 가리지 않고 부상자들에게

물을 마시게 하는 모습을 보고.. 사격은 중단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쌍방은, 한 시간 동안 휴전을 하기로 하고

서로 부상자 처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한 남군 장교가 이 북군 병사에게 물었습니다.

“What is your name?" 당신 이름이 뭐요?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My name is Christian!" 내 이름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에게 크리스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값싸고 편리한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목숨을 건 이름이었습니다. 그의 전 존재를 건 이름이었던 겁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에, 자기 목숨을 걸고

상처입고 죽어가는 부상자들을 돌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편만 아니라 적군일지라도.. 상처 입었고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목숨 걸고 찾아가 물을 주었던 것은, 그가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자기가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국>



▲차인홍 교수를 도운 그리스도인들

(오하이오주 Dayton에 있는 Wright대학 음대교수 차인홍 교수의 삶의 고백)


차인홍 교수는 2살 때 소아마비에 걸린 후, 일생을 휠체어에 앉아 살아왔습니다.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9살 때 성세재활원에 맡겨졌는데,

여기서 바이올린 무료 레슨을 받게 되었습니다.


재활원 졸업 후 24살이 될 때까지, 그에게는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였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장애인들로 구성된 베데스다 사중주단을 창단,

음악인의 도움을 받아 훈련을 쌓으며 연주해 오면서

중.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칩니다.


그는 기적적으로 신시내티 음악대학에 와서 유학을 하게 되고,

뉴욕 부룩클린 음악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습니다.

잠시 귀국하여 대전시향의 악장으로 있다가

다시 미국에 와서 South Carolina 주립대학교에서 지휘를 전공, 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그 뒤에 Wright대학에 교수로 임용되어, 바이올린 교수겸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남자, 아름다운 성공」 

그런데 이 책은, 차인홍 교수께서 헤쳐오신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

그분이 이룩해온 승리의 모습도 귀했지만,

그분의 오늘이 있기까지 곳곳에서 그분을 돕고 격려하고 도운

많은 크리스천들의 모습에 큰 감동을 받습니다.


-성세재활원 시절, 어느 날 재활원을 찾아와 바이올린 가르쳐 주셨던 강민자 선생님,

-베데스다 사중주단을 창단, 피나는 훈련을 시켜주신 고영일 선생님,

-미국 유학길을 도와주고 자신의 유학을 늦추면서 뒷바라지 해 주신 김태경 목사님,

-그밖에도 수많은 조연들이 오늘의 차인홍 교수님의 있도록 뒷받침했습니다.


한번은 South Carolina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직장을 찾지 못하고

L.A.에서 김태경 목사님 교회에 출석할 때였습니다.

부인이 반주를 하고, 차인홍 교수가 성가대 지휘를 했지만,

그 수입으로 가족이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그때 교우 가운데서 한 분이 이름을 밝히지 않고

매월 1천불을 차인홍 교수 가정을 도와주었습니다.

이렇게 생활고의 숨통을 넘어서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83:1의 경쟁을 뚫고 Wright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로 임용되어

새날을 열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차교수은 그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꿈을 이루고 싶으면 당연히 최선과 성실함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 당연한 대가 위에 (플러스)

보이게/보이지 않게 밀어주고 끌어준 이들의 사랑과 은혜가 보태져서

꿈은 성취되는 것이다.


가을 나무 열매를 보라.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가꿔 준 농부의 수고가 있었고,

비와 햇빛을 내려 준 하늘의 은총이 있었고, 뿌리를 받쳐 준 대지의 기운이 있었다.



▲크리스천 의사의 겸손

일평생 외과 의사로서 수많은 환자들을 수술하고

대학병원 원장으로 헌신하셨던 의사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그분은 외과 의사로서 살아온 자신의 인생 여정 속에서 깨달은 것 중에


첫째는,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의사들이 모두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한 환자가, 예상을 뒤엎고 죽는가 하면,

살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환자가, 살아나는 경우를 많이 본데서 온 깨달음 이었습니다.


둘째로, 그분은 인간의 생명을 고치고 낫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외과 의사로서 당신은 째고, 열고, 잘못된 것 잘라내고 다시 꿰맬 수는 있지만,

아물고 회복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미스 김 권사님

지금 권사님은 칠순이 훨씬 넘으셨지만,

교인들은 권사님을 “Miss Kim”이라고 부릅니다.


사랑방 기도 후원자로, 사랑방 식구들을 위해 간절히 중보기도해 주시고,

한나 전도회(60세이상 여성) 회장으로 교회의 어머니 사명을 감당하는가 하면,


새신자 영접부원으로서, 교회에 처음 나오는 분들을 웃는 얼굴로 반기며

자신의 모습을 통해 기쁨을 주시는 주님을 소개하고

그 분들을 잘 안내하면서 행복함을 느끼는 권사님!


그 무엇보다도 외로운 사람들을 보듬어 안고 살아 갈 때

권사님은 생애 최고의 행복을 느끼신답니다.

그 칠순이 넘으신 권사님을, 교인들은 아직도 ‘미쓰 김’이라고 부릅니다.



▲상대를 헤아리는 마음

“일이 힘든 것보다도 심부름하는 사람들이 미워서 도와주기가 싫다.”

이 말은 1980년대 말부터 북한을 방문하고,

지금도 평양과 사리원 등 몇 군데에 국수공장을 세워 북한을 열심히 도와주고 있는

어느 종교인이 한 말입니다.


이 말은, 사실 대북 지원에 나선 실무자들의 공통된 심정이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어렵게 그들을 돕는데

당연히 북한 당국자들이 이를 고맙게 여기고,

또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하는데


북한측 담당자들은, 자기들 입장만 내세우는 등

어떤 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비협조적이어서

‘대체 우리가 왜 이 고생을 하는 거야?’라며, 혼자 분을 삭일 때가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점차 지나면서 그 이유를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일반사람이, 군대 같은 조직사회의 독특한 생리구조를 이해하기 힘든 것처럼

   북한사회야말로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조직구조와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달리 외부 세계와 접촉이 없었다는 점과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서로 지원할 때, 국가 간에 정책적으로 이루어지므로

   실무자들이 서로 고맙다고 얘기할 만한 여지가 없었다는 사실도 알게 된 것입니다.


오늘도 상대의 입장을 헤아려주기 보다는

무조건 일단 내 잣대로, 상대를 비판하는 마음이 앞섰던 것을 회개하게 됩니다.  -변진흥

(사랑은.. 성령의 9가지 중에 첫 번째 열매입니다.)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

평소 잘 덤벙대는 나는.. 종종 지갑을 두고 외출합니다.

하루는 친구 집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려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그제야 지갑을 집에 두고 온 걸 알았습니다.


친구 집에 갈 때는 주머니 속의 동전으로 차비를 낸 터라

지갑이 없는 걸 미처 몰랐죠.

빈털터리인 나는 무려 세 시간을 걸어서 집에 도착했습니다.


녹초가 된 나를 보고 남편이 물었습니다. “막노동이라도 하고 왔어?”

“말도 마...”

사연을 말하니 남편이 피식 웃었습니다.

저는 서운했습니다. '힘들겠다, 내가 다리 주물러줄까?' 뭐, 이런 말이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렇게 고생하고도.. 다음 날 또 지갑을 두고 왔지 뭡니까?

그런데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니.. 오천 원이 있었습니다.

주머니에 돈을 자주 넣어 두는 터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죠.


그런데 그 뒤에도 몇 번이나 주머니 속에서 돈을 발견했지만,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상한 건, 남편이 “오늘 무슨 옷 입고 나갈 거야?” 하고 물어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방에 들어갔다가

내 옷 주머니 속에 돈을 넣는 남편을 보고 말았습니다.

눈이 휘둥그레진 나를 보고.. 남편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3시간이나 걸어온 날, 지쳐서 잠든 모습을 보고

‘건망증 쉽게 못 고치는데, 그럴 때마다 저렇게 고생할 텐데...’ 하는 생각에 안쓰럽더라고.

그래서 그런 일이 생길 때 쓰라고.. 이렇게 비상금을 넣어 두는 거야.”


순간 코끝이 찡해지더군요.

지금도 여전히 덤벙대지만, 그만큼 남편의 사랑 또한 듬뿍 받고 있답니다.

                                                                                           <이영복, ‘좋은생각’ 중에서

 

▲관련글 : 윗글과 반대인 신혼부부의 경우

어렵던 시절, 한 신혼부부가 큰 마음먹고 대중온천탕에 갔습니다.

먼저 목욕을 끝내고 나온 사람이 조금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목욕을 끝내면, 같이 외식도 하기로 했지요.

 

아내 사랑이 극진했던 신랑은

혹시라도 아내가 먼저 나와서 많이 기다릴까 싶었기에

서둘러 목욕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정확히 30분 만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아내는 1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여자들은 좀 오래 걸리는가보네, 하면서 꾹 참고 기다렸습니다.

2시간이 지나면서 신랑은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아내가 혹시 깜빡하고 먼저 집에 갔나 싶어.. 집에 전화를 해봤지만 받지 않았습니다.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혹시라도 바닥이 미끄러워 넘어진 것은 아닌가?

약한 몸에 뜨거운 곳에 너무 오래 있어 탈진한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었지만

여탕에 들어가 볼 수도 없고, 점점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어언 시간은 3시간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목욕 후의 상쾌했던 기분은 이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급기야 매표소 아가씨에게 신신당부를 해서, 안내방송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누구누구 씨! 지금 밖에서 남편이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빨리 나오시랍니다.”

 

남편이 겨우 분을 삭이고 있는데, 아내가 젖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밖으로 나옵니다.

그러면서 염장을 지릅니다.

“뭔 방송까지 하고 난리야, 방송이! 넘사스럽게!”


신랑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한 마디 합니다.

“너, 때 빼러 왔냐/ 목욕탕 물 다 퍼마시러 왔냐? 3시간이 뭐냐, 3시간이?”


 

▲패튼 장군의 자기 부인

세계 제2차 대전의 영웅으로서, 유럽을 나치의 압제에서 건져내는데 큰 공을 세운

조지 패튼 장군에게 한번은 기자가 물었습니다.

“장군께서는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 어떻게 그렇게 훌륭하게 전투를 지휘하셨습니까?

장군의 기동부대를 움직이는 그 많은 연료는 어떻게 얻으셨습니까?”


그러자 패튼 장군은 짧게 대답했습니다.

“그건 나도 잘 모릅니다. 다만 내 뒤처리를 해주는 부하들이 있었습니다.”                           ▣ 성령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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