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아들의 귀환 요15:11~32 스크랩
◑주인의 아들, 탕자
여러 측면에서 문제성이 다분한 한 아이를 만나
(청소년 선도 시설 책임자로서) 정말 죽을 고생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몇 번이고 인연을 끊자고 다짐했었지만, 그게 또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지 않습니까?
당시 아이 때문에 얼마나 괴로웠던지 "하나님, 왜 하필 저 녀석입니까?
어떻게 저런 녀석을 다 창조하셨습니까?"하고 원망도 많이 했었지요.
하여튼 사사건건 제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매일 몇 건씩 초대형사고를 치고 다니는 바람에 뒷수습하느라 하루가 다 갔습니다.
동역하는 형제 수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리 능력 밖의 아이니 웬만하면 포기하라"고 압력을 넣었습니다.
지금에서야 그런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를 절실히 깨닫습니다.
얼마나 반복음적인 생각, 비교육적인 생각인지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진정 그 아이는 하나님께서 제게 보내주셨던 소년 예수였습니다.
하나님이 제게 섬기라고 보내주신 포도원의 아들, 예수님이셨습니다.
소위 "문제아"들을 접하며 얻게 된 한 가지 깨달음이 있습니다.
교사를 진정한 교사로 거듭나게 도와주는 아이들은, 모범생들이 절대로 아닙니다.
교육자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 아이,
우리가 쳐놓은 테두리 안에서 잘 순종하는 아이들이 물론 사랑스럽기는 하지만
교사들을 크게 업그레이드시키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들을 성장시키는 아이들은
맛이 간 아이들, 문제성이 많은 아이들, 사고뭉치들이 분명합니다.
물론 교육자들이 문제아들 때문에 골치 아프고 속도 상하지만
결국 문제아들 때문에 고민하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하면 저 골치 아픈 녀석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 것인가 연구하게 됩니다.
골치 아픈 아이들로 인해, 교사는 자신의 한계와 부족함을 느끼고 좌절하지만
결국 그 아이들로 인해 교사는.. 자기 쇄신과 성장을 위해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따지고 보니 결국 ‘탕자’들이야말로 교사들에게 보내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다루어야할 가장 값진 보석이 바로 우리 ‘탕자’들입니다.
▲탕자들이 소중한 이유가 또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지만, 우리를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들은 우리를 자만하지 않도록 하며, 우리의 성급함과 나약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들의 시선은 너무도 투명한 것이어서
우리의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을 뚜렷하게 지적합니다.
그래서 저는 맛이 간 아이들일수록 더욱 사랑스럽습니다.
혹시라도 오늘 하루 우리가 우리 주변에 이미 와 계신 ‘주인의 아들’을
부담스럽다고 내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보면 좋겠습니다.
어떤 모습으로든 우리를 힘겹게 만드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주인이 보낸 아들입니다.
우리를 사사건건 괴롭히는 사람들은.. 우리를 영적으로 거듭나게 하는 상속자입니다.
결국 우리가 한번 큰마음을 먹는 순간, 크게 한번 양보하는 순간,
관대하게 모든 것을 끌어안는 순간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예수님이자 가장 은혜로운 선물로 변화될 것입니다. <국>
◑가능한 기억을 많이 만들어야 하는 이유
가끔씩 신학생 시절에 썼던 일기를 꺼내봅니다.
서툴고 투박하고 유치해서 얼굴이 화끈 달아오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하고 순수합니다.
힘이 있고 열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모습’이었던 그 기억들은.. 지금의 나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우어줍니다.
잠시 잊고 있던 ‘예전의 내’가
흔들리며 갈피를 못 잡는 ‘지금의 나’를 채찍질하여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기억’에는 이런 힘이 있습니다.
미래를 향한 여정이, 과거의 기억이라는 원동력으로 힘을 받아 나아갑니다.
기억 안에는 새 출발을 위한 힘이 들어 있습니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작은아들은 굶어죽기 직전에, 아버지를 ‘기억’합니다.
아버지께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것들이 사라졌지만,
아버지에 대한 이 기억만큼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기억은.. 아버지를 향해 돌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새 출발을 위한 힘이 되었습니다.
기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값진 선물입니다.
기억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겨지는 바로 그 순간에
나를 구원해줄 수 있는 강력한 빛입니다.
그러니 그 기억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준>
오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은 기억을 많이 만들어야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바쁜 일들을 잠시 뒤로 미루고, 챙길 사람들을 챙깁시다.
아버지가 죽어가는 데도.. 자식이 찾아오지 않는 이유는..
‘아버지와의 아름다운 추억’이 전혀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천민 근성
작은 아들이 아버지 집을 떠난 것은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자기 것이 없어서 떠난 것입니다.
아버지 집에는 무엇이든지 풍성하지만
다 아버지 것이고.. 자기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작은 아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생각은 다릅니다.
큰 아들에게 한 말에서 아버지의 생각이 드러납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작은 아들과 큰 아들 모두,
모든 것이 다 아버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아버지 것이라는 생각은 맞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당신 것이 다 자식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비해 자식들,은 아버지 것은 아버지 것이고,
내 것이 따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로 살림을 차리려는 이 마음,
이 마음이.. 아버지 집의 그 풍요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천민 근성)
그러다 쪽박을 찬 다음에야, 그 풍요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누리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처지가 된 것,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얘기지만.. 그래도 다행입니다.
그리움.. 그것은 한 편으로는 상실의 아픔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소중한 갈망이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전에 그것이 지천으로 많을 때는.. 그 귀중함을 모르고
전에 그것을 누리고 있을 때는.. 그 소중함을 몰라 버리고 떠났는데,
잃고 나서야 그 귀중함을 알고
가난해진 다음에야 그것을 갈망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천민 근성입니다.)
▲우리 인간이 다 그런 것 같습니다.
잃고 난 뒤에 그 소중함을 압니다.
건강을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알고,
아내를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알고,
부모를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알고.
이것이 인간의 구조인가 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가지고 있을 때는 소중한 줄을 모르고
꼭 잃고 나야 그 소중함을 알게 될까요?
이것이 풍요를 살지 못하는 ‘천민 근성’입니다. *‘천민자본주의’ 할 때의 천민
우리가 진정 가난하고 겸손하다면.. 늘 현재적으로 풍요를 사는데
가난하고 겸손하지 못하기에.. 거만하게 그 풍요를 우습게봅니다.
그러다 쪽박을 차고 난 뒤에야.. 과거를 그리워합니다.
더 나아가,
은총과 사랑이 널려 있었을 때는.. 쪽박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쪽박마저도 소중하고
쪽박만큼의 풍요라도 감지덕지 합니다.
‘작은 아들’을 바라보면서
오늘 내가.. 주변의 너무나도 소중한 것들을 잃고 사는 것이 아닌지,
그 은총을 발로 차 버리고 있는 것이 아닌지 되돌아봅니다. <선>
당당한 주인의 아들이면서도
주인의 아들로서 살지 못하고
그 은총을 무조건 불평만 하면서 사는 ‘천민’
그러다가 다 잃고 난 뒤에, 돼지 사료인 쥐엄열매 마저도 없어서 갈급해 하는 ‘천민’
‘나의 오늘’에 만족하지 못하면.. 주인의 아들이라도.. 그렇게 ‘천민’이 됩니다.
나의 오늘에 만족하지 못하면,
30살 때 나는.. 20살 때 나를 그리워합니다. (그런데 20살 때는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40살 때 나는.. 30살 때 나를 그리워합니다. (그때는 탕자처럼 불평했습니다.)
50살 때 나는.. 40살 때 나를 그리워합니다. (그때는 전혀 만족이 없었습니다.)
예수 안에서 ‘나의 오늘’에 만족하지 못하면..
죽을 때까지.. 늘 옛날만 그리워하다가 죽게 됩니다. ‘그 때가 좋았지..’
하나님은 전능하신 섭리로 나를 돌보시므로.. '주인의 아들'로서 나는
나의 오늘에 만족할 수 있습니다.
◑세상과 아버지의 집 사이에서 갈등하는 큰 아들
‘잃어버린 아들의 귀환’에 대해 강론을 할 때
저는 어떤 두려움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이 얘기 자체로 너무도 완벽한 가르침을 주고 있고
그 메시지가 너무도 선명할 뿐 아니라 너무도 감동적이기에
이 얘기에 무엇을 더 얹어 얘기하는 것은
오히려 군더더기요 훼손이 될 것 같은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저를 반성하는 마음으로
큰 아들에 대해 묵상해보았습니다. 큰 아들은 동생에 대해 시샘을 하는데요...
▲먼저, 방탕하게 마음대로 살았던 동생에 대해 샘을 냅니다.
동생이 들어온 뒤에, 큰 아들이 투덜거리는 것을 보면
자기도 아버지의 곁을 떠나고 싶었고
그 이유는, 자기도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생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는데
자기는 아버지를 모시느라 종처럼 일만 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한 때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지금 밖에서 신나게 인생을 즐기는데
일찍 수도원에 들어온 저는 왠지 억울하고
수도원에 들어와 사는 것이 큰 손해를 본 것 같았습니다.
저도, 작은 아들처럼, 하고 싶은 것 다 해보고
탕자였다가 성인이 된 분들처럼 방탕한 생활과 종교의 편력도 다 해보고,
그러고 나서 아버지의 집이 좋다고 확신이 들 때
아버지의 집에 대한 갈망이 생길 때
수도원에 들어오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 때 세상을 기웃거렸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 곁에 있는 것이, 종처럼 산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버지를 떠나 살아보지 못한 것을.. 억울하게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큰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놓고 동생에게 샘을 냅니다.
자기는,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는데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받은 적이 없는데
창기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탕진한 동생한테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 준다고 투덜대며
아버지의 사랑을 놓고 동생을 시샘합니다.
이런 큰 아들에게 아버지는 말합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큰 아들의 불행은
아버지와 늘 함께 있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 되지 못하고
아버지 집의 풍요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버지 집에 있으면서 늘 밖을 동경하고
그렇다고 용기 있게 밖으로 뛰쳐나가지 못합니다.
그 어중간하고 우유부단함 때문에
그는 아버지와 세상,
그 어느 쪽도 확실히 선택하지 못하고
한 편으로는 아버지의 곁을 떠났던 동생을 샘내고
다른 한 편으로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동생을 샘냅니다.
◑아버지의 수동적 속성
이 아버지는 철저하게도 수동형이십니다.
아들에게 늘 손해 보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때로 무능해보이고, 무기력해보이기까지 합니다.
마치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과도 비슷합니다.
작은아들이 유산을 미리 챙겨가겠다는 요구를 했습니다.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정말 속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결과는 확연한 것이었기에..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엄청 화가 났을 것입니다.
저 같았으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유산을 분배해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요구를 뿌리치지 못하십니다.
작은아들이 원하는 대로 그냥 해주십니다.
완벽한 거지가 되고 나서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오는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도 철저한 수동형이십니다.
결코 내치지 않으십니다.
왜 그랬냐고 따지지 않으십니다.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다그치지도 않으십니다.
그저 기쁜 얼굴로 작은아들을 환대하십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변덕스런 우리와는 너무나 다른 분이십니다.
늘 거기 그대로 서 계십니다.
우리가 떠나갈 때도 그냥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물 흘리고 마냥 서계십니다.
우리가 다시 그분께로 돌아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 다른 데 가지 않으시고, 그 자리에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언제나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를 향해 팔을 벌리십니다.
죄구덩이 속에 살아온 우리를 내치지 않으시고 있는 힘을 다해서 포옹해주십니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본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다시 그분께로 돌아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하나님은 ‘어쩔 수 없는 내 사랑’이십니다.
◑잘 해 줘도 불만인 게.. 인간의 속성
고린도서에,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평을 하다가
벌을 받아 불뱀에 물려죽은 이스라엘 백성의 얘기가 나옵니다. 고전10:1~11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사는 길을 알려 주시고, 손수 인도자가 되시었으며,
손수 양식과 음료를 주셨음에도.. 백성들은 불평불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잘 해줘도 불만인 것이지요.
사실 많은 경우 잘 해주면 오히려 불만이 늘어납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그것은 잘 해 주면.. 그것으로 만족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잘 해 주면 잘 해 줄수록.. 만족의 파이가 커지기 때문입니다.
만족이란 무엇입니까?
그릇으로 치자면, 그릇이 가득 차는 것이고
욕망으로 치자면, 욕망이라는 그릇이 가득 차는 것이지요.
그런데 욕망이라는 그릇이 더 커지면
지금까지의 만족이 불만으로 바뀌겠지요.
그러므로 만족의 비결은 만족의 파이를 줄이는 것이요,
욕망의 그릇을 최대한 작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성적으로 말하면 ‘가난’입니다.
아예 허접스런 욕구들은 일어나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군대에 가서 배운 것이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사람들의 불만을 다스리는 법입니다.
군대에 가니까 첫날부터 사람을 개돼지취급을 하며
패는 것은 기본이고 갖가지 야만적인 짓을 저질렀습니다.
그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지만, 그 때 저는
인간적인 대우를 받을 생각은, 아예 거두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밥 한 숟가락만 더 먹어도 그리 기분이 좋고
오늘 하루 맞지 않고 잠드는 것만으로도 대만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신학생들을 양육할 때도 같은 방식을 썼습니다.
한 겨울 추위에, 가끔씩 거의 보일러를 때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불뱀으로 벌을 내리신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닐까요?
점점 늘어나는 요구와 그에 따른 불만이 극에 달하자
하나님께서는 극약 처방으로, 불뱀을 보내어 죽음을 내리신 것입니다.
죽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살려만 주시면, 무엇이든지 다 하라는 대로 하겠다고 하지요.
‘뭘 해 달라’고만 요구하던 것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무엇이든지 다 하겠다’는 자세로 바뀌는 것입니다.
요구는 줄어들고, 경청과 순종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극약처방을 쓰시기 전에
자기 좋을 대로 살던 망나니 삶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이 좋습니다.
꼭 하나님이 한 번 뒤집어엎고, 불뱀을 보내기 전에
‘내 만족의 파이를 스스로 줄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과 현실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아버지께서, 어련히 알아서, 다 마련해 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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