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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변하면 도태됩니다 2365

LNCK 2010. 3. 22. 11:40

◈안 변하면 도태됩니다.                막2:18~22                10.03.07.설교스크랩


 

◑변화에 적응 못 하면 도태됩니다.


▲올 연초에 우리나라에 출시됐던 애플사의 아이패드를 아실 겁니다.

그 단말기 하나면 전화, 메일, TV 등 미디어 부분에 관한 한 못할 일이 없는

혁명적인 기계라고 합니다.


그것을 보면서 생각나는 게 있었습니다.

제가 청년시절엔, 컴퓨터 하면 IBM 이었습니다.

당시 IBM은, 미국에서도 정유회사를 제외해 놓으면 가장 큰 회사였고,

당연히 젊은이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장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그 회사가 나와 있었는데

간혹 그 회사에 다니는 사람을 보면.. 다들 우러러 보곤 했습니다. 


당시에 또 하나 유명한 회사가 코닥이었습니다.

그 회사 역시 연봉도 가장 높고, 보험이나 휴가 등 복지에 관한 한

거의 천국이라 할 만큼 완벽한 회사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LA나 서울에서 ‘코닥 회사’를 다닌다고 하면

모두들 부러워했습니다.


그런데 30년 정도가 지난 지금 그 회사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존재 자체도 찾기 힘들 만큼, 조그만 회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왜 그렇게 됐는지 이유는 간단합니다.

시대의 변화에 빨리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누가 MS-DOS 수준에 머물러 있고,

또 누가 코닥 필름을 사서 카메라에 끼우고 사진을 찍습니까? 


그 비슷한 예가 스위스의 시계공업 입니다.

바늘을 보지 않고 숫자로 시간을 보게 된 전환기 때,

생각 있는 사람들이, 전자시계에 대처를 해야 되지 않겠냐고 건의를 했었는데,

철저히 묵살됐다고 합니다.


그 결과로 이제 스위스의 시계공업은 완전 사양길입니다.

시대가 변하면 거기에 맞게 새로워져야 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그 새로움, 변화란 것에 대해 잠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워져야 하는 것은 꼭 회사뿐 만이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모습도 달라지고 새로워져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그 의미가 뭔지를 함께 알아보려고 합니다.


먼저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새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고

새 부대는.. 바로 그 새 포도주를 담는 우리, 그리고 우리들의 교회,

또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말합니다.


아시다시피 예수 그리스도가 새 포도주로 비유가 됐다면

그 분은 변할 게 전혀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 예수 그리스도를 담아야 하는 우리들은.. 변해야 한다는 얘깁니다.

부대는 늘 새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오래된 부대를 갖고 있다가는.. 부대가 터져서 둘 다 못 쓰게 됩니다.


◑본문 설명


예수님 시대엔 아직 병이란 게 없어서, 포도주를 가죽 부대에 담아 두었습니다.

그런데 새 포도주를 가죽 부대에 보관 할 때는

아직 발효되지 않는 상태에서 포도주를 담아두게 됩니다.


그러면 그 부대 안에서 발효가 일어나서 가스가 차게 되고

거기엔 압력이 생기게 되겠지요?


그런데 새 가죽부대는.. 웬만큼 압력이 커져도 신축성이 있어서 잘 견딥니다.

그러나 헌 가죽부대는..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팽창하다가 결국은 터져 버립니다.

그러면 포도주도 땅에 흘려버리게 되고, 가죽부대도 터져서 못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새 포도주는 반드시 새 가죽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헌 포도주가 있고, 헌 가죽부대가 있다는 얘기겠지요?

이 말씀을 하게 된 데는 배경이 있습니다.

그 상황을 알면,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등장하시자, 당시에 가장 신경을 곤두세운 사람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이었습니다.

그 동안 그들은 자기들 딴에는 하나님을 제일 잘 믿는다고 생각하고

믿음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보니,

그들이 보기에, 예수의 사상은 너무나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것입니다.


무엇보다 자기들이 여태까지 목숨처럼 생각하고 지켜왔던

형식적인 안식일 법이 굉장한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 외에도 외형적으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지키던 율법이 엄청나게 도전받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때부터인가 그들은,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에 어긋나는 게 있을 경우엔, 즉시 예수님을 몰아세운 것입니다.

오늘 그들이 예수님께 따진 것도 바로 그겁니다.


일례로, 왜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금식하고 자기들도 금식하는데

예수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때 예수님이 설명하신 게 뭡니까?


지금 그들은 잔치 집에 신랑과 함께 있는데

그 즐겁고 기쁜 날에 금식할 수 있느냐 그겁니다.

지금은 기쁘게 지내다가 그러나 신랑을 빼앗기는 날이 오면

그때는 금식해야 한다고 설명하십니다.

(막2:18~20, 새 포도주 새 부대를 말씀하신 계기가 된 직전 상황임)      


신랑과 같이 잔치를 하고 있는 시간들은,

바로 지금.. 그러니까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을 통해 하늘나라를 가르치시며

병자를 고치시고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새로운 계명을 알려주시고,

하늘의 일을 하시는 지금은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될 시간이고, 


그리고 곧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실 날이 올 텐데

그때는.. 금식해야 될 때라는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새 포도주’를 깨닫지 못한 이유


▲새 포도주/새 복음이 도래한 시대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바리새인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시대를 분별할 줄 모르고

돌아가는 징후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니까.. 그런 낌새도 모르는 겁니다.


사실 우리의 믿음생활은,

때에 따라서는 스스로를 책망하고 회개하며 재를 뒤집어써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늘 신앙생활이 그런 율법적/경직된/금욕적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생활이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 평안입니다.

그런데 율법에 억눌려서 늘 어둡고 긴장되고 경직된 모습이라면

그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율법적인 억지 경건의 모습을 스스로 만들어놓고

거기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지요.

우리 믿음생활은, 주 안에서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이렇게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이 시간은 정말 축제의 시간이고,

여기서 새 힘을 얻어 일주일의 삶 가운데도

매일 기도와 말씀을 통해, 그런 감격의 시간들이 계속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그 말씀을 우리 삶 속에서 구현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렇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못하고 신앙생활이 자신을 짓누르는 사슬이 되고

억압이 된다면.. 왜 신앙생활을 합니까?

지금 바리새인들의 신앙이 그렇게 율법적이었던 것입니다.


▲이유1. 메시야 개념에 대한 오해

당시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바벨론 포로기가 있는데, 이 기간은 70년 정도인데

그때 대단히 중요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①대표적인 게 구약성경이 써졌고,

②또 하나는 핍박 받는 삶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메시야 대망사상’이 넓게 퍼졌습니다.


특히 메시야가 온다는 것에 대해서는 구약에서 9백회 이상이나 예언하고 있었고,

또 긴 암흑기가 계속되고 있었으므로

이제는 드디어 오실 때가 되지 않았느냐 생각했던 겁니다.


이 사실에 가장 정통했던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바로 구약 성경에 통달했다고 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사야 53장에서 예언된 메시야의 모습을

분명히 알고 있었어야 됩니다.


메시야는 사람들이 보기에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오시는 게 아니었습니다.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그런 모습으로 오실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메시야는 그런 약한 모습으로 오시면 안됐습니다.

물론 심정적으로는 이해가 가지요.

그 동안 너무나 많은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나라가 힘이 없어서였다고 생각한 겁니다.

사실은 자기들의 범죄 때문에 그런 건데...


따라서 이제 오시는 메시야는 약해빠진 메시야가 돼서는 안 되었던 겁니다.

군대 같은, 아주 강력한, 그래서 비바람을 부르고 바다를 가르는

그런 능력의 메시야가 와야 했던 겁니다.


▲이유2. 자기 생각에 세뇌되다.

그런데 성경엔 그런 모습의 주님이 아니시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그것 아세요?

사람은, 어떤 생각을 지속적으로 하다 보면, 스스로 거기에 세뇌된다는 것 아세요?


엄연한 성경의 말씀이 있는데도, 자기들이 원하는 모습은 그게 아니라

자기들 입맛대로 만드는 거예요.

그 생각을 오래 하다 보니 굳어진 거지요.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나고 다윗의 줄기에서 나올 것도 다 알고 있었는데도

그들은 그 모든 사실에 대해서 질끈 눈감아 버린 겁니다.

그리고 자기들 스스로 만든 율법의 주위에 튼튼한 울타리를 쳐 놓은 겁니다.

율법을 어기는 것은 잘못 정도가 아니라 죄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행동들 하나 하나가 그들 보기엔 다 죄인 겁니다.

어떻게 경건의 모습이, 구제나 기도나 금식이 아닌

죄인과 세리와 함께 먹는 것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참 우습게도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획기적인 발명품인데

나올 당시에는 엄청난 저항을 받은 것들이 참 많습니다.


①심프슨이란 사람이 마취제를 발명했는데,

그 동안엔 마취도 안 하고 사람을 꽁꽁 묶어 놓고 수술을 했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겠어요?


그런데 그 모든 고통을 덜어 줄 마취제가 나왔는데도

처음엔 의사들이 그것을 쓰는 것을 꺼려했다는 겁니다.


②기차나 TV가 처음 나왔을 때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마차를 사용하고

라디오에만 매달린 시간이 꽤 길었다는 겁니다.


③제가 무디 목사님 설교를 읽다가 너무나 재미있는 내용을 읽었는데,

그 당시에 자전거가 처음 나왔나 본데,

그 자전거 타는 재미가 신앙생활을 방해하니까, 절대로 자전거를 사서도 안 되고,

즐겨도 안 된다고 권유하시는 내용을 읽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지만, 당시에는 그랬다는 것입니다.


뭐든 시대가 변하면 거기에 따라 변해야 될 게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새 부대가 되어야 되는 건 당연합니다.

우리가 새 부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그 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고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겁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씀 같지만

항상 우리의 문제는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데 있습니다.


▲이유3. 기득권을 잃는 게 무서워서

어쩌면 바리새인들도 속으로는

예수가 진짜 메시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의 문제는

그렇게 되면 자기들이 잃는 게 너무 많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싸움은 언제나 치열합니다.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면

잃을 게 너무 많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요?


삿 6장에 보면 기드온 얘기가 나오는데

어느 날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느닷없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큰 용사여!” 그럽니다. 


자기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자기로 하나님의 큰 용사가 되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버려야 될 것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집에 있는 바알과 아세라 상을 찍어버리라는 겁니다.


즉 우리 속에 있는 우상을 찍어 버려야

우리는 진짜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우상이란, 뭐 명예나 재물이나 자식, 또는 평판에 대한 욕심 등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런 것을 제해 버려야.. 우리는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모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옛 것을 버리지 않고는 예수를 진정으로 모실 수 없게 되는 겁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고집스런 전통과 구습에 얽매여서

메시야가 왔어도 알아보지 못하게 되는 것과 똑같습니다.


◑새 포도주/새 복음의 내 삶에 적용


▲1. 기독교는 ‘뭘 하자’는 결심이나 슬로건이 아닙니다.  

우리가 옛 것을 버리고 일거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고후5:17 말씀이 그 해답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이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씀은 신약 전체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새로워지는 것은

뭘 열심히 하고 애쓰고 노력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어디에 있느냐, 그 자리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이 말씀을 더 구체적으로 푼 것이 요한복음 15:5 말씀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아멘


여기 말씀 보면 열매를 맺게 되는 조건이 뭘 열심히 하라는 겁니까?

노력하고 애쓰라 그러나요?

그게 아니지요?


열매 맺는 조건은 단지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즉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열매는 자연 맺게 된다는 겁니다.

나무에 딱 붙어있는 가지는.. 자기가 하는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줄기에 붙어가지고 뿌리에서 올려주는 영양만 잘 흡수하면

자기도 모르는 새 열매 맺게 되는 걸 보는 겁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겁니다.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디에 있느냐

그 자리잡음이 관건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뭘 잘 했고 뭘 못했느냐 하는 것은 이차적인 것이고

일차적인 것은.. ‘내가 정말 예수님 안에 거하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모르는 길을 운전해 갈 때

내비게이션을 통해서 내가 지금 어디를 가고 있느냐를 확인하는 것처럼,

예수님이란 내비게이션을 통해 내 위치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하다는 겁니다.   


▲2. 나와 주님과 관계, 주님과 거리를.. 늘 점검하십시다.

그래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게 뭐냐 하면,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10:10)


우리가 할 것은 행위에 앞서

그 분을 인정하고 그 분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겐 성령이 임하시고

그 분이 우리 할 일을 지시하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더 많은 사람들은 갈2:20절을 암송하면서, 자기의 신분과 위치를 조율합니다.)


그 때 성령의 기름부음, 성령의 충만함이

우리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일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성령님이 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를 진정으로 모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새로움/새 가죽부대’란 거기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복이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조금 모자라는 사람 되기

그런데 오늘 이 짧은 말씀을 준비하면서 갑자기 막바지에 그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물론 과거에 알았던 사실이지만, 새삼 놀라게 되었습니다.


뭐냐 하면, 우리 사람들은 대부분 일의 효과, 일의 효능을 따지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복음 전하는 일도,

훨씬 효과가 좋을 만한 사람들에게 맡겼더라면 더 나았을 것 같은데,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만약 똑똑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선택해서 제자를 삼았더라면

어쩌면 복음은 훨씬 더 심도 있게, 그리고 더 빠르게 전파됐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똑똑한 이들을 배제하시고,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같은

일자무식의 어부들을 택해서 제자를 삼으셨습니다.

나머지 제자들도 다 그 이하지 나은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 기준이 뭐였을까요?

속에 들어 있는 게 없는 사람들,

그래서 받아들이기 쉬운 사람들을 선택하셨던 겁니다.


효과 면에서는 그리 좋지 않을지라도,

주님께서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만한 그릇에 복음을 담으셨던 겁니다.

생각을 좀 바꿀 줄 아는, 그리고 묵묵히 따를 줄 아는 사람을 선택하셨던 겁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런 것을 요구하시는 게 아닐까요?

어쩌면 나도 바리새인들처럼 우리가 정해 놓은 테두리 안에 스스로 갇혀있으면서,

아무 것도 못하는, 그런 부분은 없을까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줄은 알면서도

너무 오래된 가죽 부대를 갖고 있으면서, 바꿀 엄두를 못 내는 건 아닐까요?


우리에게도 뭘 하나 바꾸자면, 상당한 저항이 야기되는 그런 점은 없을까요?

성경 말고는, 복음 말고는 다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구약에서 신약까지 하나님이 쓰는 사람들을 보면

이른바 ‘제도권 출신’은 거의 없는 것을 봅니다.

세습된 제사장들을 중히 사용하셨다든지, 왕궁의 인사를 쓰신 적이 별로 없습니다.

거의가 재야인사들을 중히 쓰신 것을 봅니다.


오늘도 제도권 인사를 쓰시려고 했다면 당연히 바리새인들을 등용하셨어야 했지만,

쓰임 받은 사람들은 이름없는 갈릴리의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역시 속에 복잡한 게 없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해서 새 포도주를 받아들일만한 준비가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지나치게 유식하지 않고, 지나치게 잘 난 게 없는 부분을 감사합시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는,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기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그 겸손함과 순종을 받으시고

여러분의 새 부대에 새 포도주 되신 예수님을 담으셨을 것입니다.


그 분을 마시고 그 분에게 취해서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복되고 평안한 나날들이 계속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관련글 포로 귀환 후 유대교의 변질(1)          포로 귀환 후 유대교의 변질(2)                            ▣ 삶의 통찰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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