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씻고서 현실을 올바로 해석하기 요9:1~41 주로 편집자 글
요한복음의 특징 중 한 가지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7개의 표적이 나오는데, 그 ‘표적’에 대한 설명을 길게 덧붙인다는 것입니다. 註1)
오병이어의 기적도, 요한복음 6장 내내 길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9장에서는, ‘실로암 연못의 표적’의 의미를 길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길게 설명하면서, 표적의 의미를 풀어주는데.. 무슨 의미일까요?
▲먼저, 이 사건의 주제구절은, 아래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요9: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위 구절을 압축하면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입니다.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예수님이 무슨 조치를 취하신다는 뜻이라기보다,
자기들이 불순종하니까.. 가만히 놔두면 저절로 그렇게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죠.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요9장) 기적의 목적은,
또한 그 기적을 (많은 기적들 중에) 요한복음에 특별히 기록한 목적은
-예수를 믿는 것은.. 보지 못하는 눈이 떠져서,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 드리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Amazing grace’ 찬송에 보면
1절에, ‘이전에 나는 보지 못했으나, 이제는 보게 되었다’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I was blind but now I see!
그 가사를 쓴 존 뉴턴은 소경이 아닙니다. 두 눈이 멀쩡했어요.
그런데 자기가 거듭나고 보니,
이전에 자기가 소경이었으며, 이제야 비로소 보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한국어 찬송가에는 '광명을 찾았네' 이렇게 요약해서 나옵니다.
운율을 맞추다가 보니, I was blind but now I see 가 뉘앙스가 잘 나오지 않습니다.)
이 찬송은, 시대를 지날수록, 구미 신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찬송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 가사에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거듭나 보니까,
이전에 자기가 소경이었다는 것을, (이전에는 절대로 못 깨달았습니다.)
지금에야 비로소 보게 되었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지상사역에서, 안타깝게 원하신 것은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영적인 눈을 뜨려면..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요9:7
꼭 안 써도 될 위 말씀을, 요한은 일부러 명시하고 있어요. 註2)
‘실로암’은 아시는 대로 연못의 이름입니다.
그냥 ‘실로암에 가서 씻고 소경이 나았다’ 그러면 될 이야기를
9장 내내 무려 41절까지 요한이
이 이야기의 영적인 내용을 풀어서 전달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왜 굳이 실로암 연못에 소경을 보내셨나요?
예수님은 다른 소경을 고쳐주실 때, 그냥 그 자리에서 고쳐주셨거든요.
실로암 연못까지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소경이 거기까지 찾아가려면.. 쉽지도 않은 일인데 말입니다.
(어떤 학자는 성전 뜰에서 실로암 연못까지 5키로 라고 합니다. 소경이 가기엔 너무 먼 거리죠.)
그런데 구태여 이렇게 침으로 흙을 이겨서 눈에다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어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 .. 무슨 의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실로암 - ‘보냄을 받았다’는 것은,
기혼 샘의 근원으로부터 물이 보내졌다는 말인데요... 註3)
▲(이 단락은 고민하다가, 오늘 우연히 깨달은 내용인데요)
도무지 해석이 되지 않아서, 고심하다가, 본문 전후 문맥을 훑어보았습니다.
①요6장에서, 예수님은 5병2어의 놀라운 기적을 행하신 후에
그 기적의 의미요, 목적인 ‘생명의 떡’에 관해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의 반응은..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어렵다.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6:80
‘그들은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6:66
괜히 빵만 먹이고, 실패했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그 기적의 결과는.. 없었습니다. 6:69
②이런 상황에서 요7장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요7~8은 ‘예수가 믿을 만한 사람인가, 믿지 못할 사람인가?’의 공방의 연속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적어도 5~6번 정도,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하나님에게서 보내졌다...’를 계속 강조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당신Jesus이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것이죠.
-내 교훈은.. 나를 보내신 분에게서 온 것이다. 7:16
-나는 이곳에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시다. 7:28
-나는 .. 나를 보내신 분에게 갈 것이다. 7:33
-내 설교는 참되다. 이는 내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지 안다. 7:14
-너희는 아래에서 왔으나, 나는 위에서 왔다. 7:23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낮 동안에 하자. 9:4
③이때 사람들의 반응은 이러했습니다.
-예수님 동생들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7:5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가 속이는 사람이다 라고 ... 7:12
-무리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 직전까지는 안 믿었다는 말) 7:31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편이 갈리게 되었습니다. 7:43
-그들이 물었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8:25 등
④이해하기 쉽게, 긴 구절을 짧게 뽑아서 위에서 인용했습니다만..
요7~8장의 전체 맥락은 ‘예수가 누구신가? 도무지 헷갈린다, 그를 못 믿겠다!’ 입니다.
거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적어도 5~6번씩이나,
‘나는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믿었으면, 1번만 말하고 끝낼 내용이었습니다.
일부 믿는 사람이 생기기도 했지만,
여전히 안 믿는 사람들이 대세였습니다.
콧대 높고,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예루살렘 도시 사람들이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저 깡촌 산간벽지 나사렛 출신의 예수라는 청년이
기적 좀 행하고, 설교 좀 잘 한다고.. 쉽게 마음을 열 수 없었던 것이지요...
더구나 그가 하나님의 아들을 자처하니까요.
▲이런 배경에서 요9장을 이해해야 합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고,
예수님은 5~6차례에 걸려, 자신이 '보냄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으니까,
실로암 연못은 = 곧 예수님이십니다.
소경이 눈을 뜨려면.. 실로암에 가서 씻어야 했습니다.
즉, 예수님께 가면, 예수님을 믿으면.. 자기 소경된 눈을 뜰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소경을 실로암 연못까지 보내신 것입니다.
'보냄을 받은 분'을 믿고, 그 분께로 가라는 뜻입니다.
◑영적인 눈을 뜨게 되면.. 자기 처지가 올바로 해석됩니다.
▲3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그 사람은, 애당초 소경된 목적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왜요? 예수님의 기적에 사용되기 위해서.. 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이것을 확대 적용하면,
우리가 당하는 모든 불행과 현실의 처지는
육신의 눈으로 보면.. ‘누구 죄 때문인가?’를 따지게 되지만,
영안靈眼을 떠서 보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 시각으로 보지 못했던 제자들은,
‘이 사람의 소경된 것이, 자기 죄/ 부모 죄 때문입니까?’ 따졌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너무 의외였어요.
날 때부터 소경인 이 사람의 불행한 처지를
제자들이 상상도 하지 못하는 각도에서 보고 계시는 거예요.
‘이 사람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니고
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려 하신다. 라고 하십니다. 9:3
영적 안목으로 바라보니
인간들은 소경이 불행이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사명이다’ 라고 해석하십니다.
▲시각 차이
여기서 신앙의 중요한 원칙 한 가지를 주님이 말씀하고 계셔요.
여러분에게 있어서 경험되어지는 모든 불행은
다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현장이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지금의 현실을 바라볼 때 ‘누구 죄 때문이지?’ 이렇게 봅니다.
그것은 아직 실로암 물가에 가서 눈을 씻은 것이 아닙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기독교의 본질과 나타난 현상(현실)사이에 엄청난 괴리가 있으므로
모두가 혼란스러워합니다.
그래서 많은 현명한(?) 주의 종들이
하나님 말씀을 현실에 적절하게 조화relevant 시킵니다.
그렇게 조화를 잘 시킬수록, 듣기에 솔깃해집니다.
복음이 세상에 딱딱 맞아떨어지니까요. (사실은 충돌하는 부분이 많은데..)
이 모든 혼란의 근원은 <시각차이>입니다.
예수님과 성경은.. 영생의 시각, 영원한 시각으로 말씀하시고,
오늘날 우리는.. 현재의 시각, 현실적 시각으로 판단하니까
완전히 ‘화성에서 온~, 금성에서 온~’ 차이가 나 버리죠. (도저히 안 맞는다는 뜻)
그 차이를 억지로 끼워맞추는 과정에서.. 성공주의, 기복주의가 나오는 것이죠.
▲적용
쉽게 말하면 돈 문제가 생겼습니다.
돈 문제 자체를 보면, 마음이 혼란스러워 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돈 문제’를
현세적 시각으로 볼 것이냐,
영생의 시각으로 볼 것이냐.. 판단해야 합니다.
실로암(예수님) 연못에 가서 씻은 사람만
‘영생의 시각으로’ 현실의 돈 문제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에 돈이 부족하다...
그러면 그런 현실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소경이 날 때부터 소경된 것은.. 무슨 하나님의 뜻이 있은 것처럼 말이죠.
‘아하, 하나님이 나에게 가난으로 자족하는 훈련을 시키시는구나!’
‘내가 돈이 없어야, 가난한 사람의 처지를 실감나게 이해하는구나!’
‘돈이 없으니까 방종하지 않고, 시간이 많이 남아서 좋네!’
‘나에게 돈에 대해 자유하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는 훈련을 시키시는구나!’
... 이런 ‘영적인 시각’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육신적 시각으로만 바라보면
하나님 원망, 부모 원망, 배우자 원망, 경제장관 원망, 월스트리트 원망...
그 원망이 끝이 없습니다. 누구 죄 때문인가 찾는데, 주로 타인을 겨냥합니다.
▲마치는 말
실로암 되신 (보냄을 받은) 예수님께 나아가서
내 눈을 씻지 않고는,
‘보는 자는 오히려 소경’입니다. 요9:39
내 시력이 2.0이라도 (매우 좋은 시력)
세상적, 현세적 시각을 가지고 있으면
‘영적 소경’이라는 것이며,
심지어는 지금 21세기에 벌어지는 예수님의 역사를.. 내가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문제의 해결이 중요하지만,
먼저 문제의 올바른 해석이 중요한 것입니다.
해석을 엉뚱하게 해 놓고서는.. 절대 올바른 해결책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해결을 하려고 애쓰시기 전에, 먼저 해석을 잘 하십시오.
그런데 그 해석은.. 눈을 떠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 눈을 뜨기를.. 주님이 간절히 원하시는 겁니다.
그냥 내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은.. 소경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요9장의 기적을 보여주시고,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신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원합니다.
그런데 애써 기도해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어리둥절해 합니다.
그 이유는, 육신적/세상적/현세적 시각, 즉 감긴 눈을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를 해석하려고 하니까.. 어리둥절한 것입니다.
먼저 실로암 연못에 가서, 내 눈부터 씻어야 합니다!
지금 내 삶에 주어지고 있는 모든 현실에, 여러분 절대 속지 마세요.
절대 그 현실에 마음이 붙어서 속으면 큰일 나요.
우리가 ‘현실에 대해서는’ 모두가 맹인이 되어야 해요.
요9: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
※덧붙여서, 사무엘하를 읽어보면,
거기에 다윗이 (사울 왕이 죽고난 이후에도) 스스로 왕이 되려고, 전혀 발버둥 치지 않았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었습니다. 헤브론에 가서 그냥 가만히 지내더라고요. 삼하5:5
괜히 요압과 아브넬이 서로 싸웁니다.
(적편의 군대장관) 아브넬이 '다윗을 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난리를 부립니다. 삼하3:10
다윗은, 사울 왕에게 대적하지 않았듯이, 이스보셋(사울의 후임 왕)에게 대적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계속 했던 일은, 네편 내편 구분 없이 모두를 사랑하는 일이었습니다.
사울이 죽으면 울고, (적편 대장) 아브넬을 사랑하고, 그가 죽으면 또 울고..
왕위를 얻기 위해.. 싸워서 쟁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결국에 모여서.. 왕위를 제발 받아달라고 다윗에게 청원했습니다.
다윗은 마지 못해 수락한 셈입니다. 삼하5:1~3
다윗이 적극적으로 싸운 대상은, 이방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사탄의 나라를 의미)
같은 나라 안에서는, 절대로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냥 수동적으로 가만히 당하고 있었다니까요!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될 것이다!' 이런 믿음이 있었나 봅니다.
자기가 처한 곤고한 현실에 대한 다윗의 해석은
'어떻게 하든지,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될 것이다!'.. 이런 믿음이 있었으므로, 안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늘의 관점에서 바라본 시각' 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한 사람이 중환자실에 누워서, 이제 길게 한 달 정도만 살 수 있는데,
그 사람의 귀에 들리는 설교가.. 좋은 설교다! 라는 생각입니다.
내가 혹시 설교자라면,
오늘 내 설교가, 임종을 얼마 앞둔 중환자에게 어필 되는지.. 살펴봅시다.
너무 극단적인 예라고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임종을 얼마 앞둔 중환자들에게도.. 반드시 어필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수많은 좋은 설교들을 듣지만,
임종을 얼마 앞둔 내가 그 설교들을 돌이켜 보면서, '다 부질 없는 얘기였네...' 라는 판단이 든다면,
그것은 좋은 설교가 아니라, '부질 없는 설교'가 맞습니다.
...................................
註1) 요한복음 전반부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표적들 가운데서 대표적인 7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①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입니다(2장).
②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표적입니다(4장).
③베데스다 연못가의 병자를 고치신 표적입니다(5장).
④5천명을 먹이신 표적입니다(6장).
⑤바다 위를 걸어가신 표적입니다(6장).
⑥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표적입니다(9장).
⑦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입니다(11장).
한편 요한복음의 후반부에서는 예수님의 표적이
요한복음의 마지막장인 21장에 단 한번 나타나고 있을 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해주신 표적입니다.
註2) 성경에 가끔 괄호()가 나오는 이유
요9:7절이 성경에 괄호( ) 처리가 된 것으로 볼 때, 성경 원문에는 이 내용이 없으나
후대의 성경필사자가 이 내용을 삽입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유대적 배경이 없는 이방인들을 위해서,
그들은 문화배경이 달라서, 성경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우니까
그런 이방인들을 위해서 친절하게 해석을 붙여주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註3) 실로암 연못의 역사적 배경
앗수르의 침공을 앞두고, 유다왕 히스기야가
예루살렘이 포위당했을 때를 생각해서, 성 중에 마실 물이 있어야 되니까..
예루살렘 성 바깥에 525m가량 떨어져있는 기혼이라는 샘물이 있는 것을 알고
그 기혼 샘에서 지하수로를 파냅니다.
그래서 기혼 샘물을 지하수로를 따라 예루살렘 성 안쪽으로 끌어들여
물이 나오게 된 것이 바로 실로암 연못이에요.
물이 기혼에서 실로암으로 ‘보냄을 받은’ 것이지요. ▣ 복음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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