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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의 요한, 계시록의 요한 2383

LNCK 2010. 4. 1. 22:07

◈사도행전의 요한, 계시록의 요한         계1:1~2         08.12.01.설교녹취/정리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계1:1~2



▲사도행전에 나타난 베드로의 맹활약을 대강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베드로가 설교하니, 하루에 3천명이나 세례를 받았다.  2:41


베드로는 (요한과) 미문 앞 앉은뱅이를 일으킨다. 3:1~


베드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치리하면서, 교회의 순수성을 지킨다. 5:10


사람들은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와서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랬다.  5:15


베드로가 룻다에서 애니아 라는 8년 된 중풍병자를 고친다.  9:34


베드로가 욥바에서 죽은 다비다를 일으킨다.   9:40


베드로가 백부장 고넬료 집에서 전도함, 이방인 전도의 문을 열다.  10:1~


베드로가 감옥에서 천사의 방문으로 기적적으로 탈출 한다. 12:11


▲독무대에서 맹활약했던 베드로에 반해, 사도행전에서 요한은 잠잠했다.

사도요한은 ‘주님의 사랑하시는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요19:26, 13:23

사도행전에 뚜렷하게 그 활약이 나타나지 않는다.


예수님 생전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3인방이라 할 만큼, 가장 측근 3명이었다.


그런데 야고보는 행12장에서.. 먼저 순교한다.   행12:2

그래서 지상에서는, 그 행적이 일찍 사라진다. (참고로, 야고보는 요한의 형제였다.)


이제 3인방 중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남았는데,

베드로는, 사도바울이 등장하기 전까지.. 사도행전 전반부의 주연이었다.

그런데 요한은.. 사도행전에서 거의 엑스트라가 된다.


    사도행전에서 오순절 이후로 사도요한이 등장하는 장면은, 모두 3장면뿐이다.

    ①행3장에서, 베드로와 함께 미문 앞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

    ②행4장에서, 베드로와 함께 부활을 담대하게 전도한 것   4:13, 4:19

    ③행8장에서 사마리아에 베드로와 함께 파견된 것  8: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8:14


    3장면 모두, 베드로의 들러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지 않는다. (혹시 내성적인 성향이라서 그랬을까?)


▲요한은.. 지극한 사랑을 받았던 제자였지만... 사도행전에 무슨 뚜렷한 업적/성과가 없다.


요13: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요13: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요19:26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요19: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위 장면에서 보듯이, 예수님 십자가 가까이에 남았던 제자는 요한이며,

예수님이 모친 마리아를 부탁하실 정도로, 요한을 총애했다.


이렇게 사랑과 총애를 한 몸에 받았으면,

예수님이 승천 하신 후에

사도행전에서 뭔가 두각을 나타내어야 정상인데...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였으며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였다.

    그런데 요한은.. ‘한 여인(모친 마리아)의 사도’이었을 뿐, 당시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 글의 요지는, 너무 외적인 성과/업적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러분, 성도는..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자기에게 맡기신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어떤 ‘주연급’ 역할을 맡기셨다면,

요한에게는 그냥 ‘모친 마리아나 돌보는’ 보잘 것 없는 일을 맡기셨다.


주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성공과 효과, 업적의 크기이기 이전에.. 순종이다.

주님은 사도행전에서는.. 요한을 그저 모친 마리아나 돌보며 잠잠히 지내도록 하셨다.


    몸의 각 지체는.. 그 역할이 다른 것이지,

    어떤 지체가, 다른 지체보다 더 우위라고.. 결코 그렇게 단정할 수 없다.

    어느 한 지체가 소중하지 않는 것이 없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지체가, 눈은 눈대로, 코는 코대로 

    각각 자기 맡은 소임을 다하는 것이다.

    ‘누구는 크다/작다’로 .. 결코 그렇게 평가할 수는 없다! 


▲사도행전에서 저공비행 했으나, 계시록에서는 고공비행한 요한

작은 일에 충성된 요한에게

요한은 사도들 중에 가장 오래 살아남아서, 가장 질기게 초대교회 사역을 이어간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인, 요한계시록을 쓰는가 하면,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서(요한1/2/3서)를 썼으며

-말년에 에베소(계2:1)를 중심으로, 계2~3장에 나오는 7교회를 목회한 것으로 알려진다.


사도행전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게 주님을 섬기고 헌신한 것 때문인지,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저자로.. 주님으로부터 예비함을 받는다.

종말에 관한 계시를.. 다른 모든 사도들을 제외하고 요한이 받게 된다.

(계시록 기록 연대를 AD90년으로 볼 때, 다른 사도들은 모두 순교한 상태였다. 어쨌든..)


▲작은 교회도 하나님이 들어서 쓰신다.

①빌라델비아 교회

계3:8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예수님께 칭찬 받은 것은, 규모나 예산이 커서가 아니었다.

이 교회는, ‘작은 능력’(크게 남들 눈에 안 띄는 성도들)을 가진 교회였지만,

하나님께 칭찬과 인정을 받았다.


②서머나 교회는 ‘가난한’ 교회였다.

계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가난한 교회였지만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다.

(비교하는 것은 안 좋지만)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자교회였지만, 책망을 받았다.


③행17장에 데살로니가 교회도, 사도바울이 3주간 머물면서 개척한 교회였다.

그 후에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써 보내기도 했지만,

여러분, 바울이 3주간 머물면서 개척한 교회가.. 크면 얼마나 크겠는가?

아마 가정교회 수준의 작고 아담한 교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칭찬한다.

살전1: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그러므로 여러분, 작은 것으로 인해.. 낙심해서는 안 된다.

작기 때문에 일을 못한다는 것은.. 시장경제 논리에 자기 스스로 항복하는 것이다.

오히려 작기 때문에.. 더욱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기회로 여겨야 한다.

데살로니가교회처럼, 온 사방에 모델이 될 수도 있다.


▲여러분, 비슷한 예가 성경에 셀 수 없이 많이 나온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이,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다’는 베들레헴이었다. 마2:6

예수님의 고향이 ‘거기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 하던 나사렛이었다. 요1:46


예수님의 초림 때.. 당시 대표적 3D업종이라던 ‘목자들’에게 그 소식이 전달되었다.

구약성경을 박식하게 알고 있던 서기관들이 아니었다.


‘초림’ 때가 그러했다면, ‘재림’ 때도 이와 비슷하리라고 본다.

가장 미미한 사람들을 통해서, 예수님은 ‘재림의 징조’를 아마 알리실 것이다.


그 외에도, 예수님이 생전에 주로 찾아가신 사람들은

가난하고/낮고/천한.. 그런 사람들이었다.

수로보니게 여인 등.. 이런 예는 셀 수 없이 많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늘날 찾아가기 원하시고, 당신의 임재를 나타내기 원하시는 사람은

‘의외의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의 요지는, 그러므로,

자기가 작고/가난하고/낮고/비천하다고.. 전혀 낙심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성경의 여러 정황을 참고해 볼 때,

-또한 예수님은 시장경제논리에 휘둘리지 않으신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사도요한이 사도행전에서 조용하다가, 계시록에서 두각을 나타낸 점을 볼 때,


하나님은 누구든지 차별 없이 들어 쓰신다는 점이다.

내가 작다고 결코 스스로 낙심하고 주저앉아 있으면 안 된다.

‘시장경제논리’에 나 스스로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크고/작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이 부르신 곳에 순종하며 머물러 있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예,

모세가 막대기 하나만 의지해서 출애굽 역사를 이룬 예 등

이런 예는 성경에 얼마든지 들 수 있다.

하나님은 ‘미련한 자’를 통해서, 당신의 역사를 나타내기를 좋아하신다. 고전1:27


▲참고로, 생수의 강과 반대되는 ‘사탄의 강’


계12:15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


성경에는 주로 ‘생수의 강’이 나오는데,

여기에 보니까, ‘사탄의 토하는 강물’이 나온다.

이 강물은 여자(교회)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한다.


12:16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지만

여러분, 우리가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가 ‘생수의 강’에 온 몸을 잠그고 떠내려가야 하는데,

자칫 잘못하면, ‘사탄의 강’에 떠내려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맘몬의 신,

또는 일부 경제계를 통해 역사하는 음녀(계17장)라고 본다.              *경제계 전체가 그렇다는 뜻은 아님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세상 논리에 교회가 다 떠내려가고 말 것이다!

 

 


◑관련글  


복음서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들은 터무니없이 단정적입니다.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율법을 모르는 것이 그리 저주받을 만한 것인가요?

하나님을 모르는 것,

메시아를 몰라보는 것이 더 문제지!


더 터무니없는 단정도 합니다.

“갈릴리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메시아가 어느 지역에 매일 수 있는가요?

메시아가 어느 국가에 매일 수 있는가요?

메시아가 어느 교리에 매일 수 있는가요?

메시아가 율법 몇 구절에 매일 수 있는가요?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요?


그러니

지역에 매인 사람은 메시아를 알 수 없고

교리에 매인 사람은 메시아를 알 수 없고

율법에 매인 사람은 메시아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역주의에서 해방된 사람만이

교조주의에서 해방된 사람만이

율법주의에서 해방된 사람만이

메시아를 만날 수 있습니다.


(몇 해 전에) 저는 어색하고 편치 않은 시간을 보냈던 적이 있습니다.

세계야구대회 때문이었지요.

애초부터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 했고

어디가 이기건 개의치 않으려고 했고

우리가 져도 정말 기분 나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실패했습니다.

그놈의 애국심 때문이었습니다.


야구 중계를 보지는 않았지만

오가며 보이는 것에

형제들이 하는 소리에 귀가 기울여지고

계속 이기니 솔직히 기분이 좋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결승에서 지니,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언제 모든 경계를 넘고 구별을 벗어나

무경계이시고 모든 것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는지요!  (펀 글)       <선>                        ▣ 리더쉽, 목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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