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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00:1~5 기쁨의 기적

LNCK 2010. 3. 9. 10:08


◈기쁨의 기적                시편 100:1~5              출처

시편 100편의 핵심 메시지는 하나님께 예배할 때 
우리가 환호성을 지르며 기쁨의 찬송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입니다. 

1~2절 (새번역) 온 땅아, 주님께 환호성을 올려라.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고, 환호성을 올리면서, 그 앞으로 나아가거라.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아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복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어떻게 드리라고 말씀 하시냐면,  
'환호성을 지르며 기쁨의 찬송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 

그런데 우리가 주일예배 드리러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께 환호성을 지르고, 기쁨의 찬송으로 하나님께 나아오기보다는 

한 주간 동안 살면서 이런저런 일들로 마음이 찢기고 너무나 지치고 
낙심이 되고 고통스러운 가운데 '그래도 주일예배는 빠지지 말고 드려야지' 
이런 마음으로 교회 나와서 예배드리는 때가 상당히 많습니다. 

마음으로 환호성을 지르고, 기쁨의 찬송이 없는 상태에서 
습관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건 굉장히 심각한 문제지요.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게 얼마나 심각합니까! 

▲여러분 사춘기 된 자녀들 안아 보셨습니까?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면 변합니다. 말도 없어지고, 표정도 없어지고, 만사가 다 귀찮고 
대답도 항상 단답 입니다. '예, 아니요, 몰라요!' 
항상 뭔가 불만이 있는 듯한 그런 표정으로 바뀝니다. 
그런 사춘기의 자녀를 한번 안아 보신 분들은, 진짜 전봇대 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예배를 드리는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마치 사춘기 자녀를 대하는 마음과 비슷하다는 심정이 듭니다. 

스티브 브라운 교수님이 쓴 책 속에서, 어느 엄마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가 아들 둘을 기르는데, 첫째 아이는 사춘기가 되었고
둘째는 늦둥이라 아직도 어린데 

자기가 직장 갔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까, 둘째가 얼마나 진흙탕에서 놀았는지 
온 옷이 다 흙범벅이 되고, 얼굴도 손도 완전히 흙투성이가 된 채 
하여튼 너무나 재밌게 놀다가.. 퇴근해 오늘 엄마를 보고는 너무 좋아서 

'엄마~' 그러고는 달려오는데 
도대체 이 아이를 어떻게 받아줘야 될지 난감하더랍니다. 

그런데 그렇게 엄마가 좋다고 달려오는 아이를 어떻게 외면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흙투성이가 된 아이를 끌어 안았대요. 

그러면서 마음에 든 생각은

'뻣뻣한 아들을 안는 것보다, 더러운 아들을 안는 것이 훨씬 나아요, 훨씬 쉬워요!' 
그런 얘기를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깐 둘째는 정말 개구쟁이고, 그래서 항상 옷을 더럽히는 아닌데 
그래도 그 아이를 안아주는 게 훨씬 낫다는 겁니다. 

큰 아이는 사춘기라서 뻣뻣해져서 불만투성이고, 그리고 아무 감정도 없고 
이런 큰 아들은 도무지 품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저는 어릴 때부터 정말 예배를 잘 드렸어요. 한 번도 주일 예배를 빠진 적이 없어요. 
저는 그게 예배 잘 드리는 건 줄 알았어요. 
저는 어릴 때 예배 잘 들었다고 (개근)상도 많이 받았어요. 

당시 저는 정말 예배를 잘 드렸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면서 
제가 그 동안 드렸던 예배가, '마치 사춘기 자녀들이 부모를 대하는 것 같은 그런 예배 였구나..'

'정말 환호성과 기쁨의 찬송으로 내가 한번 예배를 드려 본 적이 있었는가?' 

그때 깨달았어요.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하시는 거 같아요. 
'너는 왜 내 앞에 오면 그렇게 화를 내는 거냐?' 
오늘도 그런 표정으로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분이 있으세요. 

하나님 앞에 나오기는 했어요. 
'근데 왜 너는 나한테 올 때는 그렇게 화를 내니? 
너 지난번에 외식 하며 즐겁게 식사하던 얼굴을 내가 다 안다. 
너 테레비전 볼 때 네 표정을 내가 다 안다. 
근데 너는 어떻게 나한테만 오면 어떻게 그렇게 얼굴이 험악해지냐?'
우리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어요. 

▲예배를 드리는데 환호성을 지르고, 기쁨의 찬송으로 예배를 드리라는 말은 
그걸 조금 더 우리가 실감 나게 표현하자면, 춤을 추라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자'는 말은, '우리 하나님께 춤을 추자' 이런 뜻과 같아요. 
오늘 여러분이 예배 드리러 교회 오실 때, 
'오늘 하나님 앞에 가서, 내가 춤추러 가야지!' 이런 마음으로 오셨습니까?

만약 그런 마음으로 오셨으면, 벌써 찬양할 때부터 다릅니다. 
아까 우리가 찬양할 때 얼마나 춤추기 좋아요? 
앞으로 우리가 예배 드릴 때마다 표현을 조금 바꿉시다; '우리 춤추러 갑시다!' 

다윗은 정말 동의할 거예요; '맞아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춤을 추는 거예요!' 

우리가 진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요? 
마치 이렇게 춤을 추는 것 같은 느낌! 그러면 그게 진짜 예배예요.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매번 춤추며 예배를 드릴 수 있냐는 겁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놓지 않는데.. 

지치게 하고, 힘들게 하고, 짜증 나게 하고, 화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이런 세상 속에 사는 데, 어떻게 우리가 예배 드릴 때마다 환호성을 지르고 
기쁨의 찬송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느냐 말입니다.

그러므로 "기쁨이 기적"이 일어난 사람만 이런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거예요. 
'기쁨의 기적'이 마음에 일어난 사람! 

그럼 '기쁨의 기적'이 어떻게 일어납니까? 
하나님을 알게 될 때 옵니다. 

환경이 달라지고 일이 잘 되어서 하나님이 오시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을 알게 될 때 오시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 기자가 3절에 '하나님을 알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3절 '너희는 주님이 하나님이심을 알아라. 
그가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의 것이요, 그의 백성이요, 그가 기르시는 양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고, 나는 하나님의 양이다.. 

이 사실을 그냥 들은 게 아니고,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는 게 아니고 
그게 정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남으로써, 내가 눈을 떴어요. 
그러면 그 속에서 기쁨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내 처지와 형편과 아무 상관 없어요. 
내 속에서 기쁨의 기적이 일어나요. 

▲저에게 얼마 전에 어느 분이 메일을 보내셨는데 
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심한 우울증을 겪고 계신 여자 성도님이었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원망했습니다. 
제가 왜 장애인으로 태어났는지 주님을 원망했습니다. 
제 가정형편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저의 존재를 판단했습니다. 
저는 세상을 장애와, 비장애 라는 기준 하나로 나눴고, 
그것으로 하나님이 사랑하신다, 안 하신다.. 제 스스로 판단하였습니다. 

저는 화목하고 건강한 가족 안에 태어난 사람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증거라고 믿었었습니다. 

저는 정말 궁금했습니다.  
'하나님 제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하나님 정말 나의 창조주 맞습니까? 
내 삶의 주관자가 맞습니까?' 하고 저는 주님께 막 따졌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게 맞습니까? 왜 나를 만드셨나요?' 
그는 그렇게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저주하고, 세상을 저주 하다가 
우연히 제 설교 중에 
'눈으로 보는 현실과, 믿음으로 보는 진실'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듣다가, 
자기 눈(영안)이 띄었다는 거예요. 

자기가 원망하던 그 많은 문제들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닫게 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이 없으셔서, 이 세상에 차별과 고통, 전쟁과 굶주림, 
미움과 살인이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제 장애가 하나님 앞으로 나를 데려갔고, 하나님의 사랑을 부정하게 만든 그 고통과 상처가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도록.. 나를 이끌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주님 지금 저는 당신께 감사합니다. 이제 큰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제는 주님이 내게 허락하신 그 장애로 인해 감사드립니다.
온전하신 당신의 사랑을 깨닫게 해 주신 그 고통의 멍에를 감사드립니다. 
나에게 상처와 고통이 복이 되었고, 나에게 죽음이.. 소망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메일을 통해서, 그분이 겪는 일, 경험한 일을 다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알았어요. 
'그분 속에 기쁨의 기적이 일어났구나!'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뛰면서 
우울증에 걸릴 수 밖에 없던 자기 형편 속에서 
그분 속이 기쁨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사모님 너무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가서 진료를 해도 병명도 분명치 않고 
몸은 자꾸 또 아파서, 그 병으로 고생하는 세월이 길어지면서.. 그 사모님이 절망을 했습니다.

한 번은 자기가 젊은 사모인데, 자기가 도무지 더 살지 못 할 것 같아서 
가족들에게 유언도 했습니다. 
'하나님 왜 나에게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질병을 주십니까? 
왜 빨리 고쳐 주시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그는 성경 말씀 한 구절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 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이 병든 몸 안에 성령님이 와 계신다고?' 
사실이었습니다. 자기 몸은 몹시 병들었지만, 성령님은 자기 안에 계셨거든요.

이걸 깨닫고 난 다음에, 그 사모님은 찬양이 터져 나오더래요. 
그리고 깨달았어요. 몸이 고쳐져야만 찬양하는 게 아니라 것을!

몸이 아프고, 여전히 아프고, 더 아파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찬양할 때, 하나님이 너무나 기뻐하신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 후로 그 사모님은, 몸이 아파도 더 아파도, 그럴수록 더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께서 그 사모님에게 역사하기 시작했어요. 
그 사모님의 병든 몸을 터치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정 분위기가 달라져 버렸어요. 
남편 목사님과 아들이 기쁨을 회복했어요. 

사실 집안에 오래 병으로 고생하는 가족이 한 사람만 있어도 집안 분위기가 우울 하잖아요. 
그런데 그 사모님이 그렇게 찬송을 많이 하니까, 
목사님도, 아들도 너무나 기쁨이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식사할 때, 식사 기도가 끝나고 나면 돌아가면서 그 사모님을 향하여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음을 받을지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깨끗함을 받을지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생기야 불어와라!'  이렇게 가족들이 선포해 주었습니다.

한 번은 아들 친구가 와서 밥을 먹어야 되는데 
가족들은 늘 하던 것처럼, 식사 기도 하고 돌아가면서 그렇게 사모님에게 선포를 하니 
이 친구아이도 자기 차례가 오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깨끗이 나음을 받으세요!' 
이렇게 소리를 치더래요. 

한번은 아들에게 물었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몸이 아프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되지?' 
그랬더니 그 아들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간단하게 이렇게 대답했어요.
'하나님을 믿고 크게 기도하고, 그리고 막 큰 소리로 찬송하는 거지요!' 

엄마는 그 말을 듣고 그 어린 아이가, 자기 몸이 아프니 큰 질병을 보면서 
'믿음 하나는 너무나 분명하게 가졌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고 너무 감사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아는 눈이 뜨이면, 우리 속에 기쁨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고 나의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시고, 내 아버지가 되신다니... 
이게 진짜 믿어지는 성도는, 특징이 있습니다. 얼굴이 밝은 거예요! 

미국 서부 시대에 금광을 찾아서, 사람들이 서부로 서부로 몰려갈 때 
몇 몇 분이 금광을 발견했어요. 너무 기뻤어요. 
이제 채굴을 해야 되니까, 채굴 장비를 마련해서 다시 모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약속을 했어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맙시다. 우리끼리만 이 금광에서 채굴합시다!' 다들 동의 했어요. 

그리고 헤어졌습니다. 약속한 날 다시 모였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였어요. 
사람들은 화가 났습니다. '누가 도대체 금을 발견했다고 발설한 거야? 비밀 지키기로 했잖아!' 
그런데 아무도 발설한 사람이 없었어요. 근데 어디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려온 걸까요?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여기로 왔습니까? 여기 금광이 발견된 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가 말했습니다. '여러분의 얼굴 보면 알지요. 얼굴만 보면, 아무 말 안해도 다 알지요!'
아무 말 안 해도, 자기들의 얼굴에 금광을 발견한 표시가 확 났던 거예요. 
그래서 그냥 그들을 따라온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 신자들의 얼굴을 보면 알지요! 

여러분 하나님과 금광을 비교가 됩니까? 
우리는 금광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을 만났어요. 하나님을 알아요. 
우리의 얼굴 표정을 어떻게 숨길 수 있겠어요? 

지금 하나님 앞에 환호성을 지르고, 기쁨의 찬송으로 예배하라고 하는 말씀은 그 말씀이에요! 

◑4절, '감사의 노래를 드리며, 그 성문으로 들어가거라. 
찬양의 노래를 부르며, 그 뜰 안으로 들어가거라. 감사의 노래를 드리며, 그 이름을 찬양하여라'

하나님을 아는 성도는 당연히 그렇게 하게 됩니다. 이게 기적 중의 기적이죠. 
기쁨의 기적 말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다 누릴 수 있는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이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이 기쁨의 기적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기쁨의 기적은,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고, 새벽 기도에 나와야 되고 
제자훈련 받아야 되고, 단기 선교도 한 번은 가야 되고.. 
영성훈련도 해야 되고, 영성일기도 꼭 써야 되고..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기쁨의 기적은 전혀 경험하지 못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주일 예배 드려야 되고, 그리고 새벽기도 나와야 되고, 큐티도 해야 되고, 
영성일기도 쓰고, 제자훈련도 받고, 단기선교도 가고 다 중요합니다.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놓친 채로, 예배만 열심히 드리고, 새벽기도 나오고 
제자 훈련 받고, 봉사하고, 단기선교 가는 사람들도 있어요. 

예수님이 초점이신데, 정작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면 
그것들은 우리에게 종교적인 무거운 굴레가 될 수도 있어요. 
우리에게 기쁨의 기적을 일으키는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환호성을 지르며, 하나님께 나와 기쁨의 찬송을 부르라고 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이 그렇게 기쁘시게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그렇게 기쁘시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을 향하여, 그렇게 기쁨으로 나와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을 바라보면 기쁘시죠?
말 안 들을 때도 있고, 속 썩일 때도 있지만, 그래도 자녀를 보는 부모의 마음에는 기쁨이에요.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인물이 잘나서 그렇습니까? 공부를 잘해서 그렇습니까? 
뭘 여러분에게 잘 해줘서 그렇습니까? 

조건이 없어요. 내가 낳은 아이라는 그것 하나!
그냥 존재 자체가 나의 기쁨이에요, 우리의 자녀들은! 

하나님도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기뻐할 이유가 뭐 있겠습니까? 
조건을 따지면 정말 이유가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낳았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고, 우리는 구원 하셨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어요. 

그걸 계속 말씀하고 말씀하고 계세요. 그걸 믿으라는 겁니다.
스바냐 3장 17절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기쁨이 넘치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을 기뻐하는 겁니다. 

시편 37편 4절에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 2부를 보면, 크리스천의 아내 크리스티나가 
자비 라는 한 자매와 함께 천국까지 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참 쉽지 않은 고비들을 넘어가는데, 어느 날 자비 양이 잠을 자는 모습을 크리스티나가 보는데 

너무나 환하게 웃는 겁니다. 무슨 꿈을 꾸는 것 같은데, 
이 어려운 순례길에서 어떻게 저렇게 웃을 수 있을까? 
그래서 자비가 잠을 깨고 난 다음에 물어봤어요. 왜 그렇게 자면서 웃었냐고? 

그랬더니 자비 양은, 자기가 꿈 꾼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자기가 너무나 남루하고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건 자기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너무 더러워, 내 마음은 너무 더러워.. 이거 어떡하지?' 
그러면서 그게 너무 안타까워서 울고 있는데, 한 천사가 다가오더래요. 

천사가 '너는 왜 그렇게 우느냐?' 
꿈에서 자비는 '제가 너무 더러워서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천사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선언해 주면서
손수건으로 자비의 눈물을 닦아 주더니 
금과 은으로 만든 옷을 입혀주고, 아름다운 면류관을 씌워 주고, 목걸이를 해 주고 
그리고는 손을 잡고 자기를 따라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천사를 따라서 가는데, 황금 문이 나타났습니다. 
너무나 아름답고 거대한 문이지만, 문이 굳게 닫혀 있었어요. 

그랬더니 그 천사가, 문을 지키는 천사에게 가서 뭐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그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그 안에는 햇빛보다 더 강렬한 빛으로 충만한 세계가 열렸어요. 

그 길을 따라 가는데, 큰 보좌 앞으로 향하여 길이 나 있더랍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이 자기에게 말하기를 '내 딸아 환영한다. 잘 왔다!' 

'그 말씀을 듣는데.. 제가 어떻게 안 웃을 수가 있어요? 
그 순간에 내가 어떻게 안 웃을 수 있어요?' 

여러분 이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주님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 속에 기쁨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항상 기뻐하라!' 이것은 결코 부담스러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뻐하도록 노력하라는 게 아닙니다.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면, 기쁨의 근원인 그 예수님을 내가 계속 바라보고 살면
내 속에 항상 기뻐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제 삶을 가만히 돌아보면, 쉽지 않은 고비를 지난 적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제가 군목 훈련을 마치지 못하고 
다리를 다쳐서 집으로 퇴교(장교임관 교육)해서 돌아왔을 때 
목사니까, 어느 교회 든지 가서 교회사역을 해야 되잖아요. 

그래야 교회에서 생활비도 주고, 그래서 저도 가정을 부양하며 살 수 있잖아요. 
제가 목발을 짚고 한 달도 넘게 '내가 어느 교회 가서 섬길 수 있을까?'하며 교회를 찾아 다녔습니다. 

어디도 저를 받아 주는 데가 없었습니다.
그렇겠지요, 목발 짚고, 군 문제도 해결 안 된 저를 부목사로 받아줄 교회가 어디 있겠어요? 

한 달쯤 지나고 나서 현실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갈 교회가 없다!' 
그건 저에게 너무나 큰 좌절이었고, 버림받은 느낌이었어요. 

그때 오기 같은 생각이 생겼어요. 
'하나님이 진짜 나를 목사로 부르셨다면, 어디 가서 일 하는 것도 하나님이 정해 주셨을 것 아닌가!
내가 왜 이렇게 사람들을 찾아다녀야 되냐? 
하나님이 나에게 연락 주시겠지!
 
앞으로 나는 전화기만 쳐다보고 있을 거야. 
하나님, 전화가 오게 해 주세요. 어느 교회로 가라고 전화가 오게 해 주세요!
그리고는 저는 기도만 하면서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참 어떻게 보면 무모하고 고집스러운 결단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아침밥을 먹고나서는 아버님 서재에, 
점심 먹고서도 아버님 서재에 올라가서, 
저녁 먹고서도 아버님 서재에 올라가서 기도만 했습니다. 3개월을 내내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가 만약에 전화기만 바라보고 3개월을 기다리고 있었다면
아마 저는 미쳤거나.. 기다림에 지쳐서 금방 뛰쳐나왔을 것입니다.
안 그러면 또 목발 짚고 돌아다니면서 '나 좀 써 주세요, 나 좀 써 주세요!' 그렇게 하고 돌아다녔을 거예요. 
아마 믿음을 다 잃어버렸을지도 몰라요. 

그때 제가 어떻게 3개월을 견딜 수 있었을까요? 
3개월이라고 기간이 정해진 것도 아니었어요. 
하루하루 지나다 보니까 3개월이 된 것입니다.

제가 전화기 앞에서 하루 기다려 보니까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미치겠더라고요. 
3개월을 버틴 것은, 성경을 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응답을 주실 때까지 3개월 동안 내내 기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성경을 보자!' 
그러면서 창세기부터 기도에 관련한 하나님의 말씀을 다 받아쓰기 시작했어요. 

그때 깜짝 놀랐어요. '아니 세상에 이런 말씀 있었어? 내가 목사인데 이걸 몰랐구나!' 
은혜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을 알게 됐어요. 
그리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 것을, 알게 되었어요.

아무도 모르는 그 골방에 들어가 있는 저를, 하나님은 알고 계시고 
저와 함께 계시고 
계속 말씀으로 은혜를 주시고 저를 깨우쳐 주시는 것을 알았어요. 

그때 정리된 것들이 기초가 되어서 <예수님의 사람>이란 제자훈련 교제가 만들어진 거에요.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어요.
마음이 조급하기 보다는, 언젠가는 분명히 하나님이 나에게 어느 교회로 가라고 말씀하실 텐데 
그 전까지는 내가 말씀연구 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더 할 수 있어야 될 터인데,

나중에는 임지가 생기는 것보다, 말씀에서 은혜 받는 것을 놓칠까 봐 안타깝더라고요. 

하나님을 아는 눈이 뜨이기 시작하니까 
은혜를 받는 눈이 열리기 시작하니까 
힘들고 어려운 것들이 다 달리 해석되더라고요.

그리고 3개월 뒤에 정말 거짓말같이 전화기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리고 제가 부목사로 가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제 가슴 속에는 정말 충만했어요. 어떤 고생도 고생이 아니었어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환호성을 지르라. 기쁜 탄성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말씀하시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기쁨의 근원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세상의 기쁨을 구걸하고 사니까 그렇습니다.

가족들에게 나를 기쁘게 해 달라.. 
직장에서 나를 좀 기쁘게 해 달라..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보면서 나를 좀 기쁘게 해 달라.. 
이런 꼴로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나의 기쁨의 근원이시고 
나는, 내 가족과 이웃에 기쁨의 근원이에요. 

요한복음 7장 38절에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아멘입니다! 

우리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와서,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기가 돌도록 만드는 존재가..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 안의 기쁨의 근원이신 주님을 붙잡을 때, 우리 속에서 생수가 터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게 희미하게 보이던 예수님이
어느날 이제는 내게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해요. 
그러면 인생은 완전히 달라지는 겁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에게,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면서, 

여러분 속에 기쁨이 기적이 일어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