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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나리라 2362

LNCK 2010. 3. 19. 13:29

◈흘러나리라                          요7:37                             08.08.09.설교녹취/편집



▲7: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보통 앉아서 가르치셨는데,

서서 더군다나 외치시면서 가르치신 적은 아주 희소하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인데, 그 내용은 바로 이것이다. 성령에 관한 말씀인데..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7:37b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flow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7:38~39



두 갈래의 강


▲1. 자기에게로 모이게 하는 강

세상 사람들의 특징은..

모든 좋은 것은, 자기에게로 모이게 한다.


마치 사해 바다와 같이.. 끊임없이 자기에게로 모이게 하며

절대 겸허한 마음으로.. 자기 것을 바깥으로 흘려보내지는 않는다.


우리가 성령을 구하되, 이렇게 잘못 구할 수 있다.

성령님은 ‘흘러나가는 강’ 같은데,

우리는 그것을 자기 속에 ‘모아두려고’ 한다. (무슨 ‘복’같은 개념으로)

그러니까 성령의 역사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할 수도 있다. 


    솔로몬은 세상의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흐르지만, 그 바다를 채우지 못한다고 했다.

    인간의 세상 욕망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 여전히 갈증의 연속이다. 전1:7

    가지면 가질수록, ‘조금만 더’ 갖고 싶다.

    그래서 그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결국 ‘자기’를 채우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자기’가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쾌락을, 물질을, 권력을, 부귀영화를.. 아무리 가져도.. 자기는 여전히 목마르다.

(비슷하게 예레미야는, ‘물을 저축하치 못하는 터진 웅덩이’에 대해 말했다. 렘2:13)


    여러분, 부부지간에도 마찬가지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배우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기대해서도 안 되고, 그렇게 채워주려고 시도하더라도.. 헛될 뿐이다.


    인간에게는 ‘영’의 영역이 있는데,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 채워주실 수 있다.

    그런데 ‘영’의 영역이 채워진 사람에게는..

    ‘육’이나 ‘자아, 감정’같은 다른 영역에도.. 그 만족감이 흘러넘친다는 것이다.

    (단, ‘육’이나 ‘감정’적 필요가 다 쓸데없다는 뜻은 아님)

   

▲2. 생수의 강은 흘러 나가는 강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flow 하시니  요7:38


생수의 강의 한 가지 특징은 ‘흘러가는 것’, ‘흘러넘치는 것’이다.

‘생수의 강’은

반드시 자기에게서 먼저 흘러 넘쳐서.. 다른 사람에게 이르게 한다.

자기 가정에 흘러넘치게 한다.

자기가 속한 직장과 사회에 흘러넘치게 한다.


    여러분, 당신은 생수의 강을 흘려보내고 있으신가?

    그렇다면 당신은 성령충만한 사람이다.

    생수의 강을 흘려보내지 못하는 분은.. 흘려보낼만한 것이 아직 없거나/고갈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충만을 받은 사람은.. 절대 가만히 있지 않는다.

    자기가 받은 은혜를 반드시 흘려보내는데...

    교회 봉사를 통해서.. 흘려보내는가 하면,  

    젊은이들은, 인터넷을 통해, 설교동영상이나 음성파일을 퍼 나르기도 한다.

    그게 ‘생수의 강’의 특징이다.    


▲흐를수록 커지는 강

강물은, 흐르면 흐를수록 커진다.

에스겔서에 나오는 강도,

처음 1천척은.. 물이 발목까지 차고,

다음 1천척은.. 무릎까지 차고,

다음 1천척은.. 허리까지 차고,

마지막 1천척은.. 헤엄쳐야할 정도로, 강물이 깊어 졌다. 사람의 키보다 더 깊어졌다.  겔47:3~6


그러니까 생수의 강을 계속 흘려보내어야 한다는 뜻이다.

1천척만 흘려보낼 수도 있고, 4천척 이상 계속 흘려보낼 수도 있다.

생수의 강은.. 계속 흐를수록 더 커지는 강이다.

왜냐하면 그 속에 ‘생명의 역사’가 겨자씨와 같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비슷한 예로, ‘생명의 떡’도 마찬가지다.

    5천명이 먹고 12바구니를 거둔 것도

    계속 떡을 나누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5백 명만 떡을 나누었다면.. 5백 명만 먹고 끝낼 수 있었다.

    1천명만 떡을 떼었다면.. 1천명만 먹고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못 먹는 사람이 없도록.. 계속 잡아서 떼고, 계속 나누니까

    결국은 모든 사람이 다 배불리 먹고 12바구니가 풍성하게 남았다.

    생명의 역사는.. 나누면 나눌수록.. (더 작아지지 않고) 더 커진다.


‘생수의 강’도 흘려보내면 보낼수록.. 더 깊어진다.

어떤 사람은 1천척 정도까지만 흘려 보낼수 있고,

어떤 사람은 4천척 이상.. 사람이 빠져서 헤엄칠 정도로 창일한 강물로 흘려보내는 것은

나누면 나눌수록 (도리어 반대로) 커지는 생명의 역사 때문이다.

 

    만약에 여러분이 생명의 떡/생명의 강물을 흘려보내면

    보내면 보낼수록..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더 커진다.

    나중에 하나님은,

    당신을 ‘생수의 강을 흘려보내는 통로’로 사용하실 것이다.


    이 생수의 강은, 바다로까지 흘러나가서

    ‘물이 바다 넘침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가득하도록’ 작정되어있다.


    ※관련글 : 808 샘물이 강물되고, 바닷물 되는 비전



우물가의 여인에게 흘러넘친 ‘생수의 강’

이 여인은, 예수님을 통해 ‘생명의 물’을 얻게 된다.


4: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사마리아 여인은 이 샘물을 맛보았다. 이내 그는 그 물을 흘려보내게 되는데..

그래서 여인은, 즉시로 동네에 들어가 전도한다.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사막에 강이 넘쳐서 흐르리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사43:19

  

여러분, 제대로 된 나무 한 그루 찾기 힘든

유대 광야에서

샘이 넘쳐서 흐른다는 것은 .. 정말 놀라운 기적이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물 한 줄기 없고, 있다면 아침 이슬뿐인) 광야에서 강물을 흘려 내리라!’  사43:19


    여러분, 혹시 요즘 광야와 같이 메마른 삶을 살고 있지 않으신가?

    우리 공동체나, 우리가 사는 사회가.. 정말 광야와 같이 황량하지 않는가?


    그러나 주님을 기대하시기 바란다.

    주님은 광야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흐르게 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마21:21~22


‘사막에 강이 넘쳐흐르리라’는 비전을 갖고서,

‘산을 옮기는 믿음’ 으로 기도하면..

그대로 된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마21:21절을, 개인적/기복적으로

자기 사업적 기적을 구하니까.. 저 말씀이 황당하게 여겨지고, 하나님이 응답 안 해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환상을 품고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산을 명하여 바다로 옮기듯이’,

물이라곤 씨가 마른 광야에 강물이 흐르고’

‘샘물이 강물 되고, 강물이 바닷물 되는..’ 놀라운 역사가 현실로 나타난다.


물이 계속 흐르기만 하면 된다.

1천척, 2천척.. 계속 흐르면.. 반드시 소성되게 되어 있다.


▲루저loser를 찾아가신 이유

사마리아 성에, 수많은 훌륭한 사람을 다 놔두고,

예수님이 하필이면, 남편을 5~6명을 둔 전력이 있는(이유야 어쨌든지)

루저loser를 찾아가신 이유는


그가 그만큼 마음이 겸손하고,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렇기도 하거니와

혹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루저를 찾아가신 것은.. 사실은 모든 사람을 찾아가신 것이라고..

예를 들면, 무슨 입장료가 30만원이면.. 부자들만 갈 수 있지만

입장료가 1천원이면.. 모든 사람이 갈 수 있듯이


예수님이 루저(우물가의 여인)를 찾아가신 것은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다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신기한 것은, 생수의 강이 사마리아 성에 흘러넘치는데

하필이면 이런 가장 비천한 여인이 쓰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빈부귀천에 관계 없이, 모든 사람이..

생수의 강을 흘려보내는데, 다 쓰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세상적으로 꼭 유력해야 된다는 조건은.. 필요 없다. 

 

*관련글 : 부흥이 일어나는 원리 (샴페인 잔 탑 쌓기)

 

 

.................................관련글 (펀 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손에서 해방시키시고 40년 동안의 광야길을 거쳐

구원해 주신 것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초막절 축제'는 8일 동안 지속됩니다.

37절에 보니 "명절의 가장 중요한 날인 마지막 날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말씀은 8일째 되는 날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 날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이 말씀의 의미를 다 알기 위해서는

초막절에 순례자들이 행하던 일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초막절이 시작되면, 매일 아침,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실로암이라는 이름을 가진 저수조에서 물을 떠다가 하나님 앞에 붓습니다.


이 의식의 의미가 분명하게 전승되지는 않아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있어 물처럼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런데 축제의 마지막 날에는 이 의식을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규정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7일 동안 반복되던 '물 붓는 제사'가 마지막 날에는 생략됩니다.


바로 이 때 예수님은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절묘한 타이밍입니다.


순례객들이 제사에 참여하고 나서,

"왜 마지막 날에는 물제사를 드리지 않을까?"하고 궁금해 할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여러분, 지금 물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제게 그 물이 있습니다. 제게로 와서 그 물을 마시십시오.

실로암에서 온 물로는 여러분의 참된 갈증을 해갈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계속하여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는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실로암 연못을 비유한 것입니다.

실로암 연못은 예루살렘 성전 밖에 있던 기혼 샘으로부터 물길을 만들어

성전 안으로 물을 끌어 들여 만든 연못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언제나 신선한 물이 흘러넘쳤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사람은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을 때, 필경 이 실로암 연못을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성전 밖에 있는 기혼샘과 성전 안에 있는 실로암 연못이 수로를 통해 연결되자,

성전 안에는 늘 물이 넘쳐흘렀습니다.

물을 뜨러 성전 밖에 있는 기혼샘으로 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내가 지속적인 사귐을 통해 연결되면,

그분에게 있는 성령의 물이 내게로 흘러 들어옵니다.

그 물이 언제나 내 안에 넘쳐흐릅니다.                                                                                                     ▣ 성령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