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0

일상의 신앙

LNCK 2010. 4. 2. 20:56

 

 

◈일상의 신앙                       모두 스크랩 글 

 

 

 

◑우리가 우러러봐야 할 것들

 

심리학에서 forbia(공포증)를 치료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저처럼 snake forbia(뱀 공포증)이 있으면

뱀을 피하지 말고 바라보아야

차츰 뱀에 대한 공포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싫은 것,

그래서 꼴보기 싫은 것,

볼까 두려울 정도로 피하고 싫은 것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외면하지 않고, 직면하는 것이요

피하지 말고, 보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불뱀에 물린 자들에게

놋뱀을 매달아서 보라고 하신 것도

아마 이런 의도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 피하고 싶은 뱀을, 외면하지 말고 바라보라는 뜻도 되지 않을까요?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것,

그래서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그것은 죽음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고

가장 직면하기 싫은 죽음을 극복하는 법은

죽음을 매일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기를 죽게 한 불뱀

높인 달린 불뱀을 쳐다보아야 사는 것처럼

죽음의 공포가 올 때,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죽음을 극복하고 살게 됩니다.

 

그 불뱀은 높이 달렸고

주님도 십자가에 높이 달렸습니다.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러러 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싫어하는 고통,

우리가 너무나 싫어하는 죽음은

누구도 피하지 못하고 다 봐야 하는 것이고,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러러 봐야하는 것이랍니다.  

 

 

◑수용적 사랑

 

저의 큰 약점 중에 하나가, 사랑을 잘 받아들일 줄 모르는 것입니다.

‘가난’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누가 선물을 주면, 고맙게 받지 못하고 부담스러워 합니다.

 

하여 선물을 주신 분을 실망시켜드리고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지 않습니다.

이에 비해 저와 같이 사는 선배 형제는, 이 면에서 참으로 훌륭하고

그래서 그분이 부럽습니다.

 

그 분은 누구의 사랑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할 수 있게 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그 행복을 누리게 해줍니다.

 

사실 가장 큰 사랑은, 그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여주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사랑을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그의 사랑을 귀하게 여기고 고마워하는 것은

그로 하여금 사랑을 할 수 있게 하는 큰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사랑은 주는 것이라고만 생각하여

그저 줄려고만 하는데, 많은 경우 자기만족을 위한 것일 수 있습니다.

나는 받는 사람이 아니고 주는 사람이라는 자기만족감,

내가 사랑을 실천했다는 자기만족감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의 사랑을 그저 받아주십니다.

가룟 유다가 가난한 사람들을 들먹이며

마리아의 사랑을 깎아내리고 나무라지만

주님은 그 사랑을 값싼 것으로 만들지 않고

당신의 장례를 위한 선물이라고 귀하게 만드십니다.

 

다른 사람의 사랑을 값싼 것으로 만들지 않고 귀한 사랑으로 만드는

오, 고귀한 수동태의 사랑이여!

사랑하는 행복을 남들에게 선사하는

오, 고귀한 수용적 사랑이여!  

 

 

◑남 탓 안 하는 신앙

 

성경에 보면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결코 남 탓 안하는 신앙인’입니다.

사실 다윗은 밧세바 때문에 굉장히 고통당했지요?

야곱은 라헬 때문에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너 때문에 망했어.” 이렇게 탓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은 야곱을 쓰시고, 다윗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쓰셨는가요?

그 사람들은 일평생 통해서 라헬이나 밧세바를 원망하는 말을 절대로 안했습니다.

 

“내가 잘못했고 그도 내가 잘못 저지르게 만든 것이지 그들이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이것을 의롭게 보신 것 같습니다.

 

사도바울 선생은 자기를 배반한 사람들을 향해서 뭐라고 했습니까?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요나를 보세요.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줄 내가 아노라.

그러므로 나를 바다에 던져 죽이시고 다른 사람은 살려주소서.”

그런 의로움이 아마 그래도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 쓰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위기 때는 결국 가장 가까운 이웃마저도 밟아버리고 혼자만 살려는

에덴동산에서부터

인간의 비극은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주님 그게 누굽니까?

 

우리는 복음서 안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

베드로와 가룟 유다, 두 제자의 배반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스승을 배반한 두 제자는

당시 제자 공동체 안에서 나름대로 "한 자리", "한 가닥씩"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베드로는 수제자였습니다.

그로 인한 자부심도 대단했습니다. 위세가 등등했습니다.

 

유다 역시 제자 공동체 안에서 중요한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제자 공동체의 살림을 담당한 총무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가장 신뢰가 가는 인물, 인간성도 괜찮고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할 수 있는 인물로 생각했기에

총무(살림)를 맡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공동체 안에서 가장 중책을 맡은 공동체의 두 핵심 인물,

제자 중의 제자, A급 두 제자가 예수님을 배반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두 제자의 배반 사건을 바라보면서

특별히 교회 지도자들이 깊이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 가장 핵심 위치에서 교회를 인도하는 사람들입니다.

때로 그들은 교회 안에서 살며, 교회 가장 가까이에서 지내면서

교회를 위해서 가장 열심히 봉사하는 듯 보이지만,

많은 경우 예수님과 가장 먼 사람으로 전락할 위험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지속적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거듭 본질에로 회귀하지 않으면,

자신의 직책이 희생과 봉사, 섬김과 죽음의 자리임을 거듭 자각하지 않게 될 때

언제 베드로와 가룟 유다처럼 배반자가 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역할이 다른 무엇에 앞서서 십자가를 지는 자리이고,

끝까지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는 자리임을 망각하는 순간

그 지도자는 또 다른 배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예는 베드로의 배반 사건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쓴잔을 거부했기에,

베드로는 그 뒤로 입으로만 수제자였지, 몸은 배신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아들은 많은 고난을 겪고 죽을 것이다"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가 펄쩍 뛰면서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마16:22~23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표현입니다.

 

베드로는 입으로는 어떤 충성도 다 합니다. 그 어떤 맹세도 다짐도 다 합니다.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언제든지 예수님을 뿌리치고 도망갈 가능성,

예수님을 배신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남들이 봤을 때는 그럴듯한 신자, 잘나가는 목회자,

괜찮은 주의 종으로 보이고 인정받지만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에 우리의 시선이 멀어지는 그 순간                                    

언제고 주님으로부터 등 돌릴 가능성, 주님을 배반할 가능성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 이하 녹음 안 합니다 .................................

 

 

◑내가 아침마다 마당을 쓰는 이유

 

저의 필명인 당쇠는 마당쇠의 준말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맡은 배역이 흥부놀부전의 마당쇠였습니다.

저는 마당쇠 역에 불만이었지만

선생님이 시키시니 어쩔 수 없이 하였습니다.

 

이 역을 맡은 것이 어렸을 때는 불만스러웠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생각합니다.

야훼의 종으로 살라는 섭리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이런 저의 신원을 상기시키기 위해

제가 마당 쓰는 청소구역을 스스로 정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마당을 쓸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연극에서 제가 하는 대사는 딱 한 마디였습니다.

“예”입니다.

주인인 놀부가 부르면 “예”하고 달려가고

주인인 놀부가 시키면 “예”하고 실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종은 언제나 주님 곁에 머무는 자이고,

그러다 주인이 시키면 무엇이든 실행하는 자입니다. 

 

 

 

◑일상에 대한 진지한 접근

 

언젠가 인천교구 김병상 신부님께서 <기쁨과 사목>이란 소식지에 기고하셨던 글을

읽고 크게 깨달은 적이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사제로 서품되신 직후 한 원로 신부님을 찾아가셨답니다.

인사를 올린 후 ‘새 사제로서 어떻게 살면 좋겠습니까?’하고 조언을 부탁드렸습니다. 

 

한참 묵묵히 생각이 잠겨 계시던 신부님은 이런 조언을 해주셨답니다.

"자네가 가장 가까이 접하게 될 사람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도록 노력하게나.

언제나 자네 주변에서 가장 수고가 많은 식복사 자매님, 수녀님,

사무실 직원, 사목위원들을 먼저 챙기고

그들에게 정직한 모습, 성실한 사제의 삶을 보이도록 노력하게."

 

평범하고 소박한 한 마디 말씀이지만

생각을 거듭할수록 인생의 진리가 담겨있는 소중한 말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가끔씩 만나는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는 일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또한 먼발치에서 바라다보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란 쉬운 일입니다.

또 그들에게 "사랑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말하기는 너무도 간단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가장 가까이 살아가는 사람들,

배우자, 부모, 자녀, 직장동료, 친구, 이웃들을 지속적으로 사랑하고

그들로부터 인정을 받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실감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고백처럼

"일상에 대한 진지한 접근,

인생의 진리는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