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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부활 신앙 2380

LNCK 2010. 3. 31. 09:13

◈아브라함의 부활 신앙              롬4:1~25                    09년 인터넷설교스크랩, 축약

 

 

 

로마서4장 이해에 많은 도움을 줍니다. 또한 '믿음'이해에도 많은 도움을 줍니다.

1. (십자가 신앙과) 부활신앙은 믿음생활의 알맹이입니다. 그러므로 

2. 부활절에만 부활을 논하지 말고, 평소에도 부활을 묵상/찬양/신앙하며 살아야 한다는 논지입니다. 

 

 

◑롬4장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믿음은.. 부활의 믿음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롬4:17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

롬4:18절에 바울은 아브라함을 두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아브라함의 상황은 ‘바랄 수 없는 중’이라고 말합니다.

소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인데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는 거죠.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하나님의 그 약속대로,

하늘의 별과 같은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창세기를 읽어본 사람은, 이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인지 아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백 살이 거의 다 되었고, 사라는 90세가 거의 다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결혼하고 오랜 세월 동안 자식도 없이,

어떻게 보면 좌절감이 그냥 몸에 배어있을 수도 있고요.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찾아 오셨어요. 아브라함을 텐트에서 불러냈습니다.

‘아브라함아, 우리 산책 가자.’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산책을 나갑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다리가 아파서 바위에 걸터앉았습니다.

아브라함도 나이가 100살이니까요.


앉아서 보니 밤하늘의 별들이 총총히 많이 보였어요.

하나님도 그 별을 보시면서 ‘야, 참 아름답다.’

하나님이 또한 말씀 하시죠. ‘아브라함아 저거 한번 세어볼래?’


아브라함이 자기 속으로 핀잔을 줍니다.

‘미쳤어요? 저걸 어떻게 세요?’


그 순간에 하나님이 말씀하시죠. ‘네 후손이 그와 같으리라.’

그 약속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아멘’ 했다는 거죠.


19절에,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지금 상황은 죽음의 상황이죠.

적어도 자식 생산이라는 면에서는 끝난 인생입니다.


그런 죽음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들립니다.

‘네 후손이 이와 같으리라’ 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아멘’으로 응답했다는 얘기입니다. 


사실 약속을 의심하는 게, 자연스런 반응이었겠죠.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농담으로 여기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태도였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일은,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죠.


어쩌면 하나님이라도 그런 일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죽은 몸에서’ 어떻게 아이가 태어납니까?

요즘 말로, 자기 몸에서 정자가 안 나오고,

사라 몸에서 난자가 안 나오는데,

아무리 난리를 친다고 해도.. 무슨 일이 생기나요?

이제 사라가 배부를 일은 없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약속을 듣고서,

하나님은 약속을 하시는 분일뿐만 아니라

그 약속을 이루실 능력 또한 있다는 것을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그 부활의 믿음을.. 의로 여기심을 받음

롬4:21절에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다’라고

22절에,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을 때 그것을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은 죽은 몸을 살려서 아기를 주실 분이라는 것을 믿었던 그 믿음을

하나님은 의로 여겨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의롭게 했던 믿음이 바로 이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믿음을 보시고

‘네가 나를 알아보는구나. 너야 말로 나를 알아보는구나.’ 하시면서

아브라함을 의롭게 인정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둘의 죽은 몸을 살려서 임신하게 하실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은

그 믿음을 근거로 아브라함을 의롭게 해주신 거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를 믿는 (부활의) 믿음

    이것을 한마디로 말한 것이 오늘 읽은 로마서 4:17절 이하입니다.

17절 뒷부분에서 바울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짧은 구절이지만, 바울의 복음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요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 그 믿음의 핵심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것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는 거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불러내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야기죠.

 


▲아브라함 이야기를 기록한 목적은.. 우리에게 본을 보이기 위한 것

바울은 아브라함의 얘기를 하면서,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여기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또한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만을 위한 거라면 기록할 필요는 없죠.

아브라함만 믿고 의롭다 함을 받으면 끝나는 것이지 기록할 필요가 없잖아요.

우리를 위해서 우리가 읽으라고 기록을 해놓은 거예요.


롬4:24절에,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를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우리의 믿음=부활의 믿음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요? 하나님을 누구라고 믿어요?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이라고 믿고 있어요.

바로 여기에서 아브라함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 사이에 전기가 통합니다.

바로 부활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는 거죠.


자기와 사라의 죽은 몸을 살려내서 아들을 주실 거라는 그 능력을 믿었던 믿음과,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살리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하고는..

같은 믿음이죠. 그것이 부활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죠.

 

 

아브라함 믿음의 샘플을 떼고,

우리 믿음의 샘플을 떼서 그 샘플들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냈습니다.

‘DNA 검사 좀 해주세요. 아무래도 수상해요.’ 며칠 뒤에 연락이 왔습니다.

‘DNA가 일치합니다. 부자 관계가 맞습니다.’


무슨 DNA입니까? 부활 신앙이라는 DNA죠.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신앙 면에서

두 개가 똑 같은 거예요.

아브라함과 우리는 그 애비에 그 자식이다,

이 믿음이 바로 우리를 의롭게 하는 믿음이라고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된다는 것은, 바로 이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25절에,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히11장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믿음은.. 부활 신앙


 

히브리서를 보십시다. 아브라함 얘기가 한 번 더 나옵니다.

이번에는 시간이 조금 지났습니다. 또다시 더 큰 믿음의 위기가 찾아오지요.

이번에는 아예 시험이라는 단어가 본문에 등장합니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이삭을 죽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삭이 잘 커서 결혼해서 자식들 많이 낳으면 좋잖아요.

그러나 히브리서 11:17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이삭을 바친다는 것은 제사를 드린다. 하나님 앞에 드린다는 의미이겠지만,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이삭이 죽는 것이거든요.

여기서 제사를 드린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사실 제사 드린다는 말의 가장 기본은 ‘죽는다’ 라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고서,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 -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히11:17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11:19


(체념이나 마지 못해 드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다름 아닌 부활의 믿음이라는 논지)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조금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어요.

이삭이 죽으면 어떻게 돼요? 하나님이 엄청난 약속을 주셨잖아요.

이삭을 통해서 하늘의 별과 같은 자식이 생길 거라고 했는데,

이삭이 죽으면 그 약속이 말짱 도루묵이 되는 거거든요. 


아이는 죽으면 안 되거든요. 이 아이는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셨잖아요.

근데 아이가 죽으면 하나님의 약속이 지금 끝장나는 거니까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삭을 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다고 이야기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이런 상황에서 자연스러운 인간적인 상황을 생각해보면

믿음 대신에 체념을 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다는 했어요.

체념하면서 ‘에이 그래 가져가’ 하고 바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드렸다는 것이지요. 무슨 이야기입니까?


약속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을 통해서 나올 것이라는 18절의 약속을

포기하지 않고, 이 약속을 믿으면서 이삭을 바쳤다는 것이지요.

그게 무슨 얘기입니까?

 

 

죽은 아들에게서 자식이 태어나나요? 그렇다면 얘는 죽을 것인데

자식들이 계속 태어날 것이라면,

하나님이 죽을 자식을 다시 살려낸다는 것이네요.

 

내가 죽일 이삭을 하나님이 다시 살려내서,

이 이삭을 통해서 하늘의 별과 같은 자식을 계속 태어나게 하실 것이구나.

그것밖에는 다른 시나리오가 없다는 것을 아브라함이 알았던 것이지요.


아브라함은

‘나와 사라의 죽은 몸을 살려서 이삭을 태어나게 하셨던 것처럼,

내가 죽일 이삭도 다시 살려서 무수한 자손을 만드시겠다는 말씀이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히11:19절에서,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라며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창세기 이야기를 보면 실제로 죽인 것은 아니지요?

죽을 뻔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 내셨는데,

하지만 아브라함 입장에서 보면 죽은 거나 똑같아요.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다.’

라고 아브라함의 부활신앙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적용 : 내 믿음의 근거 ..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믿음


우리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는 구절을 인용하기를 좋아합니다.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로마서 10:10절이에요.

그런데 그 앞에 있는 9절에는 눈이 잘 안 갑니다.

그 앞에서 하는 얘기가 무엇일까요?

무엇을 시인하고 무엇을 믿어서 구원을 얻는 것일까요? 


롬10:9절에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네가 만일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네 입으로 시인하고,

또 하나님께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시인하는 것도.. 그것도 부활신앙에 근거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를 하나님의 우편에 올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오른편은 바로 하나님의 오른팔이잖아요.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하나님의 전권을 쥐고 계시는 거죠.

우리의 주님으로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고백이 주님이라는 고백입니다.

결국 부활을 바닥에 깔은 신앙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고 구원하는 믿음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 믿음,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부활신앙으로 고백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분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십자가 신앙은 강조되면서, 부활 신앙은 무시되고 있습니다.

이 부활신앙이 바로 구원의 신앙입니다.

종종 우리는 이 부활신앙을 막연한 채로 남겨두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눈은 자꾸 십자가로만 향하지요.


금요기도회를 하는 교회가 우리나라에는 많아요.

금요 기도회를 하는 교회마다 모여서 십자가 찬송을 부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죄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그래서 나는 행복하고, 그래서 감격하고, 울고,

그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지요.

 

 

금요 기도회에 모여서 부활절 찬송을 부르는 경우를 혹시 보셨습니까?

금요 기도회에 모여서 ‘예수 부활했으니-’

이런 찬양하는 교회를 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는 누구나 늘 반가워하고 좋아하는데,

부활에 관해서는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금요기도회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노래하는 찬송은 많이 부르면서도

부활에 관한 찬송은 평소에 잘 부르지 않습니다.

언제 부르지요? 예, 부활주일에 한번 부르고 끝나요.

그 다음 주일에도 안 불러요.


어쩌면 우리의 신앙은 부활을 잊어버린 신앙일지도 모릅니다.

사실 성경을 읽어 보시면, 출발점 자체가 부활입니다.

십자가를 보고 심오한 깨달음을 얻어서 교회가 생긴 게 아니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충격 받고 교회가 생긴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이 부활을 잊어버린 채 십자가에만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잊어버리고 십자가만 자꾸 이야기 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믿음보다는 불신앙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될 수 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는 건 쉬워요.

죽었다는 것을 믿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근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렸다는 것을 믿는 것은 어려워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부활을 생각하지 않고, 믿음에 대해서 얘기하기는 어렵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활을 쉽게 믿지 않습니다.  

물론 부활은 믿을 수 있는 얘기가 아닙니다.

근데 우리는 그런 애기를 하고 돌아다니고 그것을 믿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는 미친 사람들이죠. 문제는 우리가 미쳤다는 것을 잘 모른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도 부활을 잊어버리고 살고 싶어 한다는 얘기죠.

 

 

제가 친구한테 전도하려고 시도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제가 대학 때 벤치에 앉아서 무슨 얘기를 하다가, 부활에 대한 얘기를 했던 것 같아요.

제가 부활을 얘기하는 순간에 그 친구가 저를 딱 쳐다보면서 하는 한마디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야, 나는 네가 똑똑한 줄 알았다."

 

그 친구는 이해가 안 되는 거죠. 대학 온 것 보면 공부를 꽤 잘한 놈 같은데.

그런데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고 어쩌고저쩌고 하니까

그 대목은 이해가 안 되는 거죠.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믿고 삽니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는 걸 우리가 믿는다는 얘기죠.

 

 

▲부활을 묵상하며 삽시다.

이 부활을 우리가 좀 더 깊이 생각하는 연습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 것으로 표현되는 우리의 부활 신앙은,

우리 자신의 몸의 부활을 향해 고대하는 소망으로 표현되죠.


언젠가는 우리의 썩을 몸도 부활의 몸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에게 문제가 많습니다.

때로는 눈이 안보이기도 하고, 말을 못하기도 하고, 늘 아프고,

그런 우리의 몸이지만, 주님께서 살아나서 입으셨던 것처럼 언젠가는 우리도


그런 썩지 않을 몸을 입을 거예요. 우리가 새로운 존재로 변화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변화의 과정은 이미 시작된 것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이 부활의 능력, 새 생명의 능력이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의 삶속에 이미 심겨졌고,

이미 그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는 거죠.


죄와 죽음이 다스리는 삶 한가운데서, 그 생명이 이미 움직이고 있다는 거죠.

우리가 그것을 알고 그 생명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부활 신앙이라는 얘기입니다.  

 

▲불가능한 상황에서 무모하게 믿는 것이 .. 부활신앙(믿음)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주님이 도와 주십니다.

 

모든 상황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활의) 믿음을 주실 때는,

어떤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무모하게 믿을 수 있습니다.

 

사라처럼 아브라함처럼 그것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믿음이 중요하죠.

아브라함 부부처럼 절망하기 더 쉬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입니다.

100살이 다 되도록, 야구로 치면 9회말 2아웃이 되도록,

역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

 

그런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들렸고,

그 절망을 딛고서 그 약속에 아멘 한 것이 역사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자세히 보면, 그들의 이야기는 영웅들의 얘기는 아닙니다.

창세기로 돌아가 보면 얘기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하나님이 약속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웃었고, 사라도 웃었습니다.

비웃었습니다. 못 믿는 거죠.


창세기 얘기의 대부분은, 믿기 어려운 하나님의 약속과

아브라함이 내세우는 인간적인 미봉책 사이의 대결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나름의 방법을 찾고 강구하죠,

상속자를 자신이 만들어 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자식을 안주니까요.

어떻게 해요? 자기 집의 종 엘리에젤을 상속자로 삼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합니까? ‘아니야, 네 몸에서 낳아야 돼.’

그래서 하갈의 자식 이스마엘이 태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의 몸에서 나왔죠. 하나님은 뭐라고 합니까?

‘아니야, 사라의 몸에서 낳아야 돼.’

아브라함이 웃습니다. 사라도 웃었죠. 그래서 아이 이름이 웃음(이삭)이에요.


창세기를 읽어보면, 하나님이 고집을 펴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불신의 웃음, 비웃음을

기쁨의 웃음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바로 그게 창세기 얘기의 묘미죠.

 

구원의 믿음은, 부활의 하나님, 생명의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활을 거의 망각해버리죠.

하지만 부활 신앙을 되새기는 것으로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그런 모습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손쉬운 신앙에 집착하지 않고,

부활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던지는 그 도전을 바라보는 믿음이죠.

물론 우리의 삶을 생각하면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보면 다 거기서 거기인거 같고,

아무 일도 안 생길 것 같고, 그런 우리의 인생인데,

그런 중에 하나님의 그 생명의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죠.


하지만 그런 무모한 태도 속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런 모습이 담겨있다는 겁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지만 그 믿음 속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열쇠가 있다는 것이죠.

 

 

저는 여러분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모습은 바로 부활 생명의 하나님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죽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찾아오셔서 이삭을 약속하셨던 하나님 아버지,

생명이 없는 흙에서부터 아담을 창조하셨던 하나님 아버지,

골짜기 아주 마른 뼈들로부터 생명을 만들어 엄청난 군대를 이루셨던 생명의 하나님,


부활의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내셔서

저희들에게 새로운 삶의 길로 저희들을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 아버지,


이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저희들의 믿음을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이 믿음을 붙잡고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믿음의 역군들이 될 수 있도록

주님 저희들을 붙잡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부활, 추수, 성탄, 성찬, 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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