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가 세상을 어떻게 이기는가? 요16:25~33 10.03.28.설교스크랩
*원제목 :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서론 : 십자가 직전 예수님의 유언 :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마지막 일주일>에 집중된 기록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아울러 이 종려주일은, 또 고난 주간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저는 고난주간이 돌아오면 꼭 하는 일이 있는데,
4복음서의 예수님의 수난 기사를 꼼꼼하게 읽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서도 그것을 발견하신 분이 있으시겠지만)
신약성경을 쭉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 순간에 사건 진행이 느려지고
지금까지와는 달리 필요 이상 상세하게 설명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4복음서 중에 특히 요한복은, 그 부분이 장황하리만큼 길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일주일’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실 복음서는 예수님의 탄생, 사역, 고난, 죽음, 부활, 승천
이 여섯 부분이 골고루 나와야 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탄생 기사 같은 것은 아예 나오지 않는 복음서도 있고,
부활이 가장 큰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양으로 치면 그리 길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독 예수님 생애 마지막 일 주일은 거의 1/3 정도를 할애하고 있습니다.
4복음서가 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서의 저자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의도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일 행적에 주목하라는 겁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마지막 한 주간에 하신 일을 보면, 사역 자체도 엄청나게 많지만,
말씀 하나 하나도 다 유언처럼 절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같은 경우는 13장에서~16장까지 거의 혼자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생애는 한 정점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가고 있는
느낌을 주고 있는 겁니다.
물론 그 끝은 십자가지만, 열정을 쏟아서 뭔가를 남기려고 애쓰는 모습은
생애 마지막 일주일입니다.
‘랜디 포시가 그의 마지막 강의’를 향해 산 것처럼, 주1)
예수님 역시 이 마지막 일 주일을 위해 살아오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마지막 일주일 말씀의 총 결론은 -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요13~16장까지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 섬기라, 나를 믿으라’ 같은 유언의 말씀을 수없이 남기시고
그 마지막엔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라는 선언으로 말씀을 마치십니다. 16:33
(그 다음, 요17장부터는 ‘예수님의 기도’가 시작됩니다.)
오늘 바로 이 말씀에 주목하면서 여러분들과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유언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말씀(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은
우리에게도 가장 소중한 말씀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은혜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드시 환란을 당한 후에 .. 이깁니다.
▲예수님의 궁극적 목적
아시는 대로 교회 절기 중 가장 화려하고 영광스런 절기는 부활절입니다.
그런데 부활 전에 한 주간의 고난 주간이 있습니다.
영광을 위해서는, 고난의 시간이 당연히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고난이 됐든, 영광이 됐든
고난과 영광을 겪으시는 예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바로 그것을 외치고 계시는 겁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의 사역을 이어받을 제자들 또한 고백해야 하는 말씀이고,
나아가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우리들에게까지도 이어져야 하는 고백인 것입니다.
▲시제는 과거지만, 미래를 포함함
지금 예수님이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말씀하신 것은 시제는 과거 시제지만
사실은 앞으로 미래에 일어날 일을 표현한 겁니다.
히브리어법도 우리나라처럼 확실하고 결정적인 말을 할 때는
‘과거시제’로 표현합니다.
우리도 싸움을 하면서 “너 죽었어!” 그러는데, 그 얘기는 시제는 과거지만
좀 있다가 응징하겠다는 미래의 강한 의지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는 말씀은
“나의 승리는 확실한 것이기에,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어서 이겼다” 하는 선언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이 말씀을
‘영적 정복자의 승리 선언문’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냥 승리가 아니라, 고난을 겪은 후에 승리한다.
결국 이 말씀이 지향하는 바는 뭘까요?
성도가 마지막에 서게 될 자리는, 승리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런데 성도가 마지막에는 승리하지만
이 땅을 살아갈 때 사람들에게 받는 대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환란을 당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는 말씀 앞에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라는 말씀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즉 성도가 이 땅을 살아나가는 데는 평탄함과 박수와 안락함이 기다리는 게 아니라
고난의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 인물들 중에 평탄하게 살았던 사람은 없습니다. 다 고난 후에 승리했습니다.
이사야는 평생 핍박당하다가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했고,
예레미야는 평생 조롱당하면서 이리 저리 끌려 다니다가, 나중에는 이집트에서 죽었습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유리방황 했고,
모세 역시 40년 동안이나 유랑인생을 살았습니다.
바울 역시 고후 11:23~33 에서 자신이 겪은 고난을 처절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마지막에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서 죽었습니다.
다들 공통점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였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들의 마지막 모습은 모두 승리자였다는 것입니다.
▲문제 제기
오늘 우리가 점검해 볼 문제가 이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 갈 때 밤낮 부딪히는 문제가 환란인데,
그 환란 가운데,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려면,
우리가 지니고 있어야 할 무기가 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세상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환란 가운데도 승리할 수 있도록, 3가지 무기를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 자신이 그것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이 3가지 무기를 잘 활용하면,
우리도 환란 가운데서도 마지막에 승리할 줄 믿습니다.
이 고난 주간에 바로 이것을 새기시면서
마음을 다잡으시기를 다시 한 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세상을 이기는 첫 번째 무기는 용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 모두 다 자기를 배신하고 도망칠 거라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제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철없는 아이들처럼 자기 야심에만 빠져 있고,
예수님이 무슨 세상의 왕이 되는 양 논공행상을 따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얘기만 나오면, 아예 귀담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분통을 터뜨릴 상황입니다.
큰일을 앞두고 계신데, 얼마나 번민이 많으시겠습니까?
당신을 세 번 부인할 제자도 있고, 아예 팔아먹을 제자도 있고,
좀 낫다 해도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칠 제자들을 보면서.. 어찌 한심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도 그 외로움과 배신감 속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고 용서하셨습니다.
이 용서의 태도가.. 최후 승리를 가져다주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용서는 원래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우리 죄인들은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죄인의 본능에는 용서가 맞지 않습니다.
죄의 본능은 미움이요, 저주요, 갈등이요, 분노입니다.
그런 우리가 언제 진짜 용서할 수 있습니까?
성령으로 거듭날 때,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역사하실 때,
비로소 용서의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사람을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용서는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에 어떤 목사님의 간증을 하나 들었습니다.
자기가 5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였나를 생각해 봤답니다.
결혼할 때였을까, 첫 아이를 봤을 때였을까, 안수 받았을 때였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다 아니더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기 초등학교 때 얘기를 하더군요.
자기 반에 친한 친구가 하나 있어서, 밤낮 같이 붙어 다녔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친구하고 우산으로 장난을 치다가
그만 우산 끝으로 그 친구 눈을 찔렀대요.
눈에서 피가 흐르는데, 한 두 방울이 아니라 줄줄 흘러내리더랍니다.
친구 눈을 못 쓰게 만드는 게 아닌가.. 너무 놀랬답니다.
다행히 눈동자는 다치지 않고, 눈 위쪽이 10센티 가량 찢어졌더래요.
그런데 그 친구는 3대 독잔가, 4대 독잔가 그랬답니다.
그 집에서는 난리가 났겠지요?
그 다음 날부터 그 어머니와 식구들이 돌아가면서
학교에 찾아와서 자기를 괴롭히더라는 거예요.
책임지라느니, 부모님을 모셔 오라느니, 반성문을 쓰라느니,
네가 제대로 된 인간이냐느니, 별별 소리를 다하며 구박하더랍니다.
그게 한 달 동안 계속됐답니다.
그때가 5학년 땐가 그랬다는데
그 어린 마음에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엄청나게 시달림을 받았답니다.
자다가도 깜짝 깜짝 놀라서 일어난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답니다.
그러면서 고백하기를 그때만큼 기도를 많이 한 적이 없었다는 거예요.
오죽하면 초등학생이 ‘겟세마네 기도’처럼 처절하게 기도했답니다.
‘주여! 내가 고민하여 죽게 되었사오니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든지
아니면 내 생명을 거두어 가 주시든지 주옵소서’ 그랬답니다.
정말 살맛이 안 났대요. 학교 가는 것이 공포였답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다음에 그 어머니가 오시더니 딱 한 마디를 하셨답니다.
“내가 너를 용서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엎드려 울었답니다.
그 기쁨과 해방감이 이루 말할 수 없더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 생애 중에, 그때만큼 기뻤던 때는 아직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 얘기가 그 분만의 고백일까요?
사실은 우리 모두의 얘기입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내가 너를 용서한다” 고 하시는 겁니다.
용서받은 사람만이 비로소 힘을 얻습니다.
다윗도 많은 죄악을 저질렀지요?
그 죄악 때문에 고통을 겪다가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자
그게 너무 기뻐서 지은 시가 시편 32편 1절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그러니까 다윗에게는 다른 게 복이 아니라,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의 가리움을 받는 게 복이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사죄의 은총을 누린 하나님 백성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용서가 중요한 것은, 용서는 그렇게 사람을 살리는 힘이 있을 뿐 아니라,
마귀의 세력을 무력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형들의 질투와 미움을 사서 노예로 팔려갑니다.
어린 나이에 그런 일을 당했습니다.
그러니 아마 “나도 상처 있는 사람이다” 자처하는 사람 중에
요셉보다 더 큰 상처 입은 사람이 있을까요?
그 당한 역경과 고통이라는 것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피눈물 나는 세월이 흘러갑니다.
그러다가 총리가 되잖아요?
그런데 자기를 팔았던 형들이 양식을 구하러 와서 그 앞에 선 겁니다.
자기는 이집트의 총리입니다.
우리 같으면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내 인생을 망친 놈들, 내 행복을 송두리째 빼앗아간 놈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요셉의 고백이 뭡니까?
창45: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그랬습니다.
환경 탓하고 저주하며 미움 품는 게 아니라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요 복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이게 성도의 능력입니다.
▲똑같은 일이 다윗에게도 벌어졌었지요?
원수 같던 사울을 두 번이나 살려 주었습니다.
똑 같은 일이 스데반에게도 일어났습니다.
돌을 들어 치려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잘 보세요! 용서하면 마귀의 모든 계획이 박살납니다.
요셉의 경우, 보통 사람 같으면, 피의 복수가 일어나겠지요?
그러면 그 자녀들은 다시 요셉에게 원한을 품게 되고
음모에 음모가 끊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악한 마귀가 계속해서 활동할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 자리에서 다 용서했습니다.
그랬더니 더 이상 사탄의 세력이 힘을 발휘하질 못합니다.
죄의 세력이 뿌리 채 뽑히는 능력이 나타난 겁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형성되는 기초는, 요셉의 용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용서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강한 민족이 되었고
결국은 출애굽 해서 하나님의 선민이 됩니다. 그렇게 용서에는 힘이 있습니다.
▲용서는 민족을 융성하게 만드는 권능의 도구입니다.
다윗, 스데반 다 마찬가지입니다.
용서하게 되니까 힘이 생기고, 결국은 용서가 사람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예수 이름으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용서는 이 땅 위에 있는 마귀의 세력을 뿌리 뽑고,
사람들을 살리며 승리하게 하는 무기입니다.
용서는 나라를 융성하게 합니다.
요셉의 용서를 통해, 이스라엘이 생겨났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요셉이 보복해서 칼을 휘둘렀다면.. 12지파가 생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언론에 무슨 사실만 보도되면
모두가 손에 돌을 들어 치려하는 살벌한 분위기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만이라도, 여론에 휩쓸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모두가 ‘의인’이 되면,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실 것입니다.
요8장에 간음하다 현장에 붙들린 여자를, 끌고 왔습니다.
혹자는, 전체를 살리기 위해서, 악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자가 돌로 치라!’
(공동체에 미칠 악의 뿌리는, 주님이 반드시 제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 분위기가, ‘죄 없는 사람들’이 대다수입니다.
그런 사회는.. 하나님께 외면당할 것입니다.
사회는 그렇다 치더라도, 크리스천들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용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비밀스런 무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는 사람으로 세우기 위해 부르셨어요.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해 주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마지막에는 최후의 승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번 고난 주간을 보내면서, 가장 많이 이 용서에 대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을 이길 가장 강력한 힘을 소유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세상을 이길 두 번째 무기는 ‘믿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배신하고 실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믿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그들을 믿어 주셨기 때문에
결국 제자들은 예수 이름으로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요16:32절에도 보면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십니다.
다 알고 계셨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여전히 제자들을 믿었습니다.
믿으면 변화됩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주는 유혹이 뭡니까?
서로 믿지 못하게 만드는 거예요.
여러분, 절대로 귀담아 들으면 안 될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 믿을 놈이 어디 있어?”
이런 마음을 품고 살다 보면 계속해서 불신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 마귀의 꼬임에 넘어가는 거고, 그러면 실패자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지요.
우리가 왜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끝까지 믿어줌으로써 사람을 변화시키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왜 사람을 믿습니까?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을 끝까지 믿어주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사람을 믿었더니만 그 사람이 배신을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 배신이
결국 손해가 되지 않도록 우리 삶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그러니까 끝까지 믿으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자기가 손해 보기 싫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국 세상은, 예수님처럼 믿는(신뢰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변화되어져 나갈 것입니다. 그들이 역사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지난 역사가 그랬습니다.
▲다윗은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사울을 살려 주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사울의 손에서 붙들어주시지 않았습니까?
결국 사울의 모든 공격이 다 선으로 바뀌도록
하나님께서 변화시켜 주시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사람을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에, 사람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믿으셨습니다.
그렇게 믿어 주니까, 모두들 다 믿을 만한 사람으로 변화되지 않습니까?
신뢰가 불신을 이기는 것입니다.
▲저는 제 자신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약점 투성이에 허물투성이입니다.
도저히 하나님 앞에서 목사의 사명을 감당한 만한 인격이 못 됩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도 감사하는 것이, 그렇게 몹쓸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저를 믿어주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믿고 계시니까, 목사로 세워서 지금도 말씀을 증거하게 하시고,
여전히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맡기시는 것 아니겠어요?
저는 그것이 참으로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저를 믿어주신다는 사실이 정말 감사합니다.
▲사도 바울도 똑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딤전1:12에 보니까,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그랬습니다.
과거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습니다.
아주 몹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생각할 때 마다 감사한 사실은
예수님이 자기를 믿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믿고 사도의 직분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를 감격케 했습니다. 충성하게 만들었습니다.
(혹시 사람이 나를 믿어주지 않아도) 이 믿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새 힘을 얻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방법 역시 ‘믿는 것’입니다.
믿어 주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사명입니다.
▲믿음의 능력을 알게 해 주는 사례가 있습니다.
서커스를 보면, 거기에 빠지지 않는 묘기가
동물들이 불붙은 링ring 가운데를 뛰어넘는 묘기입니다.
불이 활활 타오르는, 그렇게 크지도 않은 링 사이를
호랑이나 사자를 시켜서 뛰어넘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동물학자들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원래 털 많은 동물들의 본성은, 불을 아주 싫어한답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털에 불이 붙으면 그대로 타 죽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호랑이나 사자가 불을 뛰어 넘을 수 있을까요?
저는 특수한 방법으로 거듭 훈련시키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랍니다.
조련사들 말이 아무리 훈련을 시켜도, 동물은 불을 향해 돌진할 수 없답니다.
그럼 그런 동물들을 뛸 수 있게 만드는 것 뭘까요?
바로 자기 주인에 대한 믿음이라고 합니다.
동물은 불을 향해 뛰기 전에, 먼저 자기 주인의 눈을 바라본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믿고 뛴다는 거예요.
동물도 이런 믿음이 통한다는 것, 정말 신기하지 않습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 본능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내 본능이 원초적으로 거부하는 거라도
그 안에 믿음이 있으면, 불을 향해 뛸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거예요.
우리 앞에 엄청난 장애와 역경이 있습니다. 난관이 있고, 장애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뚫고 나가게 만드는 능력은.. 바로 ‘믿어 줌/신뢰 받음’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어 주어야 합니다.
악한 마귀는 이것을 깨기 위해서
목사도 못 믿게 만들고, 성도도 못 믿게 만들고
심지어는 가족도 못 믿게 만듭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오직 이 세상에는 나 혼자 밖에는 없다”는 생각을 심어줍니다
그래서 불쌍한 인생을 살게 만듭니다. 그건 실패하는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형제를 믿고, 성도를 믿고, 가족을 믿어 주어야 합니다.
이게 바로 진실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제가 가끔 연예인들한테 감동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작년 언젠가 영화배우 이준기 씨가 인터뷰하는 것을 봤는데,
자기 매니저는, 지난 10년 동안 한 사람이었다는 거예요.
보통 인기가 올라가고 돈을 쥐게 되면, 더 유명한 기획사들이 유혹을 한답니다.
더 높은 계약금과 더 많은 활동을 보장하면서, 오라 그런다는 거지요.
그런데 자기는 무명일 때도 그 매니저였고,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지금도
역시 똑 같은 매니저와 함께 일하고 있답니다.
이유가 지금 매니저는 자기 무명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자기를 믿어준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매니저라기보다는 그저 친형 같다는 겁니다.
돈의 논리에 의해서 하루아침에 거취가 돌변하는 세계에서
그런 모습을 본다는 게 참 보기 좋았고, 참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시 서로 믿고 믿어주는 관계가, 그렇도록 끈끈한 정을 만들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게 성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돈을 많이 버는 것?
그렇지 않습니다.
억만 금을 벌어도 그 돈을 벌기 위해서 주위 사람들을 다 버렸다면
그 사람은 실패자입니다.
어떤 사람들을 보면 참 이상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작은 유익을 위해서, 약속도 의리도 헌신짝처럼 버리고, 배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 오른다 해도.. 그 사람은 실패자입니다.
참된 성공은 믿음에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약속과 의리와 믿음을 지키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친구 간에 의리를 지키는 것을 우정이라고 하고,
남녀관계에서 의리를 지키는 것을 정조라고 하고,
군신간에 의리를 지키는 것을 충성이라고 합니다. *군신:임금과 신하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믿음을 지키는 것을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이 헌신입니다.
▲성도간에도 똑 같은 믿음의 덕목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우리 안에 이기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 밖에 모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큰 범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뜻에서 교인들은 서로 믿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세상을 이길 수 있고, 그 믿음만이 환란 가운데서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한 주간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고,
우리를 믿어 주시되 끝까지 믿어주신 그 예수님의 믿음을 깊이 묵상하며
마음을 새롭게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세상을 이기는 세 번째 힘은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 요16:26절을 보면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라는 말씀은
하나님 앞에 직접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직통 길이 열렸다는 겁니다. 중간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직통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는 겁니다.
하나님께 구하면 능력이 임하게 되고 응답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똑같은 맥락의 말씀이 히10:19~20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예수님의 능력으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직통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환란을 이길 수 있도록 주신 제일 큰 능력이 바로 기도의 능력입니다.
마18:18을 보니까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이런 약속을 주셨습니다.
▲언젠가 독일이 통일된 그 원동력이 뭔가에 대해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르바초프가 개방정책을 폈기 때문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소련이 무너졌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민주주의의 승리라고도 합니다.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가장 정확한 해석은
믿는 성도들이 독일 통일을 위해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1983년 독일의 라이프니쯔의 성 니콜라이 교회에서
성도들 50명이 모여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게 해 주옵소서!”
매주 월요일 저녁 6시마다 함께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6년 동안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1989년 초에는 그 숫자가 10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러니까 6년 동안 50명에서 100명의 사람들이 모여
매주 월요일 저녁 6시에 기도회를 가졌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잖아요?
그런데 1989년 10월 2일에는 2만 명이 모였습니다.
10월 9일에는 7만 명, 10월 23일에는 36만 명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10월 30일에는 57만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아주 미약한 기도회였지만 하나님께서 6년이 지나는 동안
기하급수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을 늘려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기도의 응답으로 마지막으로 기도회를 가진 날,
마침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통해 일하십니다.
이 땅에서 성도들이 모여 기도로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인다고 합니다.
이 땅에서 기도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합니다.
이 땅에 묶어야 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도 마귀가 무당과 점쟁이를 통해서, 또 전쟁이니 환생이니 하는 것을
소재로 한 드라마를 통해서 얼마나 난리를 치고 있습니까?
이것들을 다 기도로 묶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묶일 것은 다 묶이고, 풀릴 것은 다 풀립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환란을 당할지라도,
우리는 기도로써 풀 수 있고, 기도로써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이 한 주 고난 주간에 뭘 하겠다 안 하겠다 보다는
바로 오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우리는 세상을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선언해야 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냥 되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이길 수 있도록 주신 이 3가지 힘을 반드시 사용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 힘을 누릴 수 있도록 살아야 합니다.
우리 다같이 용서하십시다!
내가 주님께 용서 받았듯이 용서하십시다!
또한 하나님을 믿고, 또 우리 이웃을 믿어 주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믿어 주신 것처럼, 그렇게 믿어줄 때 거기서 힘은 생겨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기도로 묶을 것은 묶고, 풀 것은 풀어야 합니다.
기도 없이는 다른 무엇으로도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런 실천 가운데 일 주일 후 우리 다같이 기쁨과 환희의 부활절을 맞이하십시다!
주1) 인생의 한 정점을 위해, 자기 혼신의 힘을 다했던 랜디 포시
2009년 한 해 동안 전 세계적으로 감동을 줬던 동영상이 있다면
아마 카네기 멜론 대학교수였던 랜디 포시의 ‘마지막 강의’였을 겁니다.
랜디 포시는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고 자기 가족을 비롯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어떻게 인생의 마무리를 지을까 고심하다가 이 마지막 강의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약 400명의 청중들 앞에서 자기가 인생에서 경험했던 소중했던 것들과
꼭 하고 싶었던 일들을 어떻게 이뤄나갔나 하는 것들을
말기 암환자답지 않게 열정적으로 강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기가 이런 강의를 마련한 것은
아직 어린 자기의 세 자녀를 위해서였다고 고백합니다.
지금은 너무 어려서 아빠가 하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할까 봐.. 남기는 편지라는 거지요.
마치 병에 담아 바다에 띄우는 편지처럼, 자기 아이들이
언젠가는 해안가에서 그것을 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강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포기하지 말고, 정직하게, 그리고 감사하면서 살라는 말을 남기고
2008년 9월에 48세로 죽습니다.
죽기 직전까지 유머를 잊지 않으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아름답게 죽는다는 게 뭔지를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그 동영상은 유튜브 사이트를 통해서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알려졌는데
지금까지 2천만 명 이상이 그 강의를 봤다고 합니다.
그 강의 때문에, 자살하려고 했던 많은 사람들이 소망을 얻고 다시 살게 되었다고 하지요.
아직 보시지 않은 분들은 검색창에서 랜디 포시를 찾으면
그의 마지막 강의를 들을 수 있을 겁니다. 꼭 한 번씩 찾아서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그 강의를 보면서 느낀 것은, 참 저 분이 48년을 살아 왔지만
강의를 하는 저 순간을 위해서, 지금까지 살아온 거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인생의 정점에서 마지막으로 혼신을 쏟아야 할 그런 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 기독교 승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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