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받은 나귀새끼 마21:1~9 10.03.28.설교스크랩/축약
본문은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입성을 출발한 장소가
벳바게 마을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예루살렘 동쪽에서 시내로 입성하려면 약 3km 떨어진 베다니 쪽에서
감람산 남쪽 정상에 위치한 마을 벳바게를 지나 감람산을 넘어가야 합니다. 주1)
어린 나귀 새끼 입장에서 보면, 이 날은 그의 생애 최고의 날이었을 것입니다.
메시아를 태우고 들어오며 듣고 있었던 군중들의 환호성, 박수갈채는
그의 가슴을 얼마나 설렘으로 들뜨게 했을까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리는 감격, 그가 느낀 감격의 본질은
바로 쓰임 받는 감동이었을 것입니다.
자, 그러면 종려주일 어린 나귀가 겪은 위대한 체험의 레슨은 무엇이었을까요?
◑1. 주권적 선택과 예정입니다.
▲하필 어린 나귀를 선택하셨습니다.
세상에 그 많은 나귀 중에 나 같이 어린 나귀가
메시아의 예루살렘 입성을 위해 선택되었다는 사실,
이것은 그 무엇보다 이 나귀에게 특권이었고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어린 나귀가 벳바게 건너편 마을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매어 있었는지를
정확하게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본문 2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이어지는 3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이 나귀의 궁극적인 주인 되심을 선포 하십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오늘도 당신은 ‘어린 나귀’가 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할 ‘어린 나귀’를
오늘도 찾고 계십니다.
▲선택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어린 나귀가 이렇게 쓰임 받을 일이
이미 구약성경에서부터 예정되어 있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4~5절의 말씀입니다.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본래 구약 성경 스가랴 9:9에 기록된 말씀인데
그 기록의 때가 BC 480~470년의 일입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런 사실을 가르쳐
‘선택의 교리’(doctrine of election)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미리 정하시고’(예정)
‘미리 아시고’(예지)
그가 사용하실 대상을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나귀가 그렇게 선택될만한 어떤 조건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분의 ‘주권적 선택’이며 ‘무조건적 선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선택을 다른 말로 ‘은혜의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나귀 새끼 한 마리도
이렇게 쓰임 받을 계획으로 예정되고 선택되어 태어난 것이라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 날 때, 의미 없이 이 세상에 던져진 그런 존재이겠습니까?
▲선택을 믿지 않거나/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의 불행
그러나 불행한 사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신자들은
내 인생이 어떤 목적도 의미도 없이
우연히 이 고해 같은 세상에 태어난 것이라고 믿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사1:3)
그러면 당신은 깨닫습니까?
내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그는 나를 사용하실 놀라운 계획을 만세전부터 정하시고
나를 이 땅에 보내셨음을 말입니다. 당신은 보통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오늘 나에게 주어진 삶을 감사함으로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신자의 본질적 특권인 것입니다.
▲‘선택’을 알면, 믿음이 굳세어집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선택의 확신을 갖는 것이 믿음의 승리의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벧후1:10
선택을 확신하십시오. 그리고 믿음위에 굳게 서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나귀보다 존귀한 존재이십니다.
◑2. 선택한 자를, 주권적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나귀가 예수님을 태우고 간 것이지만,
실제로 예수님이 나귀를 이끌고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간 나귀의 고난과 특권
이 날 이 어린 나귀는 그러나 얼마나 힘든 여정의 고난을 견디어야만 했을까요?
별로 일도 못해본 이 어린 나귀에게
이 날은 생애 최고의 고난의 날이기도 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적어도 2km 이상의 여정을 이 나귀가 소화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걸어 보았고, 해마다 종려 주일이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길을 걷습니다만
이 여정 벳바게에서 예루살렘 시내까지는 비탈길과 언덕,
그리고 내리막길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이 나귀가 이 여정을 예수님을 태운채로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간 것은 참 신통한 일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된 수많은 성도들은
믿음의 도상에서 넘어지고 아파하는 과정을 겪습니다.
▲주권적으로 선택한 자를, 주권적으로 인도(견인)해 가십니다.
이런 체험을 신학에서는 ‘견인의 과정’이라 부르는데,
견고한 인내를 시험하는 과정이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주님이, 그 고난을 이길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권적으로 선택하신 것으로만 끝나지 않고,
선택을 하셨으니까, 책임을 지시고 천국까지 이르도록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고난의 과정을 통해, 우리의 성화가 이루어지고
우리는 주님이 사용하실만한 대상으로 훈련되어 지는 것입니다.
▲나귀의 특징은 (똥)고집
사실 나귀라는 동물은 매우 이중적인 이미지를 갖는 동물입니다.
한편으로는 고집이 세고 미련한 이미지를 갖습니다.
그러나 일단 훈련되면 매우 충직하고 지혜로운 동물로 간주되고
그래서 지난 시절 사람들의 교통수단으로 선호된 것입니다.
나귀의 고집스러움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 있습니다.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문인화가 ‘김시’라는 사람이 그린 그림 중에 <동자 견려도>
라는 유명한 작품이 있습니다. *소년(동자)이 당나귀(려)를 끄는(견) 그림(도)
하얀 옷을 입은 동자가 나귀를 맨 줄을 잡아당기며
개울을 건너게 하려고 용을 쓰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나귀는 네 다리에 힘을 준채로 엉덩이를 뒤로 빼고 요지부동입니다.
나귀에게 이런 고집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귀들은, 먼저 고집을 꺾기 위한 훈련이 요구됩니다.
어쩌면 많은 경우 성도의 고난은
우리가 주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받기에 합당하도록 훈련되기 위한 고난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자진해서 자기 고집과 자아를 꺾고, 그분의 손길에 내 인생을 위탁하는 일입니다.
어쩌면 예수께서 그 날 어른 나귀를 제쳐두시고,
어린 나귀를 선택하신 이유도 거기에 있을 법하지 않습니까?
그렇더라도 주님을 모시고 가는 길에, 여전히 고난은 면제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이기었노라”(요한16:33)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나귀와 나귀같은 성도의 고난의 체험의 본질입니다.
◑3. 선택한 자를 <천국까지> 이끌어 가십니다.
▲종려나무 속에 입성은, 장래 천국의 리허설
사실 이 광경은 장차 우리가 완성된 천국에 입성할 때 일어 날 일들의
리허설 장면이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계7:9-10을 보십시오.
“이 일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그날은 종려 주일과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스케일의 축제가 될 것입니다.
모든 나라와 모든 족속, 모든 백성 들 중에
예수님을 자기 인생에 태우고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모두
종려 가지를 들고 호산나 찬양을 함께 부르며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함께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영광의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고난이 필수적임
그러나 그 영광에 축제에 자랑스럽게 참여하기 위해서
아직은 우리에게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그 날 그 영광의 자리에 부끄럼이 없도록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의 고난,
사명의 성취를 위해 걸어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어린 나귀에게 있어서, 그 일은,
예수님을 등에 태우고(모시고) 가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린 나귀처럼 예수님을 모시면.. 주님과 동행하는 행복과 천국이 임하지만,
종려나무 갈채 속에 영광스럽게 천국에 입성하는 기쁨을 지상에서 예고편처럼 맛보지만
그것은 동시에 짐이고, 십자가입니다.
바울 사도는 롬8:17~18에서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고 말합니다.
이런 고난을 우리의 선배들은 ‘스티그마’ 곧 예수님의 흔적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고난의 상처(scar)는
그 날 우리의 영광의 훈장(star)이 될 것입니다.
▲가장 큰 환영을 받은 군인들은?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난 후
영국의 참전 용사들이 고국귀환 환영 축제 퍼레이드가 준비되고 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런던의 중심가는 사람들의 물결이 만들어 지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정해진 시각 영국의 상하원 의원들 그리고 여왕 폐하가 자리를 잡자
개선 군인들이 입장하고 있었습니다.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 한 부대 한 부대가 거리를 지날 때마다
사람들은 우렁찬 박수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부대가 중앙 무대가 있는 거리로 들어서자
여왕을 위시한 모든 시민들은 기립하여
최고의 예우를 갖춘 자세로 박수와 경의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상이용사들, 전장에서 부상당한 이들이었습니다.
팔을 잃고, 다리를 잃고, 어떤 이들은 들것에 실려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그 날의 영웅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상처(scar)는 곧 그들의 훈장(star)이었습니다.
.....................................
주1)
벳바게는 “덜 익은(이른)무화과의 집”이란 의미인데
이곳에서 예수께서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일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 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엣두아르’ 마을로 불리움)
벳바게에는 예수님 종려주일 입성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본래 12세기 십자군 시대(에 조성된) 교회 터 위에
1883년 프란시스칸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아담한 이 교회당 내부의 전면에는
예수님이 나귀타고 입성하시는 성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해마다 종려 주일이 되면 이 교회에서 출발하여 감람산을 넘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행렬이 재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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