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0

승리와 승리주의의 구분 2388

LNCK 2010. 4. 5. 14:48

◈'승리'와 '승리주의'의 구분                            빌3:4b-14                              10.03.21.설교스크랩

                                                                                                                  *원제목  : 오직 한 가지


◑축구 골 세레머니 논란


요즘, 기독교인 운동선수들의 세레머니를 두고 논란이 있습니다.

불교계에서, 축구선수가 골을 넣고서 기도하는 세레머니를 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축구협회에 항의를 했다고 하지요.


이건 옳지 못한 태도입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신앙고백을 막을 수 없습니다.

종교의 자유란 곧 신앙고백의 자유인데, 이 자유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순교했고, 얼마나 오랫동안 싸워야 했습니까?

그건 막을 수 없습니다. 그걸 막으려는 건 옳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오래 전부터 기도하는 세레머니는 마음에 걸렸어요.

골을 넣자마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이 좋게만 보이지는 않더라고요.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지요. 같은 교회에 다니는 축구선수가 2명 있는데,

한 명은 A팀 공격수고, 또 한 명은 B팀의 골키퍼예요.

두 사람 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잘 믿고 섬기는, 아주 좋은 신자들입니다.


두 팀이 시합을 하게 됐어요. 두 사람 중에 공격수가 공격을 해서 골을 넣었어요.

골키퍼가 공을 막지 못한 겁니다.

그런데 그 앞에서 공격수가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기도하면,

골키퍼의 입장은 뭐가 될까요?


하나님이 그 공격수는 사랑하셔서 골을 넣게 해주시고,

골키퍼는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으셔서, 혹은 하나님이 미워하셔서 골을 먹게 하신 걸까요?


하나님도 아주 난처하실 것입니다.

공격수는 ‘골을 넣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했을 것이고,

골키퍼는 ‘골을 막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했을 거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느 편의 기도를 들어주셔야 합니까?


또, 골을 넣었을 때는.. 감사하다고 기도하면서,

(슈팅을 하고는) 골을 넣지 못했을 때는.. 왜 기도하지 않는 겁니까?

골을 넣은 건 하나님의 은혜이고, 골을 넣지 못한 건 은혜가 아니라는 겁니까?


제가 알기로는, 골을 넣었을 때,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 세레머니를 하는 건

전 세계에서 한국의 몇몇 기독교인들밖에 없는 것 같은데,

오랜 기독교 역사를 가진 다른 나라들에서는, 왜 이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나라 기독교인들만 하나님을 잘 믿고,

다른 나라 기독교인들은 다 나이롱 신자라서 그런 걸까요?


하지만, 실제로 외국 축구선수들 중에, 아주 독실한 기독교인들이 많다고 합니다.

세계 제일의 선수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브라질의 카카 선수는

유니폼 속에 받쳐 입는 셔츠에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라는 글을 써놓았습니다.

그리고 골 세레머니를 할 때 그 글을 사람들에게 보여줍니다.


저는 이런 모습이,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승리주의”가

거기서도 드러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기고,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그렇지 않은 건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한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 말입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본의 아니게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병에 걸리거나, 대학교에 떨어지거나,

사업에 실패하거나, 취직을 못하거나 하는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

하나님이 사랑하시지 않는 사람 취급을 하는 경향이.. 교회 안에 있는 것을 봅니다.


◑승리주의에 대한 바울과 예수님의 입장


▲1. 바울의 입장.. 세레모니가 아니라, 해disadvantage로 여깁니다.

그런데 본문의 바울은, 승리주의에 대해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말합니다.

 

빌립보서 3: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육신에 신뢰를 둘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합니다.

나는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을 적대시하는 사람들이 자기 자랑을 하도 하니까, 듣다못해 하는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자랑하라면, 나도 자랑할 게 남부럽지 않게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을 자랑거리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빌3:7절을 봅시다.

“[그러나]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자랑으로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오물로,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남들은 자랑하기 바쁜 것들이고, 그런 거 갖지 못해서 억울해하고 부러워하는 것들인데,

바울은 그런 것들을 오히려 해로운 것으로 여기고, 오물로 여긴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얻었다고 세레머니 하는 것들에 대해,

바울은 정반대의 입장을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꼭 그래야만 했을까요?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아도 되는 거 아닐까요?

‘그냥 그것들보다 예수님이 더 소중하다’ 그 정도면 충분한 거 아닐까요?


사실 바울은 당대에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남들이 갖지 못한 많은 것을.. 이미 가졌고,

남들이 이를 수 없는 위치에.. 이미 오른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차라리 그런 걸 가지고,

그걸 이용해서 전도하는 데 사용하면 더 효과적이지 않겠나,

그걸 버리지 말고 잘 이용하면 일하기가 훨씬 좋을 텐데.., 그런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일까요?


▲2. 예수님도 ‘승리주의’를 단호히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시고서 광야에서 기도하시는 동안

마귀가 찾아와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 그 이야기가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악마는 예수를 그 거룩한 도성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서, 너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이다' 하였다.


또 마귀는 예수님에게, 자기에게 절을 하면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주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건 대단히 매력적인 유혹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예수님이 세상에서 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훨씬 손쉽게,

대단히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 겁니다.


사람들이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예수님을 천사들이 떠받드는 것을 보면,

‘아, 저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하면서 그 말을 듣지 않겠어요?

또 세상 모든 나라의 권세와 영광을 가지면,

그걸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가 훨씬 쉽겠지요.


그런데 왜 예수님은 마귀의 유혹을 단번에, 단호하게 거절하셨을까요?

우리 생각에는 그걸 가지고 잘 이용하기만 하면, 굉장히 유익할 것 같은데 말이지요.


혹시 마귀가 제안한 거라서 그러셨을까요?

그러면, 만약에 마귀가 제안한 것이 아니라면, 그 제안을 받아들여도 되는 것일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유혹을 물리치시면서 하신 말씀을 보면,

그 제안이 마귀가 한 것이어서 거절하신 건 아니었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유혹에 대해서는,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대답하십니다.


세상 나라와 영광을 주겠다는 제안에 대해서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대답하십니다.


이 말씀은, 마귀에게 절하지만 않으면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마귀가 왜 자기에게 절하라고 합니까?

절을 하면, 세상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마귀에게 절하는 것은, 곧 세상 권세와 영광을 갖기 위해서이고,

결국 마귀보다도 세상 권세와 영광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거 갖고 싶지 않으면, 마귀에게 절할 이유가 없는 거니까요.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마귀의 유혹, 마귀의 제안을 거절하고 물리치신 것은,

그게 마귀가 제안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내용 자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내용이 모두 아까 말씀드린 “승리주의”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이 가지고/ 높아지고/ 유명해지고 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

그걸 가져야 가치 있는 삶을 산 것이고,

그렇게 되어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라는 (승리주의의) 믿음 말입니다.


그런 것들을 가지면 일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건 오히려 해로운 일이고 오물과도 같이 더럽고 쓸데없는 거라는 게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결국은 예수님을 향해 가는

우리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승리주의’와 ‘승리’는 구별할 필요 있습니다.


축구선수가, 더욱이 공격수가, 골을 넣는 건 좋은 일입니다.

그것을 나쁘다고 하면 말이 안 됩니다. 그게 나쁘면 축구를 하지 말아야지요.

승리가 나쁜 게 아닙니다. 이왕이면 지는 것보다는 이기는 게 더 좋지요.


문제는 ‘승리’가 아니라 “승리주의”입니다.

-이겨야 하나님께 복을 받은 것이고,

-골을 넣어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이고.. 하는 식의 사고방식 말입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고,

일을 잘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인기가 높아지고 유명해지고 하는 게

나쁘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게 나의 자랑이 되고,

그렇게 되어야만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이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증거라고 생각하는 건 옳지 않은 겁니다.


더욱이 그렇게 되지 못한 사람을 무시하고,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시지 않는 거다,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한 거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주 나쁜 겁니다.

그런 생각을 가리켜서 “승리주의”라고 하는 겁니다.


▲세상적 승리가.. 푯대를 향하여 달리는 길에, 거추장스러울 수 있습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봅시다. 빌3:10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소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아직 이것을 이루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13절을 봅시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오직 한 가지 목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부르심을 따라,

목표점을 향해, 목표점만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앞서 언급했던 것들, 세상 사람들이 자랑하는 것들,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들을 그대로 가진 채,

혹은 그것들을 여전히 소중하게 여기고 자랑스러워하는 마음을 가진 채로는

자꾸만 그것들이 발목을 잡아끌어서, 제대로 달려갈 수가 없다는 거지요.


목표만을 보아야 하는데, 자꾸 그런 것들에 눈길이 간다는 겁니다.

그걸 이용해서 바울이 하는 일을 더 효율적으로 하거나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을 거라는 유혹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러기 전에, 자기가 먼저 주저앉고 만다는 겁니다.


달리기를 하는데, 목표만을 바라보고 가지 않고,

몸에 보석과 장신구를 치렁치렁 달고서, 그게 혹시 떨어지지 않을까,

제대로 달려 있기는 한가, 사람들이 그걸 봐주고 있는가,

그런 거 신경 쓰다가는 제대로 달릴 수조차 없게 되고 만다는 거지요.


무엇보다, 그것들이 해가 되는 이유는,

그런 것들을 포기하지 못하고, 거기 마음을 쓰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목표가 바뀐다는 겁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서 주님을 따라가던 길이,

어느 새 그런 것들을 자랑하고,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쪽으로 바뀌게 된다는 겁니다.


내가 달려가는 목표는 저기 있는데,

세상이 주목하고 부러워하는 것들을 자랑하고,

그런 것들을 위하여 사는 일에 마음을 빼앗겨서,

결국 목표 자체가 달라진다는 겁니다.


내 자랑거리들, 내가 세상에서 성공하고 승리하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또 성공하고 승리하기 위해서 신경 쓰다 보면,

어느 새 내 달려가는 목표가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라,

내가 가진 자랑거리들을 향해 달리게 되고 만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유혹을 끝까지 거절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마음만 먹으면 왕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사람들도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민중봉기를 일으켜서 유대인의 왕이 될 수도 있었고,

하나님께 기도해서 하늘 군대를 거느리고 전쟁을 일으켜서

로마를 이스라엘에서 몰아낼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게 유혹입니다. 그게 바로 마귀가 했던 유혹이었습니다.

정답/예수님의 목표는 십자가의 길이였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십자가를 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집니다. 세상에 승리하고, 십자가는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버리고 승리주의로 나아간 결과

‘제국주의적 확장 방식의 선교’를.. 과거 역사에서.. 교회가 종종 채택해온 것입니다.


▲승리주의의 유혹

할 수 있지만, 하면 안 되는 것, 그래서 유혹인 거지요.

예수님도 바울도, 그런 성공주의, 승리주의의 유혹을 끝까지 받았고,

결국 끝까지 이겨내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위대한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신앙 가운데도, 이런 승리주의가 상당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6월 2일에 선거가 있지요?

지방자치단체장을 비롯해서 지방의회 의원, 교육감 등을 뽑는

대규모 선거가 치러집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한번 해 봅시다. (절대 가정입니다. 현실 상황이 아닙니다.)

어떤 신앙이 투철한 기독교인이 보기에 이 나라가 틀려먹은 거예요.

신앙적으로 도무지 봐줄 수가 없다는 거지요.

그래서 이 사람이 후보에 나서기로 결심을 하고 후보가 되어서 선거운동을 합니다.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선거운동을 합니다.

상대후보에 대해서 흑색선전을 하고, 아무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선거운동을 해서 당선이 되었다고 합시다. 이긴 거지요.

그래서 ‘당선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이 지방자치단체장이 된 것이,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셔서일까요?

혹시 그게 마귀에게 절하고 세상 권세를 얻은 건 아닐까요?


이런 세속적 승리주의는, 기독교 신앙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바울도 단호하게 거부한 게 바로 그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승리주의에 젖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서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고 출장까지 다녔던 거지요.


그러다가 예수를 믿고 나서 이제는 그것이 얼마나 해로운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오물로 여기고, 해가 된다고 말합니다.


오늘 바울의 이야기는 

세상에서 부러워할 자랑거리들을 자랑으로 여기는 승리주의와 같은 것들이

우리가 주님의 길을 달려가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과감하고 단호하게 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적용 및 마치는 말


여러분, 혹시 지금 우리에게 그런 것들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우리를 잡아끄는 것. 우리에게 이리로 오라고 유혹하는 것들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내가 가진 것, 내 힘, 권력, 세상의 방식을 이용해서 뭔가를 이루고자 하는 것,

특히 하나님의 일, 교회의 일을 할 때, 그런 것들을 이용하려는 생각,

더욱이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뭔가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 그런 것들입니다.


공식적으로 절차를 밟아서 일을 처리하지 않고,

권력을 동원해서 되지 않는 일을 되게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거나,

내가 아는 권력층을 움직여서 일을 하려고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건축허가가 날 수 없는 땅에, 권력층에 있는 교인이 힘을 쓰거나, 로비를 해서

건축허가를 받고 교회 건물을 짓는다든지,

교회가 세상과 싸우고, 기독교인이 불신자와 싸우면서, 혹은 자기들끼리 싸우면서,

권력이나 재물을 이용해서 상대방을 눌러 이기려고 하는 것 말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섬겨야지, 왜 자꾸 싸우려고 드는지도 모르겠거니와,

그렇게 부당하게 일을 하고서,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하나님의 은혜로 일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그게 전형적인 승리주의지요. 예수님이, 바울사도가 그렇게 단호하게

거부하고 경계했던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 생각, 그런 태도는 우리의 목표를 흔들리게 합니다.

우리가 달려갈 방향, 우리가 가야하는 목표는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서

주님의 길(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인데,

그런 생각과 그런 태도가 우리의 발목을 잡아끌어서, 그 길을 가지 못하게 하고,

자꾸만 세상에 머물게 한다는 겁니다.


세상의 가치를 더 소중하게 여기고,

세상의 성공, 세상의 승리에 만족하게 해서,

주님의 길을 가지 못하게 하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게 한다는 겁니다.


바울 사도의 말을 다시 읽어볼까요? 10절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승리주의와 정반대되는 모습이지요.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바라야 하는 진정한 목표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여,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

승리가 아니라 고난과/희생과/죽음 말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오직 주님이 가신 그 길입니다.

아무리 험하고 힘들어도,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다른 길로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곳은 주님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곳에 가면 부활이 있습니다. 다른 곳에는 없습니다.


승리하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승리가 우리의 목표일 수 없습니다.

성공도 출세도 그 어떤 것도 우리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는 주님의 길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부활이 없기 때문입니다.


실패한다고 해도, 패배가 눈에 훤히 보여도, 옳지 않은 일,

세상의 방식, 불의와 부정은 선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진정한 승리가 없습니다.


옳지 못한 승리라도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승리주의는

기독교 신앙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겁니다.

공부를 못했으면 차라리 낙제를 하는 게 더 당당하고 신앙적인 것이지,

컨닝을 해서 우등을 하는 건 자랑도 아니고 신앙적인 것도 아닌 것입니다.


탈세를 하고, 사기를 치고, 뇌물을 주고, 이런 식으로 사업에 성공하는 건

간증거리가 아니라 회개할 일입니다.

그렇게 성공하는 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마귀에게 절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고, 우리가 얻고 싶은 게 뭘까요?

혹시 예수님과 상관없이 성공하고 부자 되고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방법이 아니더라도 무조건 교회가 성장해서 대형교회가 되는 것입니까?

(대형교회를 다 말씀 드리는 것은 아니라, 일부 대형교회를 뜻하는 것임)

그래놓고서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되었다고 자랑하지 않습니까?


혹시 그렇게 되지 못해서, 승리하지 못하고 성공하지 못해서,

‘나는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않아서 이렇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나 보다,’

낙심하고 상처받지는 않습니까?

그런 생각 역시 승리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성공하고 승리하고 하는 것과 하나님의 복, 하나님의 사랑과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승리주의는 그저 우상숭배일 뿐입니다.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 승리주의, 성공주의 같은 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 주님이 정말로 나에게 주시는 부활의 영광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 길이 때로는 고난의 길이요 때로는 실패와 패배의 길이지만,

그러나 그 길 끝에는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기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뒤돌아보지 않고,

옆길로 새지 않고, 오직 그 길로만 달려가는 것입니다.”

 

                                                                                                         *관련글 보기 ▣ 기독교 승리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