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라 골3:1~11 -출처보기/ 정리-
오늘 본문은 골로새 교회를 향한 바울의 편지입니다. 주1)
골로새서 3장의 첫머리에서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위엣 것을 찾으십시다! 위엣 것을 찾아야 합니다.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위엣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3:1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말한 ‘위엣 것은’ 추상적인 하늘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아직도 모순되어 보이는 역사,
그러나 이 역사의 주장자이신 위에 계신 그리스도 그분을 바라보라는 외침이었던 것입니다.
◑위엣 것을 찾으라 3:1~4
▲3:1절, 위엣 것을 찾으라.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 위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3:1
①“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는 새롭게 살아납니다. 영적으로 살아납니다.
이것은 영적인 부활이요, 영적인 소생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 믿고, 예수 안에 있던 새로운 생명을 얻어 영적으로 부활한 사람들은,
주님 다시 오시는 날, 육체의 부활에 또한 동참할 것입니다.
(육체의 부활에 대해서는 아래 4절에 자세히 나옵니다.)
②‘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 그는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그는 아직까지도 역사를 통치하십니다.
어두워 보이는 역사의 한 복판 속에서도, 위에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의 빗나는 약속의 말씀들을 주장하고, 그 약속의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에 대한 반 나치 최후의 저항 운동이 실패했을 때의 일입니다.
유명한 본 회퍼 목사님이 체포되어 감옥으로 갔습니다.
한 젊은이가 저항 운동의 배후 지도자로 이미 감옥에 있던
유명한 마르틴 니뭘라 목사님을 면회 가서 이런 보고를 했습니다.
‘목사님! 모든 것이 탄로 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끝장입니다.
사면초가입니다. 나갈 길이 없습니다. 동지들은 자폭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때 마르틴 니뮐라는 이런 예기를 했다고 합니다.
‘쉿- 아니요 동지. 아직도 하늘은 열려 있습니다.’ (이 설교문 제목이 ‘위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라’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처한 환경과, 우리 시대가 아무리 어둡고 캄캄하다 할지라도,
오늘 우리 가정의 경제가 풀리지 않고, 나의 미래가 불투명하고,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 부딪치며
삶의 동기와 의욕을 잃어버리고, 포기해 버리고 싶은 심정이 든다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아닙니다, 여러분! 믿음의 백성들을 위해서, 하늘의 문은 아직도 열려 있습니다.
하늘은 아직도 열려 있습니다.’
‘위엣 것을 찾는다’는 것은.. 위에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분은 승리자시고,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주님께는 결코 실패나 실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3:2절, 위엣 것을 찾을 때, 먼저 ‘생각’이 중요합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2
거듭나고 성도가 되었다는 것은, ‘생각’이 달라진 사람입니다.
즉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주4)
위엣 것을 생각하는 것은, 1~4절에
땅엣 것을 생각하는 것은, 5~8절에 더 구체적으로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5절에 가서 자세히 살피기로 하고, 일단 넘어갑니다.)
▲3:3절, 성도가 위엣 것을 찾는 이유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3:3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순간,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나의 부활이 되었습니다.
내가 죽어야 할 죽음의 자리에,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돌아가셨을 때에, (나도 주님 안에서 함께) 나의 옛 사람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나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생명을 갖고, 주안에서 새롭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주님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3:4절. 성도가 위엣 것을 찾는 이유는.. 부활의 영광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3:4
그리스도는 다시 역사 속에 귀환하십니다. 다시 돌아오실 것입니다. 주2)
여기서 강조된 단어는 ‘영광’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르치는 성경 구절마다 찾아보면
거기는 영광이라는 단어가 함께 나옵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 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던 사람들에게는
그날은 영광의 날이 될 것입니다. 어떤 영광일까요?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우리가 부활의 새 몸, (육체의 부활)
영광의 새 몸을 얻으리라는 약속을 우리에게 주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혼의 부활에 대해서는 위 1절에서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또한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빌3:20
다시 오실 그리스도,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될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우리가 예수 믿은 자이지만, 질병과 실패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여전히 이 땅에서 고통하며 살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을 받은 자이지만,
아직도 이 삶의 장에서 좌절과 고통이 거듭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 4절의 약속처럼,
우리는 부활의 새 몸을 입고, 주 앞에 영광스럽게 설 것을 믿습니다.
이 소망을 가진 사람들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믿으십니까?
작은 전투에서는 밀고, 밀리면서 패할 수 있지만, 그러나 큰 전쟁에서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그런 최후 승리를 못 믿으면, 우리가 마치 '가시 철망병'에 걸린 환자처럼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가시 철망병
2차 대전이 끝난 후에, 전쟁 포로였던 사람들의 건강 검진을 담당했던 의사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보니까 전쟁 포로자들은 모두가 다 비슷한 병을 앓고 있었다고 합니다.
적절한 병명이 없어서 고민하던 이 의사가 이 병에 붙인 이름은 ‘가시 철망병’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포로에서 해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는데도
이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수감되어 있던 그 수용소의
가시 철망을 잊어버리고 못하고 있었습니다. 정신적 충격을 계속 앓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자유의 몸이 되었는데도
그 수용소를 휘감고 있던 가시 철망은 이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그 가시 철망이 눈앞에 아른거릴 때마다, 이들은 삶의 의욕을 잃고
자리에 누운 채 아무것도 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은 아주 달랐습니다. 그도 역시 똑같은 수용소 생활을 했지만
그는 아주 활기차고 건강해 보였습니다.
이 점을 궁금하게 생각한 의사가,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은 남들이 다 걸린 가시 철망병에 어째서 걸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까?’
이때 그는 아주 흥미로운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수용소에 있을 동안 제가 바라본 것은, 가시 철망이 아니라
가시 철망 저편의 푸른 하늘이었습니다. 그 자유의 하늘을 바라보면서, 저는 언젠가
자유롭게 되는 그 날 나에게 전개될 새로운 미래,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시 철망 같은 복잡하고 모순된 세상의 한복판에 살면서도
위엣 것을 바라보는 자,
역사를 주관하시는 생명 되신 주님을 바라보고 사는 자에게는.. 결코 절망이 없습니다.
주 안에서만 영광스러운 미래가 약속되어 있다는 이 사실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위에 계신 주님을 바라봅니다.
부활하셔서 내 속에 성령의 모습으로 살아계신 예수님은,
이런 '부활과 영광의 생명'을 내게 공급해 주십니다.
◑땅엣 것을 죽이라 3:5~8
아래 골3:5~8절은, 땅엣 것을 찾는 삶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그것을 버릴 것을 권면합니다.
▲3:5절.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바울은 오늘 본문은 죄에 대해서 2가지로 구분 짓고 있습니다.
마음의 죄(5절) 와 입술의 죄(8절)입니다.
각 죄마다 5가지 죄명을 열거합니다.
마음의 죄 5가지는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이게 다 마음의 죄들입니다.
①그런데 이것들 가운데서 가장 밑바탕에서,
우리의 마음을 감옥으로, 절망으로 만들고 있는 죄악의 가장 기본은 뭐냐면,
욕심입니다. 욕심.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우리 욕심(탐심)이 죄악의 뿌리가 되는 것이에요.
이성에 대한 욕심. 명예에 대한 탐심. 물질에 대한 탐심.
‘탐심이 우상 숭배다’ 그랬습니다. :5
여러분 우리가 욕심을 품게 되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욕심을 품은 대상’이예요. 예수님이 주인이 아니예요.
이제 내가 예수님을 섬기지 않고, 그 ‘욕심의 대상’을 섬기게 되니까.. 그것의 지배를 받게 되니까..
이게 우상숭배이지요. 그래서 ‘탐심이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②‘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했어요.
자살하라는 뜻은 물론 아니고요,
자기가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여기고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3:6절.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요즘 ‘전자전, 컴퓨터 전쟁’이라는 말이 있는데,
미사일이나 포탄에 ‘추적 장치 센서sensor’가 장착되어 있어서,
그것이 수백~수천 킬로를 날아가 정확하게 표적을 타격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와 같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추적 장치’보다 더 정확하게 나를 추적합니다.
마귀의 역사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나를 파괴시킵니다.
그러나 ‘회개하라 천국이 임하였느니라’ 말씀처럼,
우리가 회개하면, 반대로 천국의 기쁨, 천국의 행복과 생명이
마치 ‘추적 장치’처럼 나를 항상 따라다니고, 동행합니다.
▲3:7절.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예수님 까닭에 우리는 어제의 절망에서 탈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지나간 날의 절망에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빛나는 미래, 영광의 미래, 우리 몸의 부활의 미래를 약속 받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나간 날의 절망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탈출시켜 주십니다.
▲3:8절.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8절은 “이제는”으로 시작합니다.
7절은 “전에는” .. 이 두 가지 단어가 대조적으로 등장합니다.
만약 앞으로 제가 예수 믿고 변화된 내 삶에 대한 어떤 간증집을 하나 출판한다면
저는 책 제목을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전에는, 그러나 이제는>
바울은 성도의 삶의 대조를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기 전에는 저와 여러분을 붙들고 있었던 절망이 있습니다.
그 절망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죄에요 죄.
죄가 우리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죄가 우리의 삶을 어둠으로, 감옥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5절에, 마음의 죄 5개가 있었고,
8절에, 입술의 죄 5개가 나옵니다.
분노, 악의, 훼방, 부끄러운 말, 그리고 거짓말(9절)입니다.
①분노. 대부분의 분노는 내 속에 있는 욕망이 충족되지 못할 때
그것 때문에 분이 생겨요. 화가 나요.
그것은 곧잘, 나로 하여금 경쟁 상대에 있는, 이웃들을 향한
②악의로 나타납니다. 악의, 악한 생각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를
③훼방하게 되고,
④중상하게 되고, 모략하게 되고, (부끄러운 말)
⑤마침내 자기 정당화를 위해서 쉽게 거짓말의 죄 속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3:6
위엣 것을 찾는 성도는.. 이런 땅엣 것을 죽입니다. 3:1, 5
◑3. 새사람을 입었으니 3:9~11
▲3:9절.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5절에서는 ‘죽이라’고 했는데,
8절과 9에는, ‘벗어 버리라’ 라는 단어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죽이라’는 단어는 단호한 태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칼로 잘라버리듯 단호한 태도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단 한 번의 결심, 이 단호한 결단만으로
우리의 삶이 쉽게 자유를 얻을 수는 없다는 현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벗어버리라’는 단어는, 일시적인 행동이나 결단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라
이것은 지속적인 과정을 뜻해주고 있는 단어입니다. ‘계속해서 벗어버리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옛 사람은 벗는 거예요.
그리고 좀 더 큰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죄에 대한 단호한 결단, 이것은
의지적 결단만을 강조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주목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의지적 결단이 아닙니다.
앞서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 2장 마지막 부분에서,
거룩함에 도달하기 위해서 금욕주의자들이 취하고 있는 잘못된 태도를 지적했습니다.
금욕주의자들도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한 방편으로
스스로의 결단에만 근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의 결심에만 근거하고 있었어요.
자 골로새서 2장의 마지막 부분을 다시 한번 보시면,
21절 이하에 “붙잡지도 말아라. 맛보지도 말아라. 만지지도 말아라”
이것은 금욕주의자들의 3대 표어라고 제가 강조했죠?
23절에 보십시요.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그러니까 자기 의지에 근거한 아주 결단적인 삶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바울이 이것이 몸을 괴롭히는 데는 지혜로운 모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육체를 좇는 것을 금지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다.’
이것은 성공할 수 없는 노력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금욕주의자들이 그 죄를 벗어버리려는 노력과,
복음적 그리스도인들의 노력은 어떻게 달라야 할까요?
그들은 괴로워하면서 자기 결단에 호소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달라요.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가장 중요한 동기는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 받았어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스러운 약속과 미래를 얻고 있습니다.
내가 이 주님을 바라볼 때,
내 마음속에는 그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열망이 생겨요.
그런데 이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 이런 죄들,
이런 습성들을 내가 기꺼이 벗어버리는 이유는
내가 사랑하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즉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과 교제하는 사람은,
주님이 내적 음성으로 말려주기도 하시고,
또 자기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이런 죄들에서 기꺼이 돌아서는 것입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주님, 그 주님이 이 일을 싫어하시지!’
그래서 우리는 결단하는 것입니다. 탐욕을 버립니다. 욕심을 버립니다.
음란함을 버립니다. 포기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주님 앞에 기쁨이 되는 존재가 되기 위하여,
주님을 더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내가 이것을 결단할 때마다
주께서 내 삶에 더 커다란 자유를 주세요. 이것이 성화의 과정이에요.
늘 주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사람만, 이게 가능합니다.
9절에 “옛 사람을 벗으라”라는 명령이 있어요.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벗는 것만으로 명령이 끝나지 않아요. 벗기만 해서는 안돼요. 입으셔야지.
그래서 그 다음 10절에는 ‘입으라’는 명령이 나타납니다.
▲3:10절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여러분! 예수 믿고 새 사람이 된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순간 새로운 피조물/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새 사람으로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내가 새 사람이 된 것은 사실이예요. 나는 새로운 신분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새로운 사람이 되는 시작에 불가합니다.
이것이 “너희가 새 사람을 입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의 강조는 끝나는 것이 아니라요,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이건 현재 진행형입니다.
계속해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새로운 사람이 된 사람은, 계속 새로워져야 합니다.
내가 예수 믿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이것은 완성이 아닙니다. 시작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되어야 할 새 사람, 그 사람의 구체적 목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그런데 죄가 들어왔을 때 우리 안에 있었던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졌어요.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그 형상을 다시 회복하고, 이제 점점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예요.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은 닮아갈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주님을 닮아갈 수가 있어요?
하나님 바라보고 있으면 돼요.
부부가 어떻게 닮습니까? 서로 바라보면 닮습니다.
우리가 쳐다보고 있으면 닮아요. 신기하게 닮습니다.
바라보고 있으면 우리는 닮도록 되어 있어요.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면, 주님을 닮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새로운 사람으로 닮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의지적 결단으로 되는 것이 아니예요. 주님 바라보면 되요. (3:1참조)
위에계신 주님! 아직도 역사를 주관하시고, 지배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초점을 맞추고, 시선을 맞추고,
쉬지 말고 주님 바라보는 자마다.. 주님을 닮을 것입니다. 주3)
사랑하시는 여러분!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무슨 생각부터 하십니까?
주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하루를 주신 주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순간 순간, 주님을 바라보시고, 위엣 것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땅엣 것을 죽이고, 벗어버리도록, 나를 인도해 갑니다.
▲마치는 말
주 앞에 서는 날 우리에게 던져질 한 가지 질문은, 내가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아니라,
어떤 모습으로 살았느냐가 될 것입니다.
그분 앞에 서는 날 내 삶이 부끄러움이 아니라, 영광일 수 있기 위하여,
오늘도 위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주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위에 것을 찾으라. 기도하십시다.
........................
주1)
골로새 도시는 루카스 계곡에 자리 잡은 3개의 도시 중에 하나였습니다.
골로새,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 세 도시는 삼각형을 이루면서 함께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점차 세월이 흘러가면서,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 리가, 번영을 거듭함에 반해서
골로새는 차츰 이류와 삼류 도시로 전락해 갔고,
사람들은 골로새 도시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새롭게 이 지방에 유입된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이 도시의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영지주의를 포함한 소위 이단사상들이 들어오면서
그들의 믿음마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안으로 밖으로, 삶의 동기와 의욕을 잃어버리고 좌절하고 있었던
골로새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편지가 바로 골로새서 입니다.
주2)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백악관으로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목사님! 인류 역사의 방향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습니까?’
이때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가지고 있던 성경을 들면서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가진 성경에 의하면,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하여 흘러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주3)
유명한 청교도 작가인 나다나엘 호오돈의 <큰 바위 얼굴>을 잘 아시죠?
어느 마을 산마루에는 보기만 해도 사람들에게 참 편안함을 주는 보기
좋은 바위 얼굴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장차 그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이 나타나서
마을 사람 모두에게 행복을 안겨다 줄 것이라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오랜 세월 그 인물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장군이 이 마을에 나타났습니다.
마을 전체가 소란했습니다. ‘드디어 큰 바위 얼굴이 나타났다고’
그러나 얼마 후 그는 사람들에게 실망만 안긴 채 마을을 떠나갔습니다.
그 후에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정치가도 나타나고, 시인도 나타났지만,
결과는 모두 안 좋게 끝났습니다.
어느 날,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이 끝끝내 나타나지 않으려나 보다 하고
실망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앉혀 놓고
이 마을의 지도자가 노을이 발갛게 물든 저녁에 위로의 말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어네스트 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야기 도중 마을 사람 중에 하나가 갑자기 소리를 칩니다.
‘저 분이예요! 저 분 얼굴이 큰 바위 얼굴과 꼭 닮았어요!’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주인공은, 마을 사람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 어네스트 라는 사람이 큰 바위 얼굴을 닮을 수 있었겠습니까?
마을 토박이인 그는 어릴 적부터 아침 점심 저녁으로
산마루의 바위 얼굴을 바라보며 자랐고,
바위 얼굴을 바라보면서 점차 바위 얼굴을 닮아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4)
큰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키가 크고 몸집이 크면 큰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마음이 커야 큰 사람입니다. 키는 작아도 마음이 크면 큰 사람입니다.
마음이 작으면 작은 사람입니다.
귀한 것을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귀한 사람이 되고,
천한 것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천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생각하는 정도만큼의 인간이 됩니다.
좀 더 나아가서는 '생각의 거점', 거기에 나의 존재의 현주소가 있습니다.
따라서 '무얼 생각하느냐?'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사실을 생각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고, 진리를 생각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가 하면 헛된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을 생각하며 추구하는 사람,
이 사람은 절망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인간입니다.
또 생각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예 생각을 안 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각이 고민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생각이 있어서 고민하는 인간이 생각이 없는 동물보다 귀한 것입니다.
고민이 있다고 해서 괴로워하지 마십시요. 고민을 하니까 인간입니다.
생각도 못하고, 고민도 못하는 상태가 되면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민을 한다는 것은 인간의 특권입니다. ▣ 복음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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